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혹시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상태창을 닫았다 다시 열어 보았다.
카미앙의 침실만 해도 환장할 노릇인데 저 앞에 땡땡땡은 대체 뭐란 말인가. 게다가 저 다양한 조사는 또 뭐냐고.
‘힌트를 줄 거면 확실하게 줄 것이지! 지금 저 땡땡땡에 들어갈 말을 맞추기라도 해보라는 거야?’
계절이 바뀌는 동안 함께 했으니 이제 좀 손발이 맞나 싶었는데. 처음 생각이 날 정도로 사람 열받게 하는 시스템이었다.
완료된 과업에 비추어 볼 때 카미앙의 침실에서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는 행동을 하면 과거가 재현된다는 뜻이었다. 이해는 했는데 이해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니 문제였다.
다시 한번 시스템을 향해 욕을 하려던 순간 크로버가 절벽에서 떨어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과업 달성을 위해선 아니었겠지만, 계획한 바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은 크로버였다. 덕분에 첫 번째 과업을 달성했는데 여기서 징징거릴 순 없었다.
나는 앞서 걷고 있는 카미앙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차에서보다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그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배고프지 않아요? 저녁 시간이 다 된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나도 허기가 지는군. 함께 식사하겠소?”
카미앙이 자신의 옷깃을 잡은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당신과 나, 둘만의 식사인가요?”
“그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우리 못다 한 이야기가 있잖아요?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하면 좋겠는데.”
“어렵지 않은 일이지.”
카미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던 대답이었다.
***
“그대는 이쪽에 앉으시오.”
카미앙이 의자를 빼내 주었다.
“식사는 한 번에 가져오라 했소. 이제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요.”
“참 잘됐네요.”
난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이 상황이 그렇게 잘된 상황은 아니었다.
“왕족의 만찬장이요. 그대가 원했던 장소지.”
긴 대리석 테이블은 촛대와 꽃으로 꾸며져 있었다. 예식장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장식이었지만 과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보다 곱절은 화려한 식기에 눈이 뷔페를 털어온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음식이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참 좋네요.”
나는 입꼬리만을 올리며 전혀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안될 줄 알았잖아? 한 번에 입성하길 바랐다니. 도둑놈 심보지.’
둘만의 은밀한 식사 시간. 이 말을 들은 카미앙이 시종들에게 자신의 침실로 음식을 가져오라 하는 건 아닐까 기대했었다. 귀족이야 제 방에서 식사를 하는 건 흔한 일이니 말이다.
“요리가 그대의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군.”
너무 큰 기대였나보다. 두 번째 작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열심히 먹어둬야지.’
일단 눈 앞에 펼쳐진 산해진미를 즐겨보기로 했다. 카미앙이 사람을 물린 덕에 요리사의 설명을 듣지는 못했지만, 최상급 소고기가 아닐까 싶은 스테이크가 메인 디쉬로 올라와 있었다.
쓱 쓱. 칼질하는 느낌조차 내가 알던 스테이크와는 달랐다.
“역시 왕실 요리사네요. 똑같은 고기인데도 이렇게 맛있다니.”
“앞으론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거요.”
감자를 무언가와 섞어서 꽃모양으로 만들어낸 이것도 맛있고 양송이 크림수프인 것 같은 요것도 맛있었다. 심지어 그냥 풀때기를 구운 것처럼 보이는 저것도 천상의 맛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요리를 음미하다가 난 와인잔에 손을 뻗었다.
“이 와인은 뭐죠? 달달하면서도 끝맛은 상큼한 게 맘에 드네요.”
오늘의 작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녀석이었다. 입에 맞지 않아도 억지로 마셔야 할 판이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녀석이 준비되었다니, 아무래도 오늘 운은 여기에 다 썼나 보다.
“바이난 공국의 특산품이요. 그대가 원한다면 더 사오도록 하지.”
