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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79화 (79/95)
  • 79.

    그러고 보니 진짜 녹시아는 단 한 번도 술을 마셨던 적이 없었다.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도 혹독한 날씨에 견디기 위해 병사들이 독한 술을 홀짝거릴 때도. 그녀만큼은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설마 녹시아…. 술 잘 못 마시나?’

    뭐든 잘 먹고 소화를 잘 시키는 몸이었기에 술에 약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질 않았다. 알콜이 들어가면 들어가는 대로 다 소화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도 한가지…. 딱! 한 가지만은 말할게요. 신문 기사를 보셨겠지만 그건 전부 바넨띠드를 위한 일이었어요. 마눈띠에 아니, 마눈시에…. 아무튼 바이난 공국의 공녀가 그 길드의 수장이라는 거 알고 계세요?”

    바렌시드랑 마룬시에의 발음이 이렇게 어려웠던가. 다행인 건 비록 혀는 꼬일지언정 말은 똑바로 했다는 것이었다. 진짜로 취해버렸다간 이 작전은 끝이었다.

    ‘녹시아는 어떨지 몰라도, 이시아의 주량이라면 이 정도는 끄떡없다 이거지.’

    직장 생활 어언 오 년. 그동안 회식으로 다져진 알코올 저항성이 빛을 발할 때가 왔다.

    “한번 조사해 보는 게 쪼을 꺼에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요!”

    내 옆에 있는 와인병을 가져간 카미앙이 남은 와인 한 방울까지 다 제 잔에 따랐다.

    “가짜 향수나 공국의 공녀에게는 관심 끄고 크로버 그놈이나 걱정하시오! 내 벌써 신전으로 사람을 보냈으니 곧 녀석의 정체가 세상에 낱낱이 까발려질 거요.”

    크로버를 잡아 온다고? 갑자기 심장이 쿵쿵거렸다. 아니지, 크로버가 그렇게 순순히 잡힐 리 없었다. 멍청이처럼 신전으로 돌아왔을 리 없었다.

    ‘신전이 아니면 어디로 갔을까?’

    크로버를 믿자. 지금 그를 걱정해 봤자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난 지금 내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

    평소였으면 고개를 흔들거나 하며 다른 생각을 털어버렸을 텐데 취기가 오른 탓인지 손이 올라갔다.

    “짝!”

    내 손이 내 뺨을 때렸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말이다. 이건 녹시아가 야간 보초를 서다가 졸리면 사용하는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물론 튜토리얼이 끝난 이후로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나도 놀랐는데 카미앙이라고 놀라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 그 게 무슨 짓이요?”

    “자꾸 날 무시하니까 화가 나는데 당신을 때릴 쑨 업쓰니까 대신 날 때린 것 뿌니에요. 어떻게…. 감히! 제가! 지엄하신! 왕세자에게 손을 대겠어요?”

    카미앙이 날 가만히 쳐다보더니 결론을 내렸다.

    “좀 취한 거 아니오?”

    “취하다니요? 제가요?”

    “얼굴도 좀 붉어진 것 같고. 때린 뺨 말고 반대쪽 말이요. 목소리도 커지고.”

    “무쓴 소리에요! 술이 맛있어서 쫌 먹었따고 지금 쑬취한 사람 취급하는 거예요?”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지금 혀도 꼬였소.”

    “혀가 꼬였따니…. 제가 혀딻은 소리라도 한다는 건가요?”

    카미앙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당신은 이런 여자였지. 본인이 아프면 아팠지 날 절대로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술에 취해서도 그것만큼은 잊지 않겠다는 그 결의 하며….”

    눈이 번쩍 떠질 정도로 엄청난 헛소리였다. 동시에 시야가 밝아질 정도로 반가운 착각이기도 했다. 취하진 않았어도 카미앙 역시 술기운이 도는 모양이었다.

    “남은 대화는 내일로 미루고 일단은 쉬는 게 좋겠소.”

    “…뭐, 좋아요.”

    난 순순히 카미앙을 따라 일어섰다.

    “시종에게 침실로 안내를 하라 하겠소.”

    “그냥 왕세자님을 따라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내가 직접 안내를 해주길 바라오?”

    “어차피 가는 길인데…. 그냥 따라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대체 어딜 자꾸 따라온다는 거요?”

    퀘스트 달성 장소에 입성하느냐 못하느냐가 판가름 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바렌시드에 정말 신이 있다면 부디 제게 힘을 주세요!’

    <1.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귀여움을 전부 끌어모으며) 당연히 왕세자님 침실이죠.>

    <2. (봉인해 두었던 섹시함을 발산하며) 아시면서, 왕세자님 침실이 아니면 어디겠어요?>

    와우, 바렌시드의 신께서 이번 스킬에 힘이라도 실어준 모양이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선택지가 떴다.

    ‘섹시함을 발산? 카미앙 앞에서?’

    맨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두 번째는 도저히 실행할 수 없었다. 아니, 하기 싫었다.

    “당연히 왕세자님 텐트죠.”

    귀여웠을까? 장화 신은 고양이 짤을 떠올리며 한껏 힘을 내보긴 했는데….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뭐지 이 적막은…. 실패인가….’

    곧이어 카미앙의 기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요. 그대가 왜 내 침실에 따라온다는 거지?”

    “잘 때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내 침실에 온단 말이오? 이 왕궁에 방이 몇 갠데!”

    실패 맞지? 난 급히 취해서 정신 못 차리는 쪽으로 노선을 바꿨다.

