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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82화 (82/95)

82.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그대를 밀어냈지만…. 지금이라면 좋소.”

제법 진지한 목소리였다. 하긴, 내 입장에선 농담인가 싶을 정도로 우스운 말이어도 카미앙은 늘 진심이었다.

‘그치만, 이런 쪽으로 진심이었던 적은 없었잖아?’

당황한 내가 쭈뼛거리는 동안 카미앙이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놀란 모양인데 그 순간이 맞소.”

“그 순간이라뇨?”

“그대가 수백 번 머릿속으로 상상했을 그 순간 말이요.”

이번엔 카미앙의 손이 내 손 위에 겹쳤다. 난 손에 힘을 꾹 주며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려고 하는 그 몹쓸 손가락을 막아냈다.

“우리 사이가 그동안 냉랭했던 건 어쩌면 남녀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그런 게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오.”

“남녀 사이에 마땅히 있어야 할…?”

“모르는 척하지 마시오. 그대도 알건 다 알만한 나이잖소. 그래서 오늘 저녁에 와인도 그렇게 들이켠 거 아니오? 술기운을 빌려 나와 어떻게 좀 해보려고 말이오.”

‘어떻게 해보려고 했던 건 맞는데 그렇다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거든?’

대체 왜 이러는 건가 싶어 슬쩍 공략 대상의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아니, 이게 뭐야. 언제 이렇게 변했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가 ‘드디어 녹시아에 대한 내 마음을 깨달았어.’ 였는데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이거야말로 후회하기 전 단계라는 확신이 듦과 동시에 어쩐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카미앙이 나한테 집착한다고? 술 때문에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인가?’

아니면…. 라암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확 돌아섰을 가능성도 있었다.

내가 상태창을 확인하는 틈을 빌어 카미앙이 날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내가 침대 위로 쓰러지는 그런 그림을 상상한 것 같은데 어림없는 짓이었다. 난 꼿꼿이 앉은 자세를 유지하며 카미앙을 내려다보았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전 혼전 순결주의거든요. 제 의사를 존중해 주시죠.”

“내 약혼녀라면서. 어차피 결혼할 거라 생각하는 거 아니었나? 그런 게 뭐가 중요한지 모르게….”

팍.

이건 마치 잘못 삼킨 물이 코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난 시종의 목덜미를 때리듯 카미앙의 목을 내리쳤다. 카미앙이 순식간에 잠을 자듯 기절해 버렸다.

‘아차. 내 퀘스트….’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몸이 움직이고 난 후였다. 이렇게나 노력했는데…. 결국 퀘스트에 실패하고 말았다. 카미앙과 함께 이 침실에 들어올 수 있는 ‘다음’이 존재 할 거라곤 장담할 수 없었다.

‘혼자 잠입이라도 하는 거면 모르겠지만….’

당장 내일도 문제였다. 내 한 몸 건사하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얻어맞은 걸 기억하는 카미앙이 감옥에 있는 루안에게 보복한다거나 크로버를 잡아 와 괴롭힌다면….

‘술에 취해 기억이 안 난다고 둘러대야 하나.’

난 벌떡 일어나 장식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카미앙이 방에서 혼자 홀짝거리는 위스키라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전쟁터에선 춥다는 핑계로 줄곧 자기 전에 술을 마셨으니 말이다.

‘혹시 땡땡땡이 카미앙과 한잔하기는 아니었을까? 하아…. 이제 와서 생각나면 어쩐담.’

반성문을 써가며 방을 뒤지고 있는데 벽 한쪽에 걸려있는 커다란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그림이었다.

‘뭐야, 왕세자는 제 얼굴을 이렇게 커다랗게 걸어놓고 사는 거야? 자기가 연예인이야 뭐야.’

얼굴이야 얼굴 천재라 소문난 연예인보다 못할 건 없었지만 카미앙이 하는 행동은 일단 다 아니꼬웠다. 초상화 아래에 있는 서랍장을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는데 어째 카미앙이 아닌 다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크로버?’

앞머리를 한쪽으로 말끔하게 빗어넘긴 어린아이는 분명 성벽 언덕에서 보았던 어린 크로버였다.

어두워서 잘못 본 건가 싶어 다시 한번 붉은 눈동자에 연한 금발을 확인했다.

‘그래, 이건 크로버가 확실해. 대체 카미앙은 무슨 생각으로 크로버의 그림을 방에 걸어둔 거지?’

초상화의 얼굴이 크로버가 확실하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였다.

“어머니, 초상화를 다시 그려주세요.”

갑자기 들려온 어린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주저앉고 말았다. 동시에 주변이 세피아 빛으로 물들었다.

‘퀘스트 달성에 성공했어? 갑자기? 대체 정답이 뭐였길래?’

기대하지도 않았던 결과에 기뻐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어느새 한낮으로 변한 방안에는 어린 남자아이와 젊은 여인이 서 있었다.

“왕세자, 그게 무슨 말이죠? 작년에 저 초상화를 새로 그리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저건 싫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러니까 엄한 시선으로 카미앙을 내려다보는 젊은 여인은 왕비였다.