나이프와 포크를 몇 번 더 움직였을 때였다. 이 정도면 오래 기다렸다는 듯 카미앙이 와인잔을 탁 내려놓았다.
“어느 정도 허기가 가셨소?”
“허기가 가신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카미앙이 궁금한 건 내가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는지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말해보는 게 어떻겠소?”
“아아, 그렇죠. 라암의 전언.”
난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다는 듯 와인을 한 모금 털어 넣었다. 그리고는 카미앙 뒤쪽에 놓인 조각상을 응시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아련한 표정을 지어보고자 했다.
“당신이 바렌시드로 도착한 날 밤이었어요. 그러니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엄청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당신은 이게 뭔지 알죠?”
라암의 목소리 따위가 어떤지는 알지 못했다. 대충 두루뭉술하게 둘러대자 다행히도 카미앙은 그런 것 따윈 아무 생각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론은 집어치우고 본론이나 꺼내라고 재촉하는 게 분명했다.
“그 목소리가 전 당신과 사랑에 빠지게 될 거라 했어요. 그리고….”
“그리고?”
“당신을 따라 함께 바렌시드로 가 당신 곁에서 평생을 함께하게 될 거라고 했어요. 처음엔 내가 꿈을 꾼 건가, 환청을 들은 건가 싶어 믿지 않았지만 정말로 당신이 내게 고백을 해왔죠. 수도엔 저보다 훨씬 아름답고 좋은 가문의 영애가 많았을 텐데 말이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 않겠어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카미앙을 보니 기가 찼지만, 아직 해야 할 말이 남아있었다.
“그때 생각했죠. 아, 내가 들었던 게 환청이 아니구나. 정말 내 미래를 점지한 소리였구나. 내 미래에는 왕세자님이 함께 하겠구나. 문제는 바렌시드에 오고 나서부터였어요.”
난 빈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맞은 편에 있는 와인병을 들어 내 잔에 시원하게 들이부었다. 와인이 맛있는 건 사실이었고 목이 마르기도 했기 때문에 술술 잘도 넘어갔다.
“문제라니?”
“뭐가 문제였을지 한번 생각해보시겠어요?”
이게 단번에 대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문제였나보다. 내가 와인을 몇 모금 홀짝거리는 동안 고민하던 카미앙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내가 본인의 기대만큼 사랑해 주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한낱 필부도 아닌 왕세자가 어찌 한 여인에게만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겠소. 그런 면에서는 그대가 인내심이 부족했소.”
핑계 없는 무덤 없다더니…. 정말 저 카미앙이 후회하는 날이 오긴 오는 건가 하는 회의감마저 들 때였다.
“설마.”
뭔가 알겠다는 듯 카미앙이 무릎을 쳤다.
“그래서 예지의 신관을 찾아간 거요? 어디선가 예지의 신관이 남녀 관계에 도움을 준다는 이야기라도 듣고?”
참으로 적절한 오해였다. 이용하기에 딱 좋은.
“맞아요. 예지의 신관님께선 제게 아주 유용한 조언을 주셨죠.”
“이제 알겠소. 대 축일 행사 때 신전에서, 바렌시드 극장에서, 사냥제에서…. 내가 가는 곳마다 그대가 나타났던 이유. 전부 예지의 신관이 알려준 거였어.”
그때마다 나타나 카미앙이 다른 공략 캐릭터를 만날 기회를 하나씩 지워버린 거였지만. 그런 사실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난 그의 말이 전부 맞다는 듯한 눈짓을 해 보였다.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죠. 뭐 덕분에 당신을 도울 수는 있었지만요. 하지만 모리아리티 백작님이 알려준 질투심 유발 작전만큼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그때부터 당신이 날 다르게 보기 시작했으니까요.”
파티에서의 일이 생각났는지 카미앙의 얼굴이 일순간 구겨졌다.
