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카미앙 미친놈! 불쌍한 크로버…!를 중얼거리는 사이 현실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카미앙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의 머리맡으로 다시 다가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대는 아쉬웠다.
‘어차피 기절한 거 티 안 나게 몇 대만 더 때려도 괜찮지 않을까? 지금이야 카미앙을 지키는 사람도 없고 누가 알지도 못할 테고.’
내가 손을 들어 올린 그때였다.
톡, 톡, 톡.
‘뭐야? 뭐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누군가가 들어오는 건 아닌가 문 쪽으로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괜히 혼자 겁먹었네.”
그때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톡, 톡, 톡.
다시 들어보니 소리가 들리는 방향은 문이 아니라 창가 쪽이었다. 하지만 새나 벌레 울음소리는 아니었다.
‘설마 카미앙이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근위병이라도 세워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긴 지금까지 찌질하고 이기적인 왕세자인 줄만 알았는데 제 형을 없애버린 진짜 악당이 아니었던가.
난 탁자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하드커버에 두께도 두툼해 이 정도면 충분히 흉기가 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테라스로 다가갔다. 예상했던 대로 창밖에 사람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상대 역시 내 움직임을 보고 있을 터였다. 이럴 땐 내 움직임을 읽을 수 없도록 재빠르게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다.
‘하나, 둘, 셋!’
난 바람처럼 빠르게 테라스로 이어지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창문 뒤에 선 상대를 향해 거침없이 책을 휘둘렀다.
“녹!”
녀석이 제법 날쌔게 내 공격을 피했다. 과연 카미앙이 뽑은 정예병이었다.
“녹시!”
아무래도 놈은 무슨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난 다시 한번 책 모서리로 녀석의 옆구리를 노렸다. 이번엔 성공이었다. 놈은 비명도 내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녹시아 님.”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소리여서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 꼭 내 이름처럼 들렸다.
“녹시아 님.”
아니,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저, 저 크로버….”
크로버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눈이 뜨이기라도 한 건지 이제야 상대의 모습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어머! 크로버! 정말 크로버예요?”
혹 카미앙이 깰세라 얼른 창문을 닫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된 겁니까?”
우리는 서로를 보고 동시에 소리쳤다. 물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속삭이면서 말이다.
크로버는 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날 끌어당기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이거 술 냄새 아닙니까?”
술 냄새? 와인 한 병을 거지는 혼자 마셨으니 술 냄새가 나긴 나겠구나. 날 잡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크로버가 이렇게나 술을 싫어하는지는 미처 몰랐다.
“괜찮으신 거 맞죠? 아무 일도 없으셨죠?”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내 얼굴을 살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린 크로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마엔 땀이 흐르고 있었다.
난 잠시 시선을 돌려 이 테라스에서 땅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대체 크로버가 여기를 어떻게 올라온 건지 모르겠다.
“설마 내가 걱정돼서 여기까지 쫓아온 거예요?”
크로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나를 제 품에 와락 껴안았다. 크로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버린 꼴이 돼버렸다. 숨이 막힐 것 같아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자세도, 바람이 지나갈 틈새조차 없이 그와 붙어버린 것도, 다리에 지나치게 힘을 주고 있어 쥐가 날 것 같은 것도, 전부 다 불편했다. 그런데도 그의 포옹이 싫지 않았다.
“술을 먹인 것도 모자라 침실까지 끌고 오다니….”
놀란 사람을 달래기라도 하는 것처럼 크로버는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빠르게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덕분에 덩달아 내 심장도 제 페이스를 잃고 날뛰고 있었다.
정확히는 술을 먹인 게 아니라 먹은 거였고, 침실로 끌려온 게 아니라 따라온 거였지만 정정하진 않았다. 굳이 불필요한 말을 꺼내 이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 분명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한발 늦게 크로버의 상처가 생각 나버렸다. 사실 무사한 거냐고 난리를 쳐야 할 사람은 크로버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크로버가 선수 치는 바람에 깜박했잖아.’
나는 가볍게 크로버의 가슴팍을 밀어내고는 그의 셔츠를 확 풀어헤쳤다.
“지, 지금 뭐 하시는….”
“상처는요? 피 많이 흘렸어요? 치료는 잘 받은 거예요?”
난 크로버의 왼쪽 허리에 남아있는 상흔을 더듬거렸다. 이렇게나 상처가 잘 아물었으니 덧날 걱정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전쟁터에서 상처가 곪아 손쓸 수 없게 된 병사를 한 두 번 본 게 아니었다.
“다리는 어때요? 하긴 여기까지 온 걸 보니 다친 것 같진 않네요. 바람의 가호가 제대로 작동했나 봐요. 직접 보지 못했으니 믿을 수가 있어야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앞으로 당신이 작전을 짜는 건 금지에요.”
내가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동안 크로버는 밀랍 인형처럼 가만히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 셔츠가 반쯤 풀어진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참 근위병들이 언덕 아래로 내려갔는데 잘 따돌렸어요? 내가 도와주러 내려가려고 했는데 하필 그때 카미앙이….”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크로버의 입술이 내 입을 막아버린 탓이었다.
“……!”
크로버의 달뜬 시선을 느끼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암묵적인 벽이 있었다. 게임의 목표를 달성하는 게 우선이었던 나는 그에게 선을 그었고, 눈치 빠른 사람답게 그 선을 넘지 않았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입맞춤이라니.