    “방이라뇨. 이 광활한 들판에 방이 어딨어요.”

    “이거 보기보다 더 취했군.”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카미앙은 종을 흔들어 시종을 불렀다.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사람이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여기 파르미엔 영애를….”

    “앗, 적군!”

    번개처럼 빠르게! 난 시종의 목덜미를 팍, 내리쳤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한 방에 사람을 기절시키는 기술, 그걸 녹시아도 사용할 줄 알았다.

    “녹시아! 이게 무슨 짓이요!”

    카미앙이 제 앞에 쓰러진 시종을 바로 눕혔다.

    “적군을 무찔렀습니다!”

    난 경례까지 해 보이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거나하게 취해 주정 부리는 퇴역 군인이었다.

    “술버릇이 이렇게 고약한 줄 알았으면 와인을 못 먹게 하는 건데….”

    “남은 적군을 소탕하고 오겠습니다!”

    씩씩한 외침과 함께 만찬장의 문을 열고 나가는 날 카미앙이 잡아끌었다.

    “아니요, 아니요. 녹시아, 내 텐트로 같이 갑시다. 따라오시오.”

    ***

    크로버는 안쪽 호주머니를 더듬었다.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도 바람의 가호 덕분에 멀쩡했지만, 검에 베인 상처는 남아있었다.

    그는 이럴 때를 대비해 챙겨온 치유의 물약을 왼쪽 허리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상흔 위에 뿌렸다. 무언가가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일었다.

    크로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곧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신성력을 소모하는 방식은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만큼 효과도 빨랐다.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우습게도 작전의 성공 여부가 아니었다.

    ‘녹시아 님은 화가 났을까? 아니면 날 걱정하고 있을까?’’

    이제 녹시아는 크로버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을 터였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해도 크로버는 그동안 녹시아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

    ‘날 원망할 수도 있겠지. 아니면 정의로운 분이니 불쌍하다 여길지도.’

    어느 쪽이든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녹시아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크로버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멈춰라. 네 놈을 체포하라는 왕세자님의 명이다.”

    여관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크로버를 막은 건 왕실 근위대였다. 마음은 급하고 갈 길은 멀었다. 온유한 신관이라 자부하는 크로버도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그들은 크로버를 얕보는 것인지, 무기를 사용할 필요도 없다는 듯 칼을 검집에 꽂아둔 채 크로버를 제압하려 들었다.

    “이것 참, 신관이라고 얕보는 건가. 아님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크로버는 여유로운 얼굴로 웃으며 가뿐하게 근위대를 피했다.

    어차피 녹시아도 없으니, 굳이 약한 척 연기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녹시아 한정이었으니까.

    그는 오른발을 내밀며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병사의 가슴팍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몸을 돌리며 순식간에 상대를 바닥에 꽂아버렸다.

    “보아하니 지금은 녹시아 님이 절 구하러 올 것 같지도 않고…. 어쩔 수 없군요.”

    녹시아는 이전에 왔던 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동안 크로버의 좋은 무기가 되어준 외모가 그녀에겐 통하지 않았다. 기도를 핑계로 손을 잡아보기도 했지만 잠시 동요했을 뿐 효과는 미미했다.

    크로버는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정의감에 호소하며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향료 길드에 납치당한 건 알고 보면 그가 납치당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쟁 영웅이었던 기사답게 그제야 녹시아는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직접 그를 구하고자 적진에 뛰어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 이후에도 이런 접근은 녹시아를 움직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물론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매번 녹시아에게 일을 떠넘기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관계에서는 녹시아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줄 기회가 영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도 크로버를 남자로 느끼기보다는 ‘첫 번째 동료, 예지의 신관’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크로버는 쓰러진 자의 검을 빼내 상황 판단조차 못 하는 나머지 한 명을 향해 휘둘렀다.

    “억지로 움직이지 말고 그냥 여기서 쉬시죠? 왕세자의 명령을 따라봤자 당신들에게 별 이득도 없잖습니까?”

    크로버는 피 묻은 칼을 수풀 속으로 던지고는 다시 여관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여관에도, 그 근처에도 녹시아는 없었다.

    “녹시아 님? 녹시아 님?”

    대답을 기대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날 찾아 내려오진 않아도 여기서 기다리는 것 정도는 해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때, 여관에서 나온 한 노인이 축 늘어진 크로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 안다는 듯 크로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역사적인 일이 벌어질 텐데, 신전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느냐.”

    “사람들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것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남루한 늙은이 차림으로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지. 녹시아가 왕세자랑 떠날 때까지 말이다.”

    “왕세자랑 떠나다니요? 지금 녹시아가 왕세자를 따라갔다는 말씀입니까?”

    노인은 크로버의 얼굴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왕세자로서 받은 교육 때문인지 그날의 충격 때문인지 크로버는 어린 나이에도 감정을 숨길 줄 알았다. 그랬던 녀석이 요즘 들어 표정을 읽기 쉬워졌다. 정확히는 녹시아의 이름이 나오면 무방비해졌다.

    이건 지난 여덟 번의 과거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청년이 왕세자의 병사들에게 잡혀버렸다.”

    “루안이요? 분명 먼저 이곳에서 내보낸 다음에 제가 놈들을 유인했는데.”

    “눈치가 빨랐지. 네가 가짜라는 걸 알아챘는지 진짜 루안을 쫓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녹시아가 왜 이곳에 없는지, 그리고 무슨 이유로 왕세자를 따라갔는지도 어렴풋이 알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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