84.
이번 땡땡땡은 카미앙의 침실에서 할 일보다는 훨씬 길었지만 자신 있었다. ‘행동을 재연해’라는 글귀로 보아 내가 했던 일을 다시 해보란 소리였다.
지금까지 내가 장미 정원에 왔던 건 단 한 번뿐이었다. 거기서 한 일이라고는 루티시나와 카미앙 앞에서 바보같이 쭈뼛댔던 것과 카미앙의 요청에 따라 장미를 다듬던 일 뿐이었다.
“파르미엔 영애.”
여기서 날 부를 사람이라고는 크로버 밖에 없을 거라 여겼는데 이건 여자 목소리였다.
‘설마 내가 재현해야 하는 게 장미를 다듬는 게 아니라 루티시나에게 바보처럼 아무 소리 못 하는 그건가.’
불안한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이 아니라, 여기. 아래쪽이야.”
아래쪽? 고개를 숙이자 장미 정원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마룬시에가 보였다.
“공녀님? 대체 여기서 뭘 하시는 거죠?”
이 이른 아침에, 그것도 아무도 없는 정원에서 다른 나라 공녀가 할 만한 일이 뭔지 떠오르질 않았다. 마룬시에는 치마를 털고 일어났다.
“놀랄 것 없어. 그냥 정원을 좀 돌보던 중이었으니까.”
“…공녀님께서 라우치 왕실의 정원을 손수 돌보고 계셨다고요?”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우방국을 위한 호의로 그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정원사가 할 순 없는 일이기도 하고.”
마룬시에가 앉아있던 자리를 둘러보았다. 수목을 손질했다거나 식물을 심은 흔적 같은 건 없었다. 하다못해 정원 손질에 필요한 가위나 목장갑 따위도 보이질 않았다. 내 의아한 시선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마룬시에가 설명을 덧붙였다.
“명색이 장미 정원인데 향기가 없잖아?”
“가을이니까요.”
부지런히 가꾼 덕분에 정원에는 시월에도 장미꽃이 피어있었다. 하지만 가을 장미는 꽃송이가 작아서인지 봄, 여름과 비교하면 향이 약했다.
“아쉽다 이거지. 꽃도 실하지 못한데 향기마저 비실비실.”
“그래서 공녀님이 정원에 향수라도 뿌리고 있었다는 건가요?”
“딩동댕!”
정말? 그냥 한번 해 본 소리였는데? 정원에 향수를 뿌리는 사이코가 있다고? 당황한 나를 보며 마룬시에가 가방에서 큼지막한 향수병을 꺼냈다.
“기사님이 마침 좋은 타이밍에 온 거라니까. 내가 여기 싹 가꿔놨으니까 기분 좋게 산책하라고.”
몇 발자국 걸어가던 마룬시에가 뒤돌아보며 말을 보탰다.
“아니지, 혹시 내가 이상한 성분을 섞어놓기라도 했으면 어떡해? 막 중독 증상을 보인다든가. 사지가 마비된다든가. 기사님이 산책하기엔 너무 위험한 장소다. 그쵸?”
깔깔거리는 마룬시에의 비웃음을 뒤로하고 난 장미 장원으로 들어섰다. 제아무리 안하무인인 마룬시에라도 여긴 바렌시드의 왕궁이었다. 내가 가짜 향수 사건에 개입했다고 시비를 거는 것뿐이었다.
‘맘껏 웃어라. 난 네가 조용히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사람이니까.’
마룬시에가 계속 날 쫓아다니면서 성가시게 굴면 퀘스트 달성에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어차피 내 정원도 아닌데 향수를 뿌렸든 농약을 뿌렸든 내 알 바 아니지.’
정원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
튜토리얼이 끝나고 이제 막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된 나는 카미앙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백작가에 진 빚을 돌려받고 쿨하게 바렌시드를 떠날 계획이었으니까.
‘이렇게 일이 길어질 줄은 몰랐네. 크로버도 만나고….’
크로버를 떠올리자 불과 몇 시간 전에 있었던 키스가 생각났다.
‘방해꾼의 등장으로 여운을 느낄 새도 없었지.’
나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 배려도 없이! 갑자기 들이댄! 그런 키스가 좋았다는 거야?’
‘배려가 없긴. 갑작스럽긴 했지만 내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는걸? 솔직히 말해. 좋았잖아?’
갑자기 내가 이중인격자라도 된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좋지는 않았어. 좋다기보단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숨이 멎을 것 같은 그런….’
‘그런…. 나도 모르게 시스템 창을 불러낸 건가?’
갑자기 나타나 반짝이는 시스템 창은 한껏 들떠있는 내 마음에 찬물을 끼얹기 충분했다.
‘퀘스트나 해결하자.’
난 저 땡땡땡 안에 들어갈 말을 찾기 위해 손가락을 꼽으며 글자 수를 맞춰보기 시작했다.
‘크로버를 만났을 때? 아니지 글자 수가 안 맞는구나. 그럼 크로버를 처음 만났을 때?’
글자수도 마침 딱 맞았다. 나는 확신에 차 장미 가지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크로버를 처음 봤을 때 오징어가 아니었음 어땠을까?’
이시아나 녹시아나 얼굴에 약한 편이니 첫눈에 반하는 사고가 발생했을지도 몰랐다.
