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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73화 (73/95)

73.

저 속에 감추어진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의 분출이었나보다. 카미앙은 자신도 모르게 불쑥 복장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카미앙이 태어나기 전부터 쭉 보아온,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 라우치 왕가가 있기 전부터 전해 내려온 복식에 대해 의문을 제시한 셈이었다.

신관으로선 생전 처음 받은 질문이었을지 모른다. 흰색 후드를 몇 번 쓸어내리며 그는 잠시 허둥거렸다.

“오랫동안 쓰고 있어서 그런지 크게 불편함은 없습니다.”

“앞이 보이는가?”

“옷보다는 얇은 재질의 천을 사용해서 사물의 형상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밤에는 조금 힘들지만, 어차피 신도님이 오는 시간은 해가 지기 전이니 괜찮습니다.”

한 번 튀어나온 질문은 쉽게 끊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걸 뒤집어쓰고 있는 건가?”

“신관복을 입고 있는 이상 그렇습니다.”

“다른 옷을 입어본 적이 있는가?”

“그거야 물론….”

“언제지? 그땐 얼굴을 드러냈겠지?”

어린애나 궁금해할 법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대답하던 신관이 문득 말을 멈추었다. 신관의 희고 기다란 손가락이 후드 끝을 집어 들었다. 그 상태에서 팔을 조금만 위로 들어 올린다면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날 터였다.

카미앙은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갑자기 목을 타고 넘어가는 그것의 무게가 느껴졌다.

신관은 후드를 젖히는 대신 입을 열었다. 이번엔 그가 카미앙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혹 왕세자님께서는 제 얼굴이 궁금하신 겁니까?”

카미앙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 후드를 당장 벗어버릴 태세였다. 그 아래 감춰진 얼굴이 알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아니요. 내가 신관의 얼굴을 봐서 뭐 하겠소.”

그런 말이 있었다. 신관의 얼굴을 본 자는 그 신관이 전해주는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그 말이 맞는다면 예지의 신관의 얼굴을 확인했다가는 다신 그의 예언을 들을 수 없게 된다. 신은 믿지 않더라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만큼은 믿을 수 있었다.

예지의 신관이 크로버와 동일인일 확률은 모래알처럼 희박했다. 그 희박한 확률에 기대 예언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내 머릿속이 복잡해 신관께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소. 이해해 주시오.”

후드 끝을 붙잡았던 손이 다시 내려갔다.

“부디 오늘의 예언이 왕세자님의 어지러운 심기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카미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바라는 바였다.

***

침실로 돌아간 카미앙은 침대 옆 테이블 안쪽에 있는 보석함을 꺼냈다. 왕세자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화려한 보석함이었다. 반짝이고 호화스러운 물건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카미앙은 금으로 도금한 열쇠를 보석함에 끼워 넣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겉모습과는 달리 안에 있는 것들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나무로 깎은 인형이나 유리구슬 따위로 평범한 남자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물건이었다.

카미앙은 그중에서도 가장 투박스러운 나무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저 사람의 형상 비슷한 것을 나무로 깎아놓았을 뿐이었기에 조각상이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라암의 보물.’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물건이었다. 계약한 이상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아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물건이기에 굳이 꺼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대체 이게 왜 필요한 거지.’

이걸 들고 가야 한다는 것부터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징조였다. 잠시 조각을 응시하던 카미앙은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그것을 넣었다.

다음으로 그가 들른 곳은 집무실이었다. 오늘 검토해야 할 서류들을 베르만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베르만, 내가 자리를 비워야겠는…. 안색이 왜 그런가?”

카미앙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하얗게 질린 베르만의 얼굴을 마주했다. 설마하니 그가 일하기 싫어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닐 터였다. 시선을 살짝 떨구니 손에 들고 있는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줘보게. 대체 무슨 소식이 있기에.”

바르트 신문이었다. 바르하르트 가문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바렌시드에서 가장 큰 신문사였다. 베르만이 어떤 기사를 보았는지는 신문을 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 농장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가짜 향수가 있다.’

첫 페이지에 굵고 큰 글씨로 적혀있었다. 신문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이 일이 기사로 나온 거지?’

신문이 구겨지는 바람에 괜히 한마디를 보탰다.

“대체 이게 무슨….”

카미앙은 일단 차분히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제목만 자극적으로 뽑은 기사는 아닐까 했는데 가짜 향수의 유통과 쇼하트의 농장, 그리고 카피 제품의 중독 성분까지. 핵심적인 내용은 전부 다 담고 있었다.

‘고맙게도, 아주 훌륭한 기사를 써주셨군.’

그중 카미앙의 눈길을 끄는 구절이 있었다.

‘공장 노동자를 익명으로 인터뷰했다라….’

가짜 마룬시에와 도망친 일꾼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순간 신관이 말했던 예언이 떠올랐다.

‘그럼 비밀을 누설한 사람이라는 게….’