“갑자기 왜…….”
당연하게도 내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꼭 내가 하는 말을 삼켜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자꾸만 들러붙었다. 혀에 심장이 달린 것처럼 뜨거웠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하지만 언제든지 크로버를 밀어낼 수 있는 주먹은 움직이질 않았다. 그저 크로버의 어깨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누가 올 수도 있고, 크로버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 또…’
이럴 때가 아닌 이유가 차츰차츰 희미해져 갔다. 그 빈 자리를 크로버와 맞닿은 곳에서 전해지는 감촉이 채워갔다.
입술 주변으로 간질간질한 감각이 번져가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더 이상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며 한숨 섞인 말을 토해냈다.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크로버 역시 제대로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내가 크로버의 입을 막은 탓이었다. 물론 손으로.
“쉿.”
크로버를 테라스 바닥에 주저앉히며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거기 누구냐!”
기사의 날카로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다리스 대장님.”
“파르미엔… 기사님? 파르미엔 기사님 맞으십니까?”
믿음직스러운 신하이자 성실한 기사인 다리스가 오늘도 새벽 순찰을 돌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니.’
여기까지 왔는데 키스에 정신이 팔려 잡혀간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난 녹시아의 동물적인 감각에 경의를 표하며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네, 새벽 공기가 참 좋네요.”
하지만 다리스는 태평하게 내 인사나 받을 상황이 아닌 듯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번이나 주변을 훑었다.
‘크로버가 숨어 있는걸 눈치챈 건가? 다리스와 맞붙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는데.’
“거기는 왕세자님의 침실이 아닙니까? 대체 녹시아 님께서 이 시간에 왜 거기 계십니까?”
예상외의 질문이 돌아왔다. 다행히 크로버가 있는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젯밤에 왕세자님과 식사를 하고 같이 방으로 왔거든요.”
“왕세자님과 함께 침실로 드셨다고요?”
“네, 맞아요.”
“아… 제, 제가 그만 큰 실례를 했습니다.”
다리스가 뭘 상상한 것인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는 게 뭔가 이상했다.
‘설마?’
이제서야 내가 얼마나 오해하기 좋은 발언을 했는지 알아챘다. 난 난간을 휙 뛰어넘으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물론 크로버에게 약속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미의 정원에서 만나요. 우리가 처음 만났던 거기.”
내 키의 두 배가 넘는 곳에서 훌쩍 뛰어내린 덕에 다리스의 시선은 완전히 내게 꽂혀있었다.
“그, 어제는 왕세자님께서 술에 취하셔서요.”
“아니요. 아니요. 기사님, 그런 것까지 일일이 이야기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다리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래, 이대로 다리스를 크로버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몰아가자.’
“왕세자님을 곁에서 보필하는 대장님이라면 어찌 된 사정인지 아셔야 할 것 같아서.”
“기사님과 함께 계셨는데 왕세자님께 무슨 일이야 있으셨겠습니까.”
드디어 다리스를 건물 모퉁이 반대쪽으로 몰아넣었다. 이제 크로버도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네요. 왕세자님은 취해서 그대로 잠드셨으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네요.”
난 양팔을 벌리며 보란 듯한 자세를 취했다. 어젯밤에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이 꼬질꼬질한 기사 옷을 입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기 위함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다리스가 이제야 녹시아의 말 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어제 모도루 영애한테 제가 전한 쪽지를 받으셨나요?”
“모도루 영애께 전언이라도 전하신 겁니까? 전 왕비님을 수행하느라 왕궁에 없었습니다.”
헤슬루와는 길이 어긋나 만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혹 중요한 일이었습니까?”
“아뇨, 아녜요. 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혹시 모도루 영애를 만나신다면 잠시 궁에 머물게 됐다고 별일 아니니 제 걱정 말라고 전해주시겠어요?”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자꾸 부탁을 드려서 죄송한데…. 왕세자님께서 혹 평소보다 늦게 나오신다면 상태를 확인할 만한 사람을 불러다 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술에 약하신 분이 아닌데 어젠 정말 기절하듯 잠들어버리셔서요.”
병 주고 약 주고나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카미앙을 기절시킨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미앙의 방에 있었던 위스키를 입에 잘 들이붓고 왔으니 누가 봐도 술에 취해 잠든 줄 알 것이다.
카미앙 역시 내가 공격하는 줄조차 모르고 쓰러졌다. 주변 사람들이 술에 취해 쓰러지셨다고 하면 본인도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대충 카미앙의 일을 수습한 나는 장미 정원으로 향했다. 마지막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초상화의 모델 찾기가 뭐냐,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듣고 있나, 시스템? 괜히 이상한 짓만 했잖아! 나도 사회적인 위치와 체면이 있는 사람이라고!’
퀘스트 확인을 위해 시스템 창을 열다 보니 불현듯 떠올랐다. 내가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그 거지 같은 힌트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말이다.
‘초상화 뒤에 붙는 조사라도 확실히 알려주던가. 이건 그냥 재수가 좋았던 거지 아니었으면 나 몇 날 며칠을 카미앙의 침실에 있었어야 했을걸? 정말이지…. 너도 양심이 있으면 반성하라고, 반성!’
나는 마지막 퀘스트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콕콕 밀어내는 듯한 시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