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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72화 (72/95)

72.

잠에서 깨어난 카미앙이 가장 먼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누워있는 이곳이 일개 왕자의 방인지 아니면 왕세자의 방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기상 시간에 맞춰 따듯한 세숫물과 옷을 가져오는 시종의 태도를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시종의 입에서 나오는 호칭이었다. 그에게 왕세자라는 말을 들은 다음에야 안심하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왕세자님, 어디 불편하신 건 없습니까?”

다행히 오늘도 여느 때와 똑같은 아침이었다. 왕궁은 평화로웠으며 카미앙 자신은 바렌시드의 왕세자였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국왕 부부와 함께 하는 아침은 결코 빼먹는 법이 없었다.

“요즘 식사를 잘 못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고민되는 일이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좀 바빠서 그런 것뿐입니다.”

“내가 왕세자에게 맡긴 일이 많아서…. 고생이 많다.”

“별말씀을요.”

일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왕세자로 대우 해 주는 것이 좋았다.

“왕세자의 몸은 개인만의 것이 아니니 건강을 잘 챙기도록 하세요.”

자식에게 주는 애정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왕비의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래, 이게 내 인생이지.’

카미앙 자신이 쟁취한 삶이었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왕세자의 자리를 무탈하게 지켜왔다. 이대로 몇 년만 더 지난다면 지병으로 건강이 악화된 국왕은 카미앙에게 왕위를 넘길 것이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카미앙 자신은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세계가 주인공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일이 발생하든 결국에는 다 주인공인 자신에게 득이 될 터였다.

바이난 공국과의 교류 강화도 그러했고 아나드 토벌전도 그랬다. 반대하는 세력들도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결국 왕세자의 자리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 가짜 향수 사건만큼은 왠지 마음이 초조했다.

“왕세자님, 어디 가십니까?”

연무장에선 근위대의 훈련이 한창이었다. 카미앙을 알아본 다리스가 얼른 달려왔다.

“신전에 다녀올까 하오.”

“따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소. 겨우 신전인데.”

카미앙은 손짓으로 다리스를 물렸다. 근위병들이 열을 맞춰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녹시아도 저렇게 훈련을 하곤 했지.’

처음 파르미엔 백작가에서 훈련장에 있는 녹시아를 봤을 때는 꽤 놀랐었다. 아무리 기사 가문으로 명망이 높다 해도 여식까지 훈련을 받을 줄은 몰랐다. 추운 날씨임에도 얇은 훈련복 하나 걸친 녹시아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영애 중 가장 인상적인 첫 만남이었어.’

카미앙은 다시 말을 몰아 왕궁을 가로질렀다.

마룬시에가 티파티에 참석한다고 한 날이었다. 어느 영애의 티파티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녹시아가 참석한다는 것만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마룬시에는 녹시아를 의심하고 있었다. 카미앙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앞에선 일부러 쓸데없는 연애사나 늘어놓으며 모르는 척 능청을 떨었다.

‘진짜로 녹시아가 향수 공장을 습격했을까?’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정의감에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했다면 가짜 향수 제조사를 물리쳐야 한다며 나섰을 것이다. 게다가 녹시아는 이 일에 누가 연루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거리낄 게 없었다.

‘생각해보니 상당히 있음 직한 일이군.’

그렇다면 문제는 대체 누가 녹시아에게 가짜 향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는가였다. 어쩌면 그 의문의 존재가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걸지 모른다고 카미앙은 생각했다.

‘모리아리티 백작….’

카미앙은 이미 모리아리티 백작이 마룬시에가 찾는 크로버가 확실하다고 마음을 굳혔다. 조사 결과 동 아그니안 제국의 진짜 모리아리티 백작은 따로 있었다. 사십 대 중반의 상인 출신으로 최근엔 대외적인 활동 없이 칩거 중이라고 했다.

‘가짜 신분까지 차용해 녹시아를 꾀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혹시 그자의 진짜 정체가….’

카미앙은 잠시 떠오른 생각을 곧 지워버렸다. 생김새가 달랐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지워진 자였다. 부모마저 그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 사람일 리 없었다.

일단 크로버를 잡자. 녀석을 잡으면 다 해결될 일이었다. 마룬시에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자신이 먼저 녀석을 찾아 모든 죄를 크로버에게 뒤집어씌워야 했다. 그래야 마룬시에가 더는 녹시아를 물고 늘어지지 않을 터였다.

‘녹시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내가 가짜 향수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알고 있다 해도 자신이 잘 이야기하면 녹시아는 이해해 줄 거다. 카미앙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문득 마지막으로 보았던 녹시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몇 번을 반복해야 하는건지 모르겠네요. 서운한 것도 없어요. 그냥 왕세자님을 향한 제 바보 같은 사랑은 끝난 거예요.’

입을 맞추려는 걸 피하고 자신의 선물까지 거부하며 그녀가 했던 말. 카미앙은 그 말을 떨쳐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녹시아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니. 그럴 리가 없어.’

