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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80화 (80/95)

80

“그래도 계획은 성공했다. 신의 사자가 라암의 존재를 깨달았어. 라암의 보물과 봉인석이 공명하는 걸 내가 똑똑히 느꼈으니 말이다. 잠깐만, 넌 지금 어딜가는 게냐?”

노인이 크로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크로버는 당장이라도 떠날 듯한 기세였다.

“루안을 그대로 둘 순 없습니다. 빨리 손을 써야죠.”

“그것뿐이냐?”

“…녹시아 님 근처로 가 볼 생각입니다. 제가 도와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신의 사자가 겪어야 할 시련이 아직 남아있는 건 알고 있지?”

크로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는 네가 도와줬지만, 나머지 두 개는 자신의 힘으로 풀어가야 할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냐, 이놈아.”

노인이 크로버의 귀를 잡아당기며 여관으로 이끌었다.

“놔주십시오. 녹시아 님은 몰라도 루안은 정말 제가 도와줘야 합니다.”

“지금 네 꼴로 갔다간 왕궁은커녕 신전에서도 쫓겨날 게다.”

“그럼요?”

***

결국 대신관의 잔소리에 못 이긴 크로버는 몸단장을 하고 왕궁 앞에 서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신관은 대신관이었다. 그의 말대로 몸단장을 하고 나온 건 퍽 잘한 일이었다. 모리아리티 백작인 체하며 왕궁의 정문을 통과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비록 지난번에 들어올 때와 외관은 달랐지만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야 그런 것까지 알 리 없었다.

크로버가 만나려는 사람은 베르만이었다. 후작 저로 먼저 찾아갔지만 며칠째 퇴근을 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궁으로 온 것이었다.

‘절대 녹시아 님을 쫓아온 게 아니라 이거지.’

왕궁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아니 왕궁이 보이는 순간부터 이 안에 있을 녹시아가 떠올랐다. 크로버는 애써 그녀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 했다.

‘그녀 스스로 시련을 헤쳐나가야 할 것이야. 방해 말아라.’

대신관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을 다독였다.

‘바렌시드 제일의 기사 녹시아 님이시다. 위험에 빠질 일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베르만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려 하는 데 문득 안쪽에서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왕세자님께선 너무 소홀하시단 말이지.”

“언제 왕세자님이 열심히 일하신 적 있었나? 예산이니 정책이니 하는 건 원래 다 실무자들이 알아서 하는 거라고.”

“그래도 정도가 있지! 대체 내가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지 알고 있나?”

아무래도 카미앙이 제 할 일을 신하들에게 떠넘긴 모양이었다. 밤늦도록 일터를 떠나지 못한 자들의 원성이 베르만의 집무실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상관이 베르만인데, 잘도 불평해대는군.’

아니면 혹시 여기 베르만이 없는 건가 싶어 크로버는 살짝 걱정되었다. 문을 두드리자 순식간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들어오시죠.”

그러나 그의 우려와는 다르게 잠시 후 베르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바르하르트 소후작님.”

뭔가 이상했다. 분명 서너 명이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렸는데 방 안에 있는 건 베르만뿐이었다.

“혼자… 계셨습니까?”

“큼큼, 그렇습니다. 이 밤에 모리아리티 백작께선 어쩐 일이십니까?”

베르만은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둘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데.”

크로버는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책상, 의자, 서랍장, 책장. 사람이 숨어 있을 곳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크로버가 왔다고 해서 사무관들이 굳이 모습을 감출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혼자 중얼거리고 있던 건가? 생각보다 재밌는 구석이 있군.’

“뭘 그리 두리번거리십니까? 어서 용건이나 말씀하시죠.”

모리아리티 백작을 이용해 녹시아를 카미앙에게서 떼어내겠다는 작전 이후 첫 만남이었다. 합동 작전이 실패해서인지 베르만의 태도는 까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미 베르만의 일인극을 감상한 크로버는 그 태도가 그저 재미날 뿐이었다.

“공익을 위해 소후작께 제보를 할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제보라뇨?”

“최근 가짜 향수 사건을 조사 중이시죠?”

그제야 베르만이 관심을 보이며 펜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르트 신문사에서 인터뷰했던 청년 기억하십니까?”

“물론입니다. 후에 재판이 열리면 중요한 증인이 될 수 있는 자인데 종적을 알 수가 없더군요.”

“가짜 향수의 배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을 텐데 그 청년 혼자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몸을 사릴 수밖에 없지요.”

베르만도 이해는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 청년이 지금 이 성안에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이 성의 감옥에 갇혀있단 말입니다.”

“어째서죠? 설마 가짜 향수의 배후에게 잡혀갈 것이 염려되어 자진에서 감옥으로 들어오기라도 했다는 말씀입니까?”

베르만다운 발언이었다. 순식간에 그럴싸한 계략을 꾸며냈다.

“들어보니 소후작님의 방법도 나쁘진 않군요. 이 나라의 왕세자가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면 말이죠.”

“말에 뼈가 있군요. 꼭 왕세자님을 믿을 수 없다는 소리로 들립니다만.”

“그 청년을 잡아 온 장본인이 바로 왕세자님이라면요?”

“왕세자님께서 왜…?”

“소후작님께서 믿기 싫은 사실을 인정하신다면 쉽게 답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돌아서는 크로버에게 베르만이 물었다.

