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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75화 (75/95)

75.

「모리아리티 백작도 크로버도, 예지의 신관도 다 같은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짜 맞춘 듯한 일이 생길 리 없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카미앙이 크로버의 정체를 알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요? 설마 이런 상황에서 모리아리티 백작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려는 건 아니죠? 아님 헛소리라도 하는 건가요?”

“계속 모르는 척하겠다는 건가?”

「라암의 보물은 계속 이 상태고 녹시아는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으니…. 안 되겠어. 일단 여길 벗어나 보기라도 해야지.」

카미앙이 가지고 있다는 라암의 보물도 내 목걸이와 마찬가지로 반응을 하는 모양이었다.

“일단 마차에 타시오. 짧게 끝날 일이 아닌 것 같군.”

어림없는 소리였다. 크로버가 상처를 입고 떨어졌다. 무사한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당신 혼자 가지 그래요? 난 떨어진 사람을 놓고 갈 순 없어요.”

「크로버가 걱정된다 이거지. 대체 둘이 무슨 관계지? 사람 미치겠군.」

카미앙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저런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내 수하들을 시켜 녀석을 데려올 테니. 만일 죽었다면 시체라도 가져오라 시키겠소.”

시체라는 말에 열이 올랐다. 카미앙을 제치고 그의 수하들을 제쳤다. 다급한 숨소리와 함께 카미앙 내 팔을 잡은 순간이었다.

경고만을 보내던 시스템이 퀘스트 안내 메시지를 띄웠다.

<*주의사항* 플레이어는 필히! 꼭! 해당 퀘스트를 수락하시길 권장합니다.>

이름만으로는 무슨 퀘스트일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게임의 최종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지 확신도 서질 않았다. 하지만 이 시스템이 지금까지 이렇게 간절하게 무언가를 권유한 적이 있던가?

결국 Yes를 선택했다.

동시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

마치 세피아 필터라도 씌운 것 같았다. 하늘이나 나무는 물론이거니와 날 붙잡은 카미앙까지, 세상이 순식간에 흑백영화로 변한 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 이것까진 좋았다. 가장 큰 문제는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숨은 쉴 수 있었다. 위, 아래, 좌우.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다리는 땅에 고정되기라도 한 듯 떨어지질 않았다. 카미앙에게 붙잡힌 팔 역시 그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한마디로 마네킹처럼 몸이 굳어버렸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나만 움직이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카미앙도, 그의 수하들도 모두 조각처럼 멈춰 있었다. 심지어 눈동자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꼭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때 저쪽에서 어린애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법 점잖은 말투였다.

“형님, 여기는 정말 오랜만이죠?”

“그렇구나. 마지막으로 불꽃놀이를 본 게 언제였지?”

“다 형님이 바쁘셔서 그래요.”

“미안하구나. 하지만 오늘만큼은 실컷 놀 수 있으니까 이걸로 봐주면 안 되겠니?”

언덕 아래에서 아이 두 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어떻게 저 애들은 움직이고 있지?’

그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만큼은 세피아 필터를 걷어낸 듯 총천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얘들아, 이리 와서 나 좀 도와주지 않겠니?’

큰소리로 외쳤지만 그 외침은 내 머릿속에서나 울려 퍼질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우리가 서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이 꼴을 보면 분명 놀랄 거로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태연했다. 아니 태연한 것을 넘어서 우리가 아예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밖에 없었다. 언덕 끝에 나란히 앉은 게 인형처럼 귀여워 보이기도 했지만, 자칫 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위험해 보였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귀족가의 자제인 것 같은데 시종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카미앙, 오늘은 무슨 일이니?”

‘카미앙?…. 설마 내가 아는 그 카미앙은 아니겠지? 동명이인인가?’

카미앙이 이곳에서 흔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난 둘 중 좀 더 어려 보이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황금처럼 빛나는 금발 머리에 파란 눈동자. 그렁그렁한 눈망울과 도톰한 입술.

‘내가 아는 카미앙이랑 닮았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이쪽이 좀 더 통통한 볼따구와 동글동글한 턱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어린 카미앙이라고 보는 편이 합당할 것 같았다.

‘설마 이 상황은….’

게임 속이 아니었다면 상상조차 하지 않을 가정이었다.

‘과거인가? 카미앙의 어린 시절?’

카미앙의 과거이기에 현재의 사람은 움직일 수도 없고 아이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제법 그럴 듯한 설명이었다.

‘그럼 저 애는 누구지? 카미앙을 제법 친근하게 부르던데.’

“형님, 사실은 제가 재미난 물건을 받았어요.”

‘형님? 카미앙이 형님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있던가?’

공작가의 계보까지 쭉 훑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카미앙의 친인척에 대한 설정은 없었다.

“그래? 뭔지 기대되는걸?’

“저 재미있는 물건을 찾았어요.”

“재미있는 물건? 우리 카미앙이 그런걸 어디서 찾았을까?”

“바이난 공국에서 보낸 선물에 들어있었어요.”

바이난이란 이름에 큰 아이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카미앙, 바이난 공국이 우리의 중요한 동맹국이긴 하지만 그들이 이교도라는 건 알고 있지? 어쩌면 위험한 물건이 섞여 있을지도….”

“형님은 너무 걱정이 많아요. 왕세자가 되면 다 그런 건가요?”

