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81화 (81/95)

81.

“우와 여기는 정말 따듯하네요.”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카미앙의 침실 입성에 성공했다.

“자꾸 아나드 인 것처럼 말하지 마시오. 만찬장도 충분히 따뜻하지 않았소.”

카미앙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침구며 가구가 고급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일반적인 침실과 크게 다른 건 없었다.

‘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해야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거지?’

상태창을 열어 다시 한번 퀘스트를 확인했다.

이젠 저 땡땡땡 안에 들어갈 만한 행동이 뭔지 유추할 차례였다. 난 손가락으로 글자 수를 꼽으며 단어 수를 맞춰보았다.

‘앞에 세 글자는 역시 카미앙이겠지? 침실에서 할 만한 행동이…. 카미앙이 환복하기?’

그 생각을 하자마자 카미앙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도 잠옷으로 갈아입겠소?”

어느 틈에 잠옷으로 갈아입은 카미앙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대체 언제 갈아입은 거예요?”

“그대가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좋아요, 그대로 잠시만 있어 보세요.”

난 그저 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를 기다리다가 ‘카미앙이 환복하기’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뿐이었는데 가만히 서 있던 카미앙이 이상한 소리를 시작했다.

“…왜 내 잠옷 차림을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지? 혹시 음흉한 마음을 품고 내 침실로 들어온 건…. 아니겠지?

‘그럼 카미앙과 무언가를 같이 해야 하는 건가?’

난 은색과도 가까운 팔찌를 바라보았다. 스킬을 사용하면 좀 수월하려나 싶었지만 내 스킬 중 이 상황에 딱 적합한 것은 없었다. 게다가 언제 신성력을 충전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지? 정말로 수상하군 녹시아.”

스킬을 포기하고 다시 궁리를 해보았다. 카미앙의 헛소리엔 대꾸해줄 겨를이 없었다.

‘카미앙과 베개 싸움? 카미앙과 노래하기? 잠깐만 이렇게 하면 뭐든 가져다 붙일 수가 있잖아.’

아무래도 카미앙의 도움이 필요하지 싶었다.

“침실에선 주로 뭐 하세요?”

카미앙은 파자마 위에 두툼에 보이는 카디건을 걸치고는 그 단추를 잠그고 있던 참이었다.

“뭘 하냐니!!”

무척이나 무례한 질문이라는 듯 카미앙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걸 왜 물어보시오!”

아니 침실에서 뭘 하냐고 물은 게 그렇게 잘못한 일인가? 자꾸 성을 내는 것도 꼭 잠근 앞섶을 굳이 손으로 가리고 있는 것도 그렇고….

‘잠깐, 잠깐만. 설마 카미앙과 그걸….?!’

자칫하다간 또 뺨을 때릴 뻔했다. 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 게임은 ‘왕세자의 특별한 연애사’였지 ‘왕세자의 은밀한 연애사 19’가 아녔다.

‘그, 그럼 좀 순한 맛으로 카미앙과 같이 자기?’

마침 날 경계하던 카미앙과 눈이 마주쳤다.

‘그럴 리가…. 있나?’

“굉장히 수상한 표정 하며…. 역시 음흉한 생각으로 들어온 게 맞군.”

“음흉한 생각이라뇨. 그냥 술을 마셔서 그렇게 보이는 거 아닐까요?”

난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푹신하면서도 쫀득한 촉감이 전해져 왔다.

“뭘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그냥 가만히 잠만 잘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난 카미앙의 침대에 벌러덩 자빠졌다.

“그대 자리는 거기가 아니요! 저쪽에 있는 소파란 말이요!”

난 들리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감았다. 곧 카미앙이 구시렁거리며 베개를 챙겨가는 소리가 들렸다. 날 바닥으로 떨어뜨리지는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역시, 술 먹이길 잘했어. 인간이 덜 치사해지네.’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같이 잔다는 것의 의미가 어디까지인지 따져보았다. 한방에서 자는 거면 같이 자는 것으로 쳐주려나? 설마 꼭 침대에서 같이 자야지 성공은 아니겠지? 전연령판이니 이렇게 자고 일어나면 되는 거겠지?

‘만약에 이게 아니라면?’

‘카미앙과 같이 자기’가 답이 아니라면 난 이 소중한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 셈이 되는 거였다. 오늘 이런 추태를 부렸으니 카미앙이 날 제 침실로 다신 들이지 않을 게 뻔하고 말이다.

갑자기 초조해졌다. 가만 생각해보니 같이 자기는 맨 마지막에 실행해도 좋을 선택지였다.

‘이대로 잠들 순 없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날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는지 카미앙이 바로 반응을 보였다.

“이, 이번엔 또 무슨 일이오?”

“역시 이대로 잘 수는 없어서요.”

난 카미앙이 누운 소파로 다가갔다.

“어렸을 때 배게 싸움 같은 건 안 하셨나요?”

힌트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만한 것이라는데 착안한 물음이었다.

“누가 감히 왕세자와 싸움을 한단 말이오.”

“당연히 형…. 편이 안 되셨겠네요.”

하마터면 형하고 하지 않았냐고 물을 뻔했다.

“그리고 난 먼지 나는 거 싫어하고. 어렸을 때부터 깔끔했지.”

깨알 같은 자기 자랑은 가뿐히 무시해 주기로 했다. 시종이 몇 명이나 따라붙는 왕세자가 깔끔하지 않으면 바렌시드에 깔끔한 사람이 누가 있겠냔 말이다.

“그럼 불면증은 없으신가요?”

“불면증?”

“꼭 불면증이 있어서라기보단 잠을 잘 자기 위해 침실에서 했던 일이라든지….”