‘아니지, 아니야. 신관 복을 입고 있으니 어차피 얼굴은 안 보이잖아?’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자고로 미남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어도 다 티가 나는 법이었다. 오징어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이상 어떻게든 잘생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나 잘 생겼는데. 그런데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다니….’
동생에게 배신당하고 부모에게 잊혀진 삶이라…. 어떤 심정이었을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나만은, 나만은 크로버를 절대 잊지 말아야지. 끝까지 기억해줘야지.’
아니지, 기억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가능하다면 카미앙에게 빼앗긴 것을 찾아주고 싶었다.
‘물론 달리 생각나는 방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시스템이 이 목걸이 보고 라암의 봉인이라고 했으니 뭔가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머리가 몽롱해지고 시야가 흐릿해지는 게 과거의 환상이 보일 모양이었다.
‘벌써 크로버를 처음 만났던 곳에 도착했나?’
툭. 검이 땅에 떨어졌다. 팔에 힘이 빠진 까닭이었다. 어쩐지 온몸이 나른했다.
‘마지막 퀘스트라 그런지 반응이 강력하네. 뭔가 엄청난 환상이 나타날 모양이지?’
나도 모르게 자꾸만 눈이 감겼다.
***
“녹시아? 녹시아? 내 목소리 들리시오?”
나 깜박 잠든 건가? 어젯밤을 꼬박 셌더니만 눈꺼풀이 의지를 갖게 되었나 보다. 내 허락도 없이 꼭 닫혀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 잠들면 안 되지.’
그러나 의지뿐만 아니라 무게까지 갖게 된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체 어찌 된 건가? 제대로 치료를 한 건가?”
화를 내는 카미앙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지? 자기가 잘한 게 뭐가 있다고.
‘…잘한 게 없다니. 지금 카미앙한테 그런 소릴 한 거야? 녹시아, 너 미친 거 아니니?’
‘무슨 소리야, 당연히 잘한 게 없지. 지금까지 카미앙이 나한테 한 일을 생각해봐.’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날 타일렀다.
카미앙이 나와 함께 전투를 치르지 않은 건 그가 왕세자이기 때문이었다고. 제 한 몸 지킬 정도의 검술은 익혔지만, 카미앙의 실력은 아나드의 요새를 습격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여러모로 그가 후방을 지킨 건 당연한 일이었다고.
‘잠깐만, 지금 그걸 지적하는 게 아니잖아? 내가 카미앙이 잘한 게 없다고 말 한 이유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마치 두 명의 내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괜찮아지다니. 날 두고 하는 소리인가? 불안감이 몸을 짓누르는 피로를 이겨냈다. 난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사람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눈부신 금발 머리에 하늘처럼 파란 눈동자…. 역시나 카미앙이었다.
“녹시아?!”
카미앙이 얼른 내 곁으로 달려와 이마를 짚었다.
“아픈 덴 없소? 내 목소리가 들리시오? 말은, 말을 할 수 있겠소?”
얼굴을 보자 확실해졌다. 그가 화를 낸 이유는 깨어나지 못하는 날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는 세상을 다 얻은듯한 표정으로 내 손을 꼬옥 감싸 쥐었다.
“우리가 승리했소!”
“승리라뇨?”
“아나드 말이요. 드디어 그들이 항복했소. 아니 항복이라기보단 궤멸했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겠군. 저 요새에 우리의 깃발이 펄럭이는 게 보이시오?”
아나드, 아나드…. 그래, 내가 아나드 토벌전에서 적장의 숨통을 끊었었지. 그런 일이 있었다. 카미앙은 꼭 어제 일처럼 말하는데 난 그 승리가 굉장히 옛날에 있던 일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그걸 왜 기뻐하고 있죠?”
“갑자기라니! 그대가 잠들어 있던 사흘은 긴 시간이었지만 아나드를 사흘 전 토벌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요. 한 달 내내 아니 바렌시드에 돌아갈 때까지 계속 기뻐해도 과한 일이 아니지.”
삼일이라니. 아나드 토벌전에서 승리한 게 사흘 전이라고? 카미앙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아나드 토벌전에서 진작에 바렌시드로 돌아왔지 않았나?
“여긴…. 바렌시드 아닌가요?”
“하하, 아직 바렌시드로 출발조차 하지 못했지. 하지만 그대가 깨어났으니 출발할 준비를 하겠소.”
신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던 카미앙이 중요한 걸 잊었다는 듯 제 무릎을 쳤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카미앙이 돌연 내가 누운 침대 아래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작위를 받는 기사와도 같은 자세로 말이다.
“아나드 토벌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녹시아, 그대 덕분이요.”
“뭐, 뭐죠? 갑자기?”
나에게만 갑작스러운 일이었나보다. 뒤쪽에 있던 베르만과 장병들이 모두 카미앙을 따라 무릎을 꿇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모두 파르미엔 기사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저희 모두가 파르미엔 백작가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파르미엔 백작가가 물심양면으로 토벌대를 지원 해 준 것도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줄 것이오. 그리고 그대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건….”
뜸을 들이던 카미앙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내게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내 뺨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카미앙의 푸른 눈동자가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평생 그대와 함께하며 그 빚을 갚을 것이요. 바렌시드에 돌아가면 그대와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리겠소.”
카미앙의 눈빛은 따스했고 흘러나오는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