“왕세자의 초상화는 삼 년마다 한 번씩 그리는 것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원래 자식에게 엄한 편인지 카미앙에게 매섭게 대하는 건진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카미앙의 투정 어린 부탁을 전혀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굳이 크로버의 초상화를 고집하는 왕비도 이상하긴 했다. 이미 카미앙을 왕세자로 세운 다음이었다. 버젓이 다른 왕세자가 있는데 죽은 아들의 초상화를 걸어야 한다고 주장하다니 말이다.

‘그렇다고 카미앙이 저지른 짓을 아는 건 아닐 텐데.’

“이번 한 번만 예외를 두면 되잖아요?”

“오늘따라 왜 이리 억지를 부리는 겝니까.”

“어머니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버지께 부탁할 거예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절 싫어하시지 않으니까요.”

말투는 점잖았지만 떼쓰는 내용을 여느 아이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제가 언제 왕세자를 싫어했습니까?”

“저도 다 알아요! 중요한 건 초상화를 삼 년에 한 번 그린다는 원칙이 아니라 그냥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거죠?”

“…왕세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저는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왕비는 아들의 심통에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다. 더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밖으로 나가버렸다.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카미앙이 혼자 중얼거렸다.

“저 초상화는 제가 아니라 형님인데…. 어머니도 그것까진 모르시는군요.”

뭐야? 이 초상화가 크로버인 걸 다른 사람은 모르는 거였어?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초상화를 확인했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크로버였다.

‘나도 아는 사실을 부모가 모를 리 없을 텐데….’

“어머니의 태도는 여전히 냉랭하시네. 진짜 자식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내가 본인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하시다니. 그것참 너무하지.”

카미앙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바람에 난 얼른 옆쪽으로 비켜섰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카미앙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이 환상과 닿는 건 왠지 찜찜했다.

초상화 앞에 선 카미앙이 크로버에게 말을 하듯 중얼대기 시작했다.

“형님, 그거 아십니까? 제가 드디어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어요. 왕세자가 되었단 말입니다. 반역을 일으킨 것도, 엄청난 공을 세운 것도 아닌데요. 게다가 더 좋은 게 뭔 줄 압니까? 아무도 형님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다시 생각해도 흐뭇하다는 듯 혼자 실실거리는 카미앙은 무섭기까지 했다.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 건가?

“형님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져 버렸어요. 이 세상에 존재했던 적이 없던 것처럼 말이죠. 형님을 그렇게 끔찍이 위하던 왕비도, 바렌시드의 왕이라는 아버지도 그 누구도 형님을 찾지 않아요. 하다못해 형님의 초상화를 보면서도 그게 저인 줄 안답니다.”

이제야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왕세자에게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던 이유. 왕비가 초상화를 새로 그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던 이유. 세상 누구도 크로버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크로버, 그럼 당신은….’

대체 크로버는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자신이 왕세자였다는걸 기억하고는 있는 걸까? 아니면 낙상의 여파로 기억이라도 잃은 걸까?

만족스럽다는 듯 크로버의 초상화를 바라보던 카미앙이 침대 옆 테이블에서 보석함처럼 생긴 물건을 꺼냈다. 왕세자의 보석함이라고 아래가 무색할 정도로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섞여 있는 틈에서 라암의 보물을 꺼내 들었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없었으면 이 자리는 결코 제 것이 될 수 없었겠지요. 이제 당신의 요구를 제가 들어드릴 차례입니다.”

라암의 보물을 세워둔 채 카미앙은 그 앞에다가 작은 주머니를 올려놓았다. 내 눈에는 꼭 조그마한 장승을 세워두고 제사라도 지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직 제가 어린 탓에 하잘것없지만…. 성인이 되면, 그리고 이 나라의 왕이 되면 더 많은 것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건 금화와 푸른색 보석이었다.

‘…저 녀석, 정말로 제사라도 지내는 거야? 음식이 아니라 돈과 보석을 올려두고?’

내가 알고 있는 제사와 다른 게 있다면 저쪽에 계신 라암인지 뭔지 하는 분은 정말 제사상을 받아간다는 점이었다. 금화와 보석이 놓인 곳에 자욱한 연기가 인다 싶더니만 사라져버렸다. 족히 오십 골드는 되지 않을까 싶은 재물이 연기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말씀하신 대로 다음번엔 더 큰 재물을 바치겠습니다.”

‘더 큰 재물을 바치겠다고? 그러다가 네 금고, 아니지 나라 금고까지 말아먹게….’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가짜 향수. 카미앙이 대체 왜 여기에 연루되었나 싶었는데 설마 비밀 자금이라도 마련하려고 했던 건가.’

라암이 재물을 요구한다는 걸 몰랐을 땐 대체 카미앙이 뭐가 아쉬워서 마룬시에와 손을 잡고 이런 일을 벌였나 했었다. 본인이 왕이 될 바렌시드에 해를 끼치면서까지 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카미앙이 라암을 이용한 건지 라암이 카미앙을 이용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라암의 보물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재물을 요구했을 거라는 것은 확실했다.

‘혹시 아나드 토벌도 라암에게 바칠 재물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나?’

모두가 반대하는 토벌을 무리해서 감행한 게 이상하긴 했다. 본인이 뛰어난 기사인 것도 아니고 전쟁 준비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 말이다.

‘제 형을 모두에게서 지워버릴 정도로 영악했으면서 라암이 점점 큰 걸 원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멍청한 녀석.’

라암의 보물을 손에 들고 있는 어린 카미앙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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