“모리아리티 백작과의 일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만…. 그럼 호수에서의 일과 내가 준 목걸이를 거절한 것도 다 작전이었단 말이오?”
“그건….”
난 괜히 식탁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렇다고 퉁쳐버리면 편하겠지만 그러기엔 내가 모질게 쏘아붙인 말들이 있었다. 게다가 좀 전만 해도 카미앙에게 검을 겨누지 않았던가.
“좋아요. 솔직히 말하죠. 그러다 보니 점점 모리아리티 백작에게 마음이 갔어요. 왕세자님보다 훨씬 더 다정했고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갑자기 카미앙이 제 앞에 놓인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왕세자의 품위 따위는 잊어버린 듯 술을 들이켰다. 난 이때다 싶어 카미앙의 잔을 채웠다.
“녹시아, 그대는…. 그대는 정말이지 남자 볼 줄 모르는군. 여자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같이 있을 땐 간이든 쓸개든 다 빼줄 것처럼 굴고. 그게 바람둥이들의 속성이오.”
‘?? 얼씨구?’
“게다가 그 백작, 아니지 백작도 뭣도 아니지.”
카미앙은 날 빤히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놈이 진짜 모리아리티 백작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 나만 속인 거요 아니면 당신까지 속인 거요?”
“…처음엔 저도 몰랐어요.”
“내 이럴 줄 알았지. 그것 보시오. 신관 주제에 외국의 백작이라고 속이고 감히 왕세자의 약혼녀를 꾀어내다니. 예지의 신관 자리는 어떻게 꿰찬 것인지 신관의 인사 체계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야겠군.”
혼자 중얼거리던 크로버가 혀를 끌끌 차며 날 나무랐다.
“제대로 된 신분도 없는 수상한 놈이요. 그런 놈한테 놀아나다니….”
난 다시 한번 술병에 손을 가져갔다. 크로버가 제대로 된 신분도 없는 바람둥이는 절대 아니었지만, 그의 진짜 정체를 모르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난 결단코 크로버에게 놀아난 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거로 치자면…. 그쪽이 먼저 자꾸 신호를 보낸 거 맞잖아? 난 거절했으면 거절했지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고. 오늘 일만 해도….’
그래, 사전에 아무런 설명 없이 이렇게 된 건 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결국 퀘스트 달성에 필요한 일이었다. 크로버가 하는 일은 처음엔 엉뚱해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다 내게 도움이 됐다.
‘그럼 된 거 아니냐고!’
열이 받아서인지 알콜의 효과인지 머리가 달아올랐다.
“아무튼, 당신이 그렇게 함부로 말할 사람은 아니라 이거에요.”
분명 머릿속으로 한 생각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입 밖으로 소리가 튀어 나가고 말았다.
“함부로 말할 사람이 아니라니! 녀석에게 그렇게 이용당하고 그게 할 소리요?”
기가 차다는 듯 카미앙이 다시 자신의 잔을 비웠다.
“쇼하트의 향수 공장에 마룬시에로 변장을 하고 들어간 건 왜였소? 그것도 예지의 신관 조언이었소? 아니지, 이건 뭐 물을 필요도 없겠군. 향수 공장에서 사람들에게 독이 되는 가짜 향수를 만들고 있으니 물리쳐야 한다는 말이라도 들은 거요?”
“쇼하트의 향수 공장에서 루안이 도망치는 걸 도와준 건 맞지만 변장은 모르는 일이에요. 예지의 신관님 조언도 아니었고요.”
“그럼?”
“귀족들이 왕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바넨띠드…. 아니 바렌… 시드의! 안이, 아니…. 안위! 를 걱정하는 귀족들도 많다는걸 아라…. 줬음 좋겠네요.”
바르하르트 후작가를 염두에 둔 대답이었다. 사실 바르하르트 가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루티시나가 마룬시에에게 적의를 불태우는 참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후작가의 덕을 보겠는가.
근데 이거 왜 이렇게 말이 꼬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