“이걸 왜 내게 알려준 거요?”

“소후작께선 그 청년을 지켜주실만한 힘이 있으시니까요.”

“그래서 당신이 얻는 건 뭐요?”

크로버가 뒤를 돌아보며 미소지었다. 순간 베르만은 그 미소가 섬뜩하리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모리아리티 백작의 눈동자가 붉은색이었던가?’

그제야 모자 밑으로 살짝 빠져나온 백금발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의 외모를 눈여겨보는 습관 따위는 없었지만, 백작의 머리색이 어두웠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전 그저 왕세자님의 진실이 밝혀지길 바랄 뿐입니다.”

“당신, 정말 모리아리티 백작인가?’

“지금은 제가 누구 인지보단 향수 사건의 증인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요?”

베르만은 집무실을 걸어 나가는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이 정도면 베르만한텐 충분히 힌트를 준 것 같고….’

카미앙이 바이난 공국과 결탁해 가짜 향수로 돈을 벌려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바르하르트 후작은 크게 진노할 터였다.

베르만이 제아무리 카미앙에게 충성심이 강하다 해도 후작에게 반기를 들면서 이 일을 두둔하진 못할 것이다. 루티시나는 카미앙에게 크게 창피를 당했다 생각하고 있으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마르 공작에게도 서신을 넣어두었으니.’

쇼하트 자작의 아버지인 하마르 공작은 애초부터 카미앙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아나드 토벌전을 반대했으며 국왕의 권력 중 일부를 미리 카미앙에게 위임하는 것 또한 반대했었다.

하마르 공작가는 바르하르트 가문과 함께 바렌시드에서 가장 막강한 가문이었다. 라암이 봉인되고 진실이 드러나면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 카미앙의 처벌을 외칠 터였다.

“파르미엔 영애랑? 정말?”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크로버의 귓속을 파고드는 이름이 있었다.

“그렇다니까. 두 분이 식사를 마치시고 침실로 가시는 걸 봤다고.”

‘침실?!’

“어머 어머. 웬일이니.”

하마터면 지나가는 하녀를 붙잡고 대체 무슨 소리냐 따져 물을 뻔했다. 크로버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하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왕세자님께서 침실에 여자를 들이는 건 처음이지 않아?”

“그렇지. 즐겨도 밖에서 즐기지 침실까지 여자를 끌고 들어오는 일은 없었지.”

“그럼 그 시골뜨기 영애가 정말 왕세자빈이 되는 건가?”

“두고 봐야 할 일이지. 아무튼, 왕세자님이 그런 취향이신진 몰랐어.”

더는 엿들을 것도 없이 확실했다. 녹시아가 카미앙의 침실에 들어간 것이다.

‘대체 왜! 녹시아라면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야비하고 치사한 카미앙이 루안을 인질로 녹시아를 협박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크로버가 아는 녹시아라면 그런 제안 따위는 비웃으며 제힘으로 루안을 구하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잠깐만, 같이 식사를 했다고 했지….’

역시 독밖에는 없었다. 그 간악한 카미앙이 사악한 마룬시에에게 받은 수면제 따위를 녹시아의 음식에 넣었을 것이다. 녹시아가 제아무리 강인한 기사라고 해도 약물에 면역력이 있을 리 없었다.

‘그, 그 파렴치한 녀석이.’

갑자기 입 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크로버는 귀족들의 집무실이 있는 복도를 뱅뱅 돌았다.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신의 사자는 그만이 겪어야 하는 시련이 있는 법이야.’

대신관의 당부가 떠올랐다. 그의 말을 되뇌어봤으나 이번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녹시아 님이 정신을 잃은 틈에 녀석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런저런 안 좋은 상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나머지 곧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크로버는 방향을 바꿔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왕세자의 침실이 보이는 곳으로 뛰어갔다.

‘나 때문에. 당신이….’

죄책감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라암의 희생자인 크로버는 라암에 관련된 일에 대해선 절대로 먼저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세계가 카미앙과 라암의 계약 때문에 이야기 속에 갇혀 버렸다는 거국적인 이야기는 당연히 말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도, 녹시아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이 모든 일의 배후는 결국 라암이었으니 말이다.

‘이제는 모든 걸 다 이야기해 줄 수 있는데.’

그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 녹시아가 스스로 라암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 크로버는 이 모든 일을 꾸몄다. 나중에 알게 된다면 분명 녹시아는 크게 화를 내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카미앙과 녹시아를 자신이 라암의 희생자가 되었던 장소로 불러내고는 언덕 위에서 떨어졌다. 이전과 똑같이 말이다.

‘다행히, 다행히 아직 불이 켜져 있어.’

왕세자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불이 켜져 있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역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크로버는 건물 외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건물에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해 조각한 타일, 일 층의 창문턱, 윗부분이 살짝 깨진 타일…. 왕세자였던 시절, 크로버가 침실에서 빠져나올 때 디딤판이 되어줬던 것들이었다.

그때보다 몇 배는 커진 몸집으로도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해보면 알 일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디딤돌부터 문제였다. 신발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거길 잘 넘겼다 싶으면 그다음에서 도로 떨어져 버렸다.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왕세자 방의 불이 꺼져있었다.

‘녹시아!’

어디서 이런 운동신경이 튀어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크로버는 첫 번째 디딤돌에서 바로 위로 솟구쳐 왕세자 방 테라스의 난간을 움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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