카미앙이 선택한 이상 녹시아는 당연히 카미앙을 사랑해야 했다. 아나드에서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열정이 식었다 할지라도 지금처럼 행동해선 안 됐다. 그것이 이 세계의 정해진 규칙이었다.

카미앙이 신전을 찾는 건 이 때문이었다. 예지의 신관은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예언을 해 줄지 몰랐다.

한때 녹시아가 진정한 인연인 줄을 모르고 다른 인연을 찾아 헤맬 때, 예언이 번번이 빗나가는 것만 같아 카미앙은 잠시 신전을 멀리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 예언이 다 맞았었지.’

돌이켜보면 예지의 신관 예언은 놀랍도록 정확했다. 모두가 극구 말리던 아나드 토벌전에서 승리할 거란 예언을 안겨준 것도, 파르미엔 영지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알려준 것도 그였다.

‘진작 찾아가 봤으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지도.’

카미앙은 자신의 안일함을 자책하며 말을 재촉했다.

***

“오늘입니다.”

한참이나 기도를 올린 신관이 입을 열었다. 카미앙은 조심스레 되물었다.

“오늘이라니?”

“왕세자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오늘 한자리에 모일 것입니다. 한 사람은 오랜 세월 찾던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간절히 원하는 사람, 마지막 한 사람은 비밀을 누설한 사람이군요.”

신탁이라는 건 참 편리한데 늘 모호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카미앙은 그게 불만이었다.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라면….’

절로 녹시아가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보니 빨리 잡아야 하는 크로버를 뜻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오랜 세월 찾던 사람이라는 말엔 다시금 그 사람이 떠올랐다. 이리저리 퍼즐을 맞춰봤지만 영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장소는? 그 셋이 모이는 장소를 알아야 신탁이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소?”

카미앙은 영 맞춰지지 않는 퍼즐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오늘이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지 알게 될 터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왕세자님께서 그 자리에 계셔야겠죠. 신께서 말씀하시길….”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예지의 신관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신관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언어인 ‘신성어’였다. 신과 소통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카미앙으로서는 진짜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보다 지금 카미앙이 집중하고 있는 건 신성어를 읊조리는 신관의 목소리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군.’

예지의 신관을 처음 만난 것도 아니니 그의 목소리가 익숙하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신관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이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왕세자님의 생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 말씀하시는군요. 다만….”

카미앙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곳을 꼽기란 쉽지 않았다. 가깝게는 왕세자의 집무실이나 침실이 있었고 멀게는 파르미엔 영지 너머의 아나드 지역이 있었다.

“말씀해 보시오.”

“외람되지만 이교도의 물건을 가지고 가야 하는 곳이라고….”

이교도의 물건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카미앙 목적지가 명확해졌다. 그 물건을 들고 가야만 하는 인생에서 가장 장소. 순간 눈앞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던 사람의 형체가 아른거렸다. 뭐라도 움켜잡으려고 아등거리던 몸짓, 도움을 바라는 간절한 눈빛, 점점 멀어져 가던 목소리.

‘젠장. 왜 하필 거기란 말인가.’

그 사건 이후로 몇 년은 악몽에 시달렸다. 기껏 기억 속에 묻어뒀는데 오늘 밤부터 또다시 악몽에 시달리게 될 듯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자신이 불길한 예언을 입 밖에 냈다고 여겼는지 신관의 어조가 심각했다.

“이교도의 물건이라니…. 내게 그런 게 있을지 모르겠군.”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교도의 물건이라고 해서 꼭 눈에 띄게 불길한 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아나드에서 가져온 전리품이라든지 아니면 바이난 공국에서 받은 물건을 말씀하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카미앙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예지의 신관이니 뭐니 해도 자신의 비밀은 알지 못했다. 하긴 대 신관도 모르는 일인데 일개 신관이 알 턱이 없었다.

‘내가 가진 물건을 보면 기절을 할지도 모르겠군.’

물론 비웃는 건 아니었다. 되려 고마워할 일이었다. 덕분이 이토록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다.

카미앙은 신관의 말을 새겨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렇군. 잘 알겠소. 그대는 지금까지 늘 내게 도움이 되는 조언들을 해줬지.”

“다 신께서 왕세자님을 보살피고 계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카미앙은 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교도의 보물과 계약한 자신을 굽어살피고 있다니. 신이 바보거나 사실 이교도와 한통속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분명했다.

“분명 신께 가장 사랑받는 분이실 겁니다.”

순간 나지막한 웃음과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모리아리티 백작?’

녹시아의 곁에 붙어있던 그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들어 신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론 카미앙의 눈에 들어온 건 얼굴의 반 이상을 덮고 있는 후드였다. 하관만으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모리아리티 백작의 얼굴이 익숙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모리아리티 백작…. 아니지, 그놈은 백작도 뭣도 아니지. 아무리 크로버를 잡는 데 혈안이 돼 있어도 예지의 신관을 의심하다니 우습군.’

가당치도 않은 의심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쪽에 자리 잡은 의심은 빠르게 뿌리를 내려갔다.

“그 후드가 불편하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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