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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77화 (77/95)
  • 77.

    시가지를 지나는 통에 마차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차의 문을 누군가가 쿵쿵 두드렸다. 내게 기회가 온 건가 싶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건 카미앙의 수하였다.

    “죄송합니다! 아무도 찾지 못했습니다!”

    병사는 덜컹거리는 마차 소리에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크게 소리쳤다. 창문을 닫은 카미앙이 날 쳐다보았다.

    “들었소? 아무도 찾지 못했다니, 만족스럽겠군.”

    당연한 말이었다. 이제야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쉴 수가 있었다.

    「만일 녀석이 도망갔다 해도 상관없어. 녹시아가 여기 있으니 녀석은 반드시 이쪽으로 오겠지. 이제 덫을 놓기만 하면 된다.」

    마차에 함께 탔을 때부터 그의 생각을 읽기 위해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카미앙이 무척이나 전략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나드 전투에서 전략을 세우던 건 크람 남작과 나였는데. 이제 보니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하기 싫어서 뒷전에 물러나 있던 게 아닌가 싶었다.

    “크로버와 모리아리티 백작, 그리고 예지의 신관까지. 모두 한 사람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모르는 척하겠다는 건가. 그럼 나 혼자 떠들어 보지.”

    카미앙은 창밖을 바라보며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혼자 떠들겠다고는 했지만 누가 봐도 나더러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단 말이지…. 크로버가 예지의 신관이었다면 그는 왜 오늘 나에게 저곳으로 가라고 알려 줬을까?”

    ‘뭐? 크로버가 예언을? 말도 안 돼. 예고장을 던지는 괴도도 아니고 크로버가 왜 카미앙에게 그런 걸 알려준 거지?’

    혹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생각을 들여다보았지만 이건 진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이것만 아니라면 예지의 신관이 크로버라는 걸 벌써 확신했을 텐데 말이야.”

    계속해서 턱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던 카미앙이 돌연 내게로 몸을 기울였다.

    “응? 녹시아? 말해보시오. 크로버의 정체가 뭔지 속 시원히 밝혀보란 말이오.”

    이건 그 눈이었다. 라우치 왕가가 아니라 서큐버스의 피가 흐르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요사스러운 눈빛. 진짜 녹시아를 몇 차례나 홀렸던 눈.

    설마 이것이 라암의 보물과 계약한 주인공의 힘이라도 되는 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이 무언지 알아내기 위해선 돌직구를 던지는 수밖엔 없었다. 나는 카미앙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질문으로 맞받아쳤다.

    “라암의 보물이 뭐죠?”

    “지금 뭐라고 했소?”

    “라암의 보물! 이라고 했어요.”

    「녹시아가 라암의 보물을 알고 있어? 역시 아까 라암의 보물이 반응했던 게 녹시아 때문이었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카미앙을 긴장하게 만드는 물건이었다. 내가 제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카미앙은 일단 시치미를 뗐다.

    “글쎄, 무슨 장신구인가? 그대가 액세서리에 관심을 보인 건 처음이군. 갖고 싶다면 사주겠소.”

    「어디선가 이야기를 들은 건가? 아니지, 그럴 리 없어. 나와 계약을 맺고 있는 이상 라암의 보물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라암의 보물을 보낸 바이난 공국조차 그 물건이 존재했다는 것을 잊지 않았는가.」

    계약자 외에는 존재를 잊게 만들다니, 상상 이상이었다. 하긴 왕세자를 감쪽같이 없애고 카미앙을 그 자리에 올려놓은 물건인데 대단하지 않을 리 없었다.

    ‘진짜 흑막은 마룬시에가 아니라 이쪽이었네…. 게임 제작사 직원이었던 나도 모르는 흑막이라 이거지….’

    게임 전체의 스토리를 뒤흔들 수 있는 단서였다. 아니 게임의 주인공 자체가 바뀌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젠 이곳이 내가 알던 게임 속이 맞긴 하는지 의문마저 들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침착, 침착하고….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생각해보자.’

    이게 그렇게나 중요한 물건이라면 난 그 존재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사람이 되는 셈이었다. 게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템인 만큼 내가 라암의 보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카미앙이 저렇게 정보를 술술 풀어주니 그건 커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암의 보물이란 게 사려고 하면 살 수 있는 물건인가요?”

    “왜, 가게에서 파는 물건이 아닌 거요? 그럼 그게 뭔지 그대가 설명해 주겠소?”

    날 떠보겠다 이거였다. 내게 ‘사람을 분석하는 마케터의 혜안’ 스킬이 있다는 것을 알면 이런 바보스러운 시도는 하지 않았을 텐데.

    “그건 좀 위험하네요. 당신과 나, 지금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잖아요?”

    부정할 생각은 없는지 카미앙이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라암의 보물이 뭔지 알면서 시치미를 떼는 중이고요. 이런 데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설마 지금까지 날 사랑했던 게 라암의 보물 때문이었던 건가? 그걸 노리고? 아니야, 그러기엔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아니면 라암의 보물이 지닌 또 다른 능력인 건가? 주인공에 걸맞은 여주인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지…. 그런데 그 여주인공이 꼭 라암의 보물을 알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나?」

    ‘너도 나만큼이나 혼란스러운 모양이네.’

