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응?”
“지금만 해도 아무런 의심 없이 절 따라 나오셨잖아요. 시종들까지 물리시고요.”
“하하, 그거야 너는 내 동생이니 그런 거 아니겠니.”
카미앙은 꽤 심각한 분위기인데 왕세자는 그걸 깨닫지 못한 듯했다. 동생이라 마냥 귀엽게만 보고만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다른데 동생은 무슨 동생이에요.”
“카미앙 그건….”
“잡소리는 때려치울게요. 이제부터 중요한 일을 해야 하거든요.”
“중요한 일이라니?”
“형님의 뒤통수에 비수를 꽂는 일이죠.”
카미앙이 씩 웃어 보였다. 설마 품에서 칼이라도 꺼내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카미앙은 좀 전에 꺼냈던 나무 조각을 머리 위로 휙 던졌다.
“라암의 보물이여, 계약하겠습니다.”
‘라암의 보물!’
시스템이 몇 번이나 강조했던 그 이름이 카미앙의 입에서 나왔다.
“왕세자의 운명을 내게 주세요. 그리하여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싶던 찰나 공중에 뜬 나뭇조각 주위로 먹구름이 몰려왔다.
“카미앙! 대체 뭘 하려는 거냐! 이교도라도 되겠다는 거냐?”
“글쎄요. 이교도가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제가 되고 싶은 건 왕세자거든요.”
왕세자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카미앙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주변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을 향해 소리쳤다.
“계약의 증표로 레이워드 드 라우치를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이교도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악마를 부르는 의식처럼 보였다. 미친 거 아니냐는 소리를 몇 번이나 질러댔지만 내 목소리가 닿을 리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과거를 바꿀 순 없었다.
먹구름에서 무언가가 뻗어 나왔다. 사람의 팔처럼 생긴 것들이 나무줄기처럼 자라나니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그 손들이 왕세자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카미앙! 당장 멈춰!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아? 넌 지금 저 이교도의 물건에 조종당하고 있는 거라고!”
“아뇨, 형님. 이건 제가 간절히 원해왔던 거예요. 전 언제나 왕세자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거든요. 늘 그 자리에 있었던 형님은 모르시겠지만요.”
라암의 보물이 카미앙의 명령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공중에서 뱅뱅 맴돌고 있었다. 카미앙이 그것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안돼! 카미….”
그걸로 끝이었다. 왕세자의 목소리가 메아리를 남기며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그 위로 크로버가 떨어지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저 왕세자가…. 진짜로 크로버? 그치만 일단 머리색이 다른….’
순간 마룬시에로 변장할 때 사용했던 액체가 생각났다.
‘기도를 하면 원하는 형태로 모습을 바꿔주는 성수입니다. 신성력을 소모하며 모습을 유지할 수 있지요.’
오늘만 해도 크로버는 루안의 머리색으로 염색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던 크로버의 모습도 사실은 변장을 한 거였다면? 까만 머리색이, 잿빛 눈동자가 실은 성수를 이용해 바꾼 거였다면?
빨간 불꽃이 비쳐 붉게 보이던 눈동자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게 단순히 내 취향이 아니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내가 얼굴을 봤을까 봐 걱정했었지.’
그땐 어차피 모든 이성이 오징어로 보이던 때라 알아채지 못했다. 후드가 바람에 벗겨졌을 때 노심초사했던 이유가 어쩌면 원래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이 가정이 맞았다면 결론은 한가지였다.
바렌시드의 원래 왕세자는 크로버였다. 현재 왕세자인 카미앙은 크로버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엄청난 추리력을 발휘했다 싶었는데 곧 허점이 드러났다.
‘하지만 크로버는 죽지 않았잖아? 그럼 왕궁으로 돌아가 이 일을 사람들에게 밝히면 될 일 아니었나?’
동생의 실체가 충격적일 수는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지금처럼 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국왕이 대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한 건지도 미스터리였다. 아무리 낭떠러지라 한들 까마득한 첩첩산중이 아니었다. 겨우 이 언덕에서 떨어졌을 뿐인데 아무도 크로버를 찾지 못했나?
아무리 라암인지 뭔지 하는 보물의 힘을 빌렸다고 해도 일국의 왕세자가 사라졌는데 그렇게 허술하게 조사 했을 리 없었다.
난데없이 과업 달성을 알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역시, 과거였구나.’
좀 더 빨리 나타났다면 나도 상황 파악이 더 수월했을 텐데 말이다.
다시 시야가 바뀌었다. 눈앞을 가득 채우던 세피아 빛이 사라지고 원래 알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카미앙은 여전히 내 팔을 잡고 있었고 날 막아서던 수하들의 위치도 그대로였다. 과거를 보는 동안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당신은 나와 돌아가….”
‘살인자!’
