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옷은 땀으로 젖어있었고 곧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녹시아가 저렇게 될 정도라면 상당히 먼 거리를 뛰어온 게 분명했다.
‘마차를 불렀거나 말을 탔거나 해야 했을 거리를 맨몸으로 왔다라…. 그것도 상당히 급하게.’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녹시아를 보며 카미앙은 고개를 푹 숙였다. 챙이 넓은 모자와 왕세자답지 않은 복장으로 나름 변장을 하고 나왔지만, 녹시아는 자신을 알아볼지 몰랐다. 하지만 녹시아는 주변을 살필 여유 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설마…. 저 여관이 목적지인가?’
녹시아의 발걸음은 여관 앞에서 멈췄다. 카미앙은 부하들에게 잠시 대기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섣불리 행동하는 것보단 녹시아의 행동을 살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뛰어오던 기세로는 곧바로 여관에 들어갈 것 같더니만 녹시아는 그 앞에서 서성이기만 했다. 그러더니 방향을 틀어 건물 뒤로 올라갔다. 카미앙이 내려왔던 언덕이었다.
어째 예감이 좋지 않았다. 카미앙은 부하들을 물리고 녹시아가 올라간 반대쪽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이쪽에는 여관에서 쌓아놓은 짐과 술을 담은 나무통 따위가 있어 어느 정도 몸을 가릴 수 있었다.
녹시아가 나무 아래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 밖에서 올라간 사람은 녹시아뿐이었으니 저 사람은 여관 안에서 나온 게 확실했다.
‘크로버? 아니면 루안?’
카미앙은 온 힘을 다해 나무상자 틈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 집중했다. 모리아리티 백작은 아니었다. 모리아리티 백작이 크로버라 굳게 믿고 있는 카미앙은 저 녀석이 루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녹시아가 갑자기 루안의 멱살을 잡더니만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미앙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의 말소리까지 들을 순 없었다. 녹시아는 곧 그와 헤어져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에 루안이 안으로 들어갔는지는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부하들에게 돌아가 빨리 지시를 내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루안이란 녀석이 여기 있는 게 확실해졌다. 단, 여관 안에 있을지 저 언덕에 있을지는 모르니 두 조로 나눠서 행동한다. 너희 둘은 빨리 올라가 녀석을 잡아. 거기 없다면 여관 안으로 들어갔을 거다. 뒤쪽에 쪽문이 있는 모양이니 그쪽으로 진입해라.”
명령을 마친 카미앙은 옆에 있는 두 명을 돌아봤다.
“너희는 아까 말한 것처럼 저 정문으로 들어가 루안을 찾아라. 파르미엔 기사가 막아설지도 모른다. 그땐…. 파르미엔 기사에게 어떠한 공격을 해도 좋으니 녀석을 꼭 잡아야 한다. 남은 한 명은 날 호위하며 대기하도록.”
녹시아가 방해한다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안위까지 살피면서 행동하기엔 녹시아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루안! 루안이 어떤 녀석이냐.”
근위병 한 명이 카미앙이 말한 대로 제법 거칠게 문을 젖히고 들어갔다. 비명이 요란한 가운데 자신이 루안이라고 나타난 자가 있었다.
“절 찾으셨다고요? 무슨 일입니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카미앙은 깨달았다.
저자는 루안이 아니다.
루안이라 나서긴 했지만 분명 모리아리티 백작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오전에 들었던 예지의 신관이 떠오르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저자가 크로버라면 녹시아는?’
분명 녹시아가 막아설 거로 생각했는데 그녀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왜 이러십니까? 오, 오지마!”
카미앙이 녹시아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동안 크로버가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정문이 아닌 반대편으로 뛰는 걸 보니 뒷문으로 나가려는 듯했다. 카미앙은 다시 한번 언덕 쪽으로 달려갔다.
‘녹시아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카미앙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저쪽에도 길이 있긴 한 건가 싶은 언덕 아래에서 녹시아가 올라오고 있었다. 쉼 없이 뛰어다닌 탓인지 몹시 지쳐 보였다.
‘지금이라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생각을 실천할 수는 없었다. 뒷문으로 튀어나온 크로버가 소리를 치며 언덕으로 달려 나왔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당신들에게 죽나, 살아남아서 베르만 님께 죽나 난 어차피 똑같만 말이야!”
베르만? 여기서 왜 베르만의 이름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크로버는 언덕 끝에 서서 근위병들을 협박하고 있었다.
“뛰어내리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카미앙의 심장이 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뛰는 맥박 때문에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왕세자님, 괜찮으십니까?”