수수께끼가 풀렸다. 카미앙은 신관이 말했던 ‘비밀을 누설한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루안, 그래 루안이라는 이름이었지.’

마룬시에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용케 기억났다.

“바렌시드에서 이런 불법을 자행하다니, 정말 겁도 없는 녀석입니다.”

베르만의 목소리에 카미앙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돌아보았다. 베르만답지 않게 분개한 모습을 보니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정말 기사를 보고 흥분한 건가? 기사에는 적지 않는 무언가를 더 알고 이러는 건 아닌가?’

바르하르트 후작가 역시 유력한 범인 후보였다. 후작가를 운운한 건 가짜의 거짓말이었다고 했지만, 바르트 신문사에서 버젓이 이런 기사가 나오지 않았는가.

“그렇지. 아주 괘씸한 놈이야. 이 정도 일을 쇼하트 자작 혼자 했을 리가 없소. 난 배후가 있을 거라 생각하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혹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소?”

카미앙이 은근하게 묻자 베르만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향료 길드가 의심스럽군요. 본인들의 카피 제품이 이 정도로 대량 유통되었다면 모를 리 없었을 텐데요. 앙루민의 제조 방법을 단시간에 알아냈다는 것도 이상하고 말입니다.”

“그럼 그들이 카피 향수를 판매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네, 싼 가격에 팔아 중독된 자들을 만들고 이후 그 해독제를 따로 판매하려고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정도라면 카미앙이 연루된 사실까지도 알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정확한 대답이었다.

“물론 이 바렌시드에 적을 두고 있는 향료 길드에서 이런 일까지 벌이면서 이익을 추구하려 했다는 게 석연찮긴 합니다. 혹 외부 세력의 개입이 없는지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룬시에를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명백히 그쪽을 의심하고 있었다. 카미앙이 아무 말 없자 베르만은 곧 말을 덧붙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그만…. 오늘 자리를 비우십니까?”

“다녀올 곳이 있어서 말이지. 나간 김에 이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살펴보아야겠군.”

어떤 사명감 넘치는 놈들인진 몰라도 덕분에 일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원래도 바이난 공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바르하르트 가였다. 눈에 불을 켜고 조사를 할 게 뻔했다.

집무실에서 나온 카미앙은 다리스를 불렀다.

“덩치 좋은 다섯 명, 사복 차림으로 대기 시키게.”

“밖으로 나가시는 겁니까?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아니, 자네는 됐어.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으니 말이지. 사람들이 근위병인지 알아보지 못해야 하거든.”

신탁에 등장한 인물 중 한 명이 루안이라면 결국 오늘 신탁은 향수 사건과 관계된 게 자명했다. 그렇다면 가능한 왕세자인 자신은 노출되지 않아야 했다. 녹시아까지 있다면 더욱 그러했다.

***

예언의 장소가 가까워질수록 카미앙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꾸 식은땀이 나고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떨리기도 했다.

“왕세자님, 저곳입니까?”

“…그래.”

멀리서 본 풍경은 예전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바렌시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것도 그러했고 성벽과 크게 멀지 않은 뒤쪽으로는 작은 숲이 자리 잡은 것도 그러했다.

‘성안에 집을 지을 곳이 부족하다더니 이쪽은 아직도 개발하지 않은 모양이지.’

카미앙은 당장 동쪽 성벽 지역 개발부터 추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 끔찍한 곳을 마주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그나저나 주변엔 아무도 없군.’

루안이란 자도 녹시아도 보이지 않았다. 예상과는 다른 인물이 나타나는 건가 싶었지만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 원래 신탁이란 사람이 능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법이니까.’

카미앙은 언덕 아래쪽에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흰색으로 칠해진 삼 층짜리 건물은 신전에서 운영하는 숙소라고 들었다. 신전과는 한참 떨어져 있지만, 꼭 신전 안에 있는 것인 양 조용한 곳이었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임에도 소란 한번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경비대의 수색에서도 제외되곤 했다.

‘다시 생각하면 범인이 숨기 딱 좋은 장소란 말이지.’

아마 마룬시에의 수하들도 여기는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대로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나중에 신전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해도 그건 그때 해결하면 될 일이었다.

“너희는 저 건물로 들어가 루안이란 자를 찾아라.”

물론 루안이 저기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일단 한번 찔러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명령한 카미앙은 곧 설명을 덧붙였다.

“정중하게 행동할 필요 없다. 근위병이 아닌 뒷골목 시정잡배처럼 행동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근위병들은 그 명령이 영 어색한 모양이었다. 왕족을 모시는 근위병으로서 늘 예의와 품위를 잊지 말라는 교육을 받아온 자들이었다. 카미앙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절대 근위병인 것을 티 내선 안 된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간다든지…. 아무튼 너희가 할 수 있는 가장 거친 방법으로 녀석을 잡아라.“

병사들이 움직였다. 카미앙은 남은 세 명과 함께 주변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뛰어오는 녹시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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