    카미앙 역시 이 상황에 당황하고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생각과 망상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걸 보니 라암의 보물이라는 게 그리 친절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계약자에게 제대로 된 설명서도 주지 않을 걸 보면 말이다.

    “좋아, 나부터 이야기하지. 라암의 보물은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요. 왕실의 보물과도 같은 거라 남들에게 알려지면 곤란하기에 거짓말을 한 거요.”

    포장지도 채 뜯지 않은 겉핥기식 설명이어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카미앙이 이제 내 차례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지난번에 선물하려 했던 다이아 목걸이라든지, 왕비님의 펜던트처럼 단순한 장신구인 건 아니죠? 그러니까…. 성물처럼 어떤 능력을 갖춘 물건인 거 맞죠?”

    카미앙이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분위기는 제대로 잡았는데….’

    마차가 모루강을 건너고 있었다. 성안에 도착하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걸 믿고 일단 지르기로 했다.

    “사실…. 당신이 파르미엔 영지에 도착했을 때 라암이란 존재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뭐라고?”

    카미앙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게 사실이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라암의 보물이 주인공에게 걸맞은 여주인공이라도 준비한 건 아닌가 하는 카미앙이 망상에 부응하기 위한 대답이었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녹시아는 공략 캐릭터 중 한 명이었으니까.

    “지금까지는 아무 말 없다가 왜 이제 와서 그걸 밝히는 거지?”

    “라암의 목소리가 비밀로 하길 원했으니까요. 당신도 만일 라암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알지 않나요? 그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요.”

    「이런 일이 있었다니. 녹시아의 입이 무겁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뭐 입을 자물쇠로 봉하고 산 정도로군. 라암의 목소리를 들었는데도 내게 그런 내색 한번을 내비치지 않았다니. 어떤 면에선 정말 대단한 여자라니까.」

    이제 마차는 정문을 지나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어디 이야기해 보시오.”

    “당신이 비웃을 만한 이야기였죠.”

    “내가 라암의 전언을 어찌 비웃는단 말이오. 빨리 말해보시오.”

    “어라? 벌써 왕궁에 도착했는데요?”

    이제야 눈치챈 것처럼 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미앙이 재촉했지만 해 줄 말이 없었다. 뒷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해야 득이 될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릴 시간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끊기 위해 먼저 마차 문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근위대가 주위를 에워쌌다.

    “다리스 대장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파르미엔 기사님? 왕세자님과 함께 계셨던 모양이군요. 병사들을 데리고 나가 걱정을 했었는데 기사님께서 동행하셨다면 안심입니다.”

    “글쎄요. 왕세자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이번엔 절 연행하실지도 모르거든요.”

    뒤를 돌아보며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발랄하게 물었다.

    “그래서, 왕세자님.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죠? 지하 감옥인가요? 아니면 남쪽에 있다는 외딴섬으로 유배라도 가는 건가요?”

    “파르미엔 기사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어째 카미앙보다 다리스 쪽이 더 당황하며 반응을 보였다. 뒤늦게 마차에서 내린 카미앙이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라암의 보물까지 알고 있어. 역시 녹시아는 내 곁에 잡아 두는 수밖에 없다.」

    라암의 보물을 걸고넘어진 보람이 있었다. 날 감옥에 처넣을 것 같았던 분노도, 크로버에 대해 캐묻던 집요함도 라암의 보물이라는 거대한 제재에 묻혀버렸다.

    대신 카미앙은 특유의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 손을 받쳐 들었다. 약혼녀를 에스코트하는 다정한 약혼자로 보일 지경이었다.

    “다리스, 놀라지 말게. 이 사람은 그냥 농담을 하는 것뿐이니.”

    잠시 다리스에게 주었던 시선이 곧 다시 내게 돌아왔다.

    “그대의 방은 내가 진작 마련해 두었소. 갑자기 모도루 백작가로 떠나지만 않았어도 그대가 지내고 있을 곳이요.”

    투정 부리는 아이를 어르기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난 카미앙의 안내를 받으며 어둠이 내려앉은 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 틈을 타 퀘스트를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힌트를 준다니, 가뭄에 단비 같은 희소식이었다. 슬쩍 아래를 확인해 보니 퀘스트 달성에 필요한 과업이 주어져 있었다. 직접 과업을 생각해 냈어야 하는 ‘어장 속 물고기 탈출 퀘스트’를 생각하니 벌써 다 해결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 이런 거라도 있어야 레벨업 한 기분이 들지.’

    이미 성공 한 첫 번째 과업은 가벼운 기분으로 넘기려던 참이었다.

    ‘헉.’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기에 입을 틀어막았다.

    ‘첫 번째 과업의 완료 조건이 크로버가 언덕에서 떨어지는 거였어?’

    크로버는 그저 루안을 구할 요량으로 언덕에서 떨어졌던 것뿐이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크로버가 카미앙에게 오늘 일을 예언했다고 하지 않았나?’

    혼자서 아무리 궁리해봤자 크로버에게서 진실을 듣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뒤숭숭한 기분으로 그다음 과업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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