왕세자? 내 귀를 의심했지만, 확인이라도 시켜주겠다는 듯 다시 카미앙의 종알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세자 수업이 시작되고부터는 걱정도 많아지고, 저와 잘 놀아주시지도 않고….”

‘그럼 카미앙이 원래 왕세자가 아니었단 말이야? 친형이 있었다고?’

이번엔 큰 아이 쪽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카미앙의 샛노란 금발에 비해 마치 만월의 달과 같은 옅은 금발의 소년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단순히 카미앙과 닮아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그렇지만 눈동자만큼은 카미앙과 전혀 달랐다. 이쪽은 타오르는 불씨를 품고 있는 듯한 빨간 눈동자였다.

‘저 눈동자도 왠지 익숙한데….’

한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깊고 매혹적인 눈동자. 내게 능청스레 떠들어대고 미소 짓던, 때론 단호하고 때론 무언가를 갈구하던 눈동자.

‘설마… 크로버?’

그렇게 생각하니 소년 크로버라고 해도 믿을 만큼 왕세자는 그와 닮아 있었다. 저 지붕 위에 앉아 상상해 보았던 될성부른 그의 어린 시절과 똑 닮았다. 검은 머리에 회색 눈동자라면 의심할 것도 없이 크로버였다.

“형이 미안해. 그럼 얼마나 재미난 선물인지 보여주겠니?”

왕세자의 말에 카미앙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야, 굉장히 독특한 조각이로구나.”

난 눈동자를 최대한 왼쪽으로 돌려 카미앙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물건을 확인했다. 왕세자의 반응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나뭇조각이었다. 길쭉한 나무토막을 장승처럼 깎아놓았다.

“이 가운데 박혀있는 빨간 보석이 특히 인상적인걸?”

맞는 말이었다. 저 조각상에서 값나갈 게 있다면 오로지 저 작은 보석….

‘잠깐만, 저거 내 목걸이에 달린 것과 비슷하지 않나?’

그렇게 보이긴 했는데 확신할 수는 없었다. 붉은색 보석이라고는 루비밖에 모르는 나였다. 그나마 진짜 루비인지 큐빅인지도 구분할 줄 몰랐다. 내가 보기에 크기와 색이 같다고 해서 똑같은 물건이라고 할 순 없었다.

“아녜요, 형님. 신기한 건 따로 있어요. 이 조각, 말을 할 수 있더라고요.”

말하는 조각이라니, 카미앙 그건 좀 무섭잖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왕세자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말을 한다고?”

“네, 우리가 하는 것과 똑같은 그런 말이요.”

“…설마 이 나뭇조각이 네게 말이라도 걸었다는 것이냐?”

“맞아요. 뭐라고 했는지 알려드릴까요?”

순간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던 카미앙의 얼굴에 악의가 비쳤다. 일러스트에서부터 실제 사람으로 만나기까지, 오랫동안 그를 보아온 나였기에 알 수 있었다. 아직 어리기에 품을 수 있는 순수한 악의였다.

“아니, 그건 별로 알고 싶지 않구나. 이교도의 물건이야. 정말로 말을 했다 한들 제대로 된 소리를 지껄였을 리 없다. 그 물건은 돌아가는 길에 신전에 맡기는 편이 낫겠어.”

“싫어요. 이건 제건 걸요?”

“물론 카미앙의 물건이긴 하지. 조금 있으면 불꽃놀이가 시작할 거야. 저 지붕 위로 올라가자. 형이 잡아줄게. 조각에 대해선 그다음에 다시 이야기해 보자.”

왕세자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카미앙은 고개를 흔들며 왕세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 조각이 뭐라고 했는지 형님께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마지못해 다시 주저앉은 왕세자에게 카미앙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를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어요.”

그 눈은 광기와도 같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니, 난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구나.”

“주인공 몰라요? 책이나 공연에 등장하는 주인공 있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고귀한 존재인 주인공. 세상 모든 게 주인공을 위해서 존재하죠. 사람들도, 나라도,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이야기니 그런 거 아니겠니.”

“에이, 재미없어. 형님은 이렇게 엄청난 이야기를 듣고도 전혀 흥분되지 않는 모양이시네요.”

입을 삐죽이던 카미앙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형님은 이미 이 세상의 주인공이시니….”

“카미앙,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형님께선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왕세자니 이 바렌시드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아버지는 형님을 가장 사랑하시고 대신들은 형님의 눈치를 보고 귀족들 역시 형님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죠. 그것뿐인가요? 형님께선 갖고 싶은 건 뭐든 손에 넣으실 수 있고 하고 싶은 건 뭐든 하실 수 있죠.”

저 왕세자라는 사람은 동생인 카미앙을 매우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혈육이 질투에 가득 차 빈정거리는데도 저렇게 다정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뭔가 잘못 알고 있구나. 왕세자는 그런 자리가 아니야. 오히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많단다. 자기 자신보다는 국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자리이지.”

왕세자는 카미앙을 토닥이며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겉으로는 다들 날 존경하고 따르는 체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야. 그중에는 내게 비수를 들이댈 자들도 있을 거다. 일단 다른 사람을 의심부터 해야 한다는 건 참 씁쓸한 일이지.”

카미앙은 착한 아이처럼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순순히 수긍하니 되려 께름칙했다.

“비수를 꽂을 자가 누군지 가리는 방법은 더 배우셔야겠네요.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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