“그런 건 모르겠고 소파에서 잔 적이 없는 것만은 확실하군.”

생각해보니 그랬다. 과거의 일을 재현하는데 소파에 누워있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일이었다. 난 카미앙의 팔을 잡아당기며 억지로 일으켰다.

“그럼 편히 주무셔야죠. 어서 저 침대에 누우세요.”

“거긴 그대가….”

“왕세자님을 불편한 소파로 내쫓고 제가 어찌 편히 잘 수 있겠어요. 제가 여기서 잘 테니 어서요.”

날 물끄러미 쳐다보던 카미앙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있어야 할 곳을 이제야 깨달은 걸 보니 이제 술이 좀 깼나 보군. 잘 못 움직였다간 그대가 토라도 할 것 같아 내가 소파에 눕긴 했지만, 어찌나 불편하던지.”

카미앙은 참으로 카미앙다운 소리를 지껄이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난 이불을 덮어주는 척하면서 그대로 카미앙의 머리맡에 걸터앉았다.

“혹시 잘 때 안고 자는 인형 같은 건 없나요?”

“인형?”

“가져다드리려고요.”

“나이가 몇인데 인형 따위를 안고 자겠소.”

“그럼 어려서는 있었나요?”

“없었소.”

하긴 아나드 지역에서 야영했을 때도 카미앙의 인형 같은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자기 전에 읽던 동화책 같은 건요?”

“대체 그런 게 왜 궁금한 거요?”

이러다 짜증 난 카미앙이 날 내쫓아버리면 고생한 게 수포가 된다. 관심 있는 남자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궁금해하는 연인인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당신의 침실에 들어온 건 처음이잖아요. 들떴다고 해야 하나.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아졌어요. 어린 당신이 이곳에서 뭘 하면서 어떻게 지냈는지도 너무 궁금하고.”

방이 어두운 탓에 카미앙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에 묻어있던 짜증이 누그러진 걸 보면 작전이 통한듯했다.

“하긴, 왕족의 침실에 들어오는 건 모든 귀족에게 영광스러운 일이자 특혜이긴 하지. 그대가 평상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가는군.”

카미앙의 자기애가 다시 한번 나를 도와주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있다면….”

카미앙은 마치 자신이 원래부터 왕세자인 양 태연스레 입을 놀렸다.

거짓말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신을 진짜 왕세자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열심히 해명하는 중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수백, 수천, 아니 이 바렌시드의 사람들에게 제가 왕세자인 척 연기한 것을 생각하니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 국왕 전하나 이웃 국가들만 봐도 왕위 계승 문제로 경쟁이 치열한데 어쩜 우리 바렌시드에는 카미앙님 딱 한 분만 있는지. 정말 신께서 내려주신 왕세자인 것 같아요.”

양심에 찔리라고 한 소리였다.

“왕자는 나 한 명뿐이니…. 권력다툼으로 국력이 낭비되는 걸 막을 수 있으니 참으로 잘된 일 아니오? 귀족들 간에 괜한 파벌 싸움도 없고 말이오.”

이것 봐라. 카미앙은 입에 침 한번 바르지 않고 준비한 사람처럼 술술 대답했다.

‘뻔뻔스러운 놈.’

“그렇지만 귀족 영애로선 좀 안타깝기도 하네요. 당신을 닮은 형이나 동생이 있었다면 정말 잘생겼을 텐데.”

난 형이란 단어를 강조하며 슬쩍 말을 흘려보았다.

“내가 잘생겼다고 해서 꼭 형제가 잘생기라는 법이 어디 있소? …혹 내가 그대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형이나 동생이 있었으면 나 대신 그쪽이라도 어떻게 해볼 수 있었을 텐데…. 뭐 이런 생각을 한 거요?”

이야, 카미앙은 왕세자라고 해서 어린 시절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했지만 아니다. 분명 남다른 창의력을 발휘하는 그런 수업이 있던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참신한 발상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내 마음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으니 그대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소.”

일말의 가책이라도 느끼지 않을까 해서 꺼낸 말이었는데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

“그나저나 좀처럼 잠이 오시지 않는 모양이네요. 자장가라도 불러줄까요? 전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자장가를 불러주셨거든요.”

어쩌면 퀘스트의 정답이 ‘카미앙을 재워주기’일지도 모른다는 걸 염두에 둔 말이었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날 보살펴 주겠다 뭐 이런 의미요?”

카미앙이 피식 웃었다. 아까부터 기분 나쁘게 왜 자꾸 피식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파르미엔 백작 부인의 자장가를 내 침실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군.”

‘파르미엔 백작 부인이 아니라 이시아 엄마표 K 자장가다.’

술기운에 인내심이 떨어진 건지 카미앙의 헛소리를 더는 듣기가 힘들었다. 난 급히 자장가를 읊조렸다. 엄마는 내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노래를 불렀지만, 당연히 그런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카미앙의 털끝 한 가닥과도 닿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게 정답이라면 퀘스트를 달성했는지는 언제 알 수 있는 거지? 카미앙이 잠들고 나서?’

시스템 메시지를 기다리며 두 번째 곡을 부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이 노래만 들으면 바로 잤다고 하는데 얘는 왜 이리 반응이 없어.’

잠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카미앙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그의 얼굴이 내 허벅지에 닿았다. 주인공은 주인공이라는 건지 때마침 창문으로 달빛이 비껴들어 왔다. 창백한 달빛이 잘난 얼굴 위로 내려앉은 그것만으로도 그럴싸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녹시아, 진짜로 날 유혹하는 거요?”

내 노래를 멈추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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