근위병의 부축을 받으며 카미앙은 가슴 안쪽에 넣은 것을 꺼냈다. 라암의 보물, 그 물건이 자신의 심장 박동에 맞춰 진동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심장이 라암의 보물에 맞춰 박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네가 보기에도 이 물건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느냐?”
부하에게 묻자 그는 대체 뭘 묻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 움직임이 자신에게만 느껴지는 거라면 확실했다. 라암의 보물이 반응하고 있었다.
“억!”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카미앙은 라암의 보물을 다시 집어넣고 시선을 돌렸다. 부하 한 명이 쓰려졌다. 목덜미 부근에 단도가 꽂혀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녹시아가 서 있었다. 어느 틈에 여기까지 올라와 공격한 모양이었다.
카미앙과 대치하고 있는 부하가 고개를 돌려 녹시아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더는 생각할 틈이 없다는 듯 검을 빼내며 크로버의 다리를 베었다. 그로서는 자꾸만 뛰어내린다고 하는 크로버를 잡아두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피가 튀었다.
“어, 어.”
“안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로버가 공포에 질린 듯 주춤거리더니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녹시아가 그를 붙잡으려는 듯 뛰어갔지만, 그것보다는 크로버가 떨어지는 게 먼저였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지만, 카미앙은 녹시아에게 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에 정보를 많이 알수록 유리한 게임이었다.
우우웅.
하지만 문제는 이 라암의 보물이었다. 마치 큰 쇳덩이에 달라붙으려고 하는 자석이라도 되듯 라암의 보물이 녹시아가 있는 쪽으로 카미앙을 이끌고 있었다.
***
떨어졌다. 크로버가 저 언덕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아니 이쪽에서나 언덕이지 저쪽은 절벽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람의 신관에서 받은 엄청나게 좋은 성물을 지니고 언덕에서 떨어져 루안이 죽은 것처럼 위장한다. 크로버가 계획했던 대로였다. 허술한 데다 제대로 성공하지도 못한 그 계획 말이다.
성물 덕분에 떨어져도 무사할진 몰라도 칼을 맞았다. 그 상처로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빨리, 크로버를 찾으러 내려가야…. 시스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언덕으로 다시 올라올 때부터 시야를 가로막으며 깜박거리던 시스템 메시지였다. 아무리 시스템 메시지라 한들 사람 목숨이 위태로운데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크로버를 구하고 난 다음에 읽어봐야지 싶어 무시하고 있었는데 자꾸 깜박거리면서 시야를 가렸다.
읽어보고 싶지 않아도 절로 눈에 들어왔다.
‘대체 이건 무슨 소리야.’
가뜩이나 맘이 급한데 알 수 없는 소리를 잔뜩 늘어놓은 시스템 메시지에 신경 쓸 겨를 따윈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괴한까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째 날 방해하는 놈들밖에 없냐.’
짜증이 났다. 직접 날 공격하진 않았지만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공격처럼 느껴졌다. 난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은 검을 들었고 난 맨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멈춰! 녹시아. 멈춰!”
말도 안 되는 명령이 들려왔다. 따를 필요는 없었다. 난 상대가 휘두르는 검을 피하면서 팔목을 세게 내리쳤다. 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녹시아! 내 말 못 들었나?”
갑자기 가슴 언저리에서 우웅 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뭐지?’
카미앙이 내게 가까워질수록 목걸이가 더욱 세차게 진동하는 탓에 가슴에 통증마저 느껴졌다.
구급차가 떠오르는 빨간 색으로 시스템 메시지가 깜박이고 있었다. 귓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요란스레 울리는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시스템 메시지를 곱씹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암의 보물이 대체 뭔데? 라암의 봉인은 또 뭐고?’
순간 옷 안쪽으로 걸고 있는 목걸이가 떠올랐다. 설마 그게 진동을 하고 있는 건가?
어서 라암의 봉인이 뭔지 알아 달라는 듯 시스템 메시지가 연속으로 나타났다. 이 목걸이가 라암의 봉인이라면….
“이들은 내 수하다.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지.”
‘라암의 보물이란 게 설마 카미앙이 가지고 있는 물건인가?’
난 그제야 고개를 돌려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카미앙을 바라보았다.
시스템의 간절함은 잘 알겠는데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라암의 보물뿐만이 아니었다.
“당신이 여기 왜 있는 거지?”
저 괴한들이 마룬시에의 수하가 아니라 카미앙의 근위대였다. 대체 카미앙은 어디까지 알고 여길 쫓아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스킬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내가 나타난 게 당황스럽나? 난 그대의 행동이 더 당황스럽군. 녹시아, 말해보시오. 그대는 크로버가 누군지 다 알고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