의도한 건 아니었다. 무심코 벌레라도 떼어내듯 카미앙의 손을 '탁' 쳐냈다. 자신이 형이라고 부르던 자를 언덕에서 떨어뜨리던 카미앙의 모습이 뇌리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순수한 악의로 가득 찬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 하지 말라고. 저런 과거가 있으면서 본인이 왕세자임을 그렇게나 내세웠다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끔찍하고 뻔뻔스러운 인간, 아니 범죄자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크로버를 찾는 것만이 아니었다. 카미앙이나 그의 수하가 크로버에게 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크로버가 변장하고 다닌 이유는 카미앙에게 자신의 본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바람의 가호가 얼마나 신성력을 많이 사용하는 성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 그걸 사용하느라 신성력을 다 써버렸다면 크로버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을 터였다.
“수하들이 더는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저 아래로 내려갈 생각 따윈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요.”
난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어 들고 카미앙을 막아섰다.
“마치 날 찌르기라도 할 기세로군.”
“내가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하죠?”
“난 카미앙 드 라우치이고 그대는 녹시아니까.”
원래 녹시아는 자신을 공격할 수 없는 존재라고 정해져 있기라도 한 대답이었다. 지금까지는 카미앙의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그저 왕세자로 받들어지며 커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주인공….’
그래, 카미앙이 이 게임의 주인공이긴 했다. 그리고 난 게임 밖에서 온 사람이었기에 그 사실을 아는 것뿐이었다. 소설이나 게임의 주연이 본인이 주인공인 것을 인식하던가?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날 견제하고 있던 근위병이 힘으로 제압하기라도 하려는 듯 내게 다가왔다. 내가 다른 생각에 잠겨있는 지금이 기회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어림도 없지.’
몸을 휙 웅크려 나를 움켜잡으려고 하는 손아귀를 빠져나왔다. 재빠르게 팔꿈치로 병사의 목 언저리를 내리쳤다.
“근위병을 공격하다니….”
“분명 당신도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했어요.”
이제서야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인지 카미앙은 슬금슬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곁에 있는 병사는 단 한 명뿐. 아무리 세상의 주인공이니 뭐니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승산이 없었다. 카미앙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도망가겠지. 그래, 보내주마. 도망가라.’
내 목적은 카미앙을 제압하는 게 아니라 크로버를 찾으러 가는 것이었다. 그가 도망가버리면 난 크로버에게로 갈 수 있었다.
“나와도 좋다!”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카미앙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내 시야가 닿지 않던 곳에서 병사 두 명이 걸어 나왔다. 단지 적군 두 명이 더해진 거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밧줄로 묶인 루안이 병사들에게 끌려오고 있었다.
‘여길 도망간 줄 알았는데! 어쩌다가….’
내 표정을 읽기라도 한 건지 카미앙이 여유를 부렸다.
“누군지 잘 알고 있겠지? 분명 죽게 두고 싶진 않을 거라 생각하오.”
“죽이다니? 저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죽이려는 거죠?”
“그러는 그대는 왜 저 아이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감히 왕세자의 물건을 도둑질 한 좀도둑일 수도 있고 법을 어긴 도망자일 수도 있는데 말이오.”
루안을 붙잡고 있는 병사는 명령만 떨어진다면 언제든 루안을 찌르기라도 할 것처럼 검을 빼 들고 있었다.
좀 전에 카미앙의 과거를 엿보지만 않았더라도 루안을 죽이지는 못할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냥 날 협박할 요량으로 저러는 거라 여겼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카미앙은 진짜로 루안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잔인한 사람이었네요.”
“내가? 아니지, 약혼자에게 검을 겨누는 그대가 더 잔인하지. 날 찌르겠다고 하는 그대의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시오?”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카미앙은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런 여유를 부리는 거 보니 통증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품속에서 웅웅거리던 목걸이 역시 어느 틈엔가 잠잠해졌다.
“내가 당신을 따라가면 저 애를 놓아 줄 건가요?”
“그럴 순 없지. 나한테 꼭 필요한 아이거든. 대신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얌전히 감옥에 가두도록 하지. 왕세자의 이름을 걸고 약속해.”
‘크로버와 루안이라….’
둘 중에 한 명만 선택해야 한다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그저 어금니를 꽈악 깨무는 것으로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크로버는 내가 여기서 시간을 끄는 동안 어디론가 몸을 피했을 확률도 있었다. 바람의 가호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말이다. 준비성이 좋은 사람이니 만약을 대비해 치유의 물약을 가져왔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상처를 입긴 했어도 움직이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루안은…. 겁에 질린 채로 묶여있는 저 아이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내가 크로버를 선택한다면 살아남을 확률이 제로에 가까웠다.
‘우리를 믿고 용감하게 인터뷰를 해 준 건데…. 저 애가 잘못되면 라라벨을 무슨 낯으로 보겠어.’
무엇보다 크로버가 살리려고 했던 목숨이었다. 내가 루안을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검을 들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당신의 뜻에 따르겠어요.”
고개를 푹 숙였다. 의기양양한 카미앙의 얼굴을 보면 그 낯짝에 주먹이라도 날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