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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무가내로 애타게 찾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막상 그가 나타나니 가슴속에서 욱하는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왠지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가면서 주먹이 쥐어지는 걸 보니 날 걱정하게 만든 것에 대한 분노이지 싶었다.
크로버를 등지고 선 채 입을 열었다.
“이 바보야. 어째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기도 전에 목숨을 버릴 각오부터 한 거지? 다른 사람은 소중하고 제 목숨은 상관없어? 신관님의 희생정신 뭐 이런 거야? 그래도 그렇지 겨우 마룬시에 따위에게 죽을 생각을 해?”
“녹시아 님, 그게….”
“내가 찾아올 줄 몰랐어? 루안에게 말을 전하면 내가 알았다고 그냥 돌아갈 줄 알았어?”
“전 절대 그런 게 아니라….”
“사람 서운하게 왜 이래? 너야말로 대체 날 뭐로 생각하고 있었냐고!”
귀족 영애의 말투마저 잊어버린 난 지금 오롯이 이시아로 크로버를 대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나도 모르게 몸을 돌리며 주먹으로 크로버의 가슴을 쳐버렸다.
“억.”
크로버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치며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러니까 난 분노 게이지 가득 찬 녹시아의 주먹을 크로버의 가슴에 정면으로 내리꽂아 버린 거였다. 경솔한 선택에 대해 좀 더 화를 내야 하는데 곧 쓰러질 것만 같은 모습에 걱정이 앞섰다.
“괜찮아? 숨 쉴 수 있어? 아직 심장 뛰고 있지?”
고개를 푹 숙인 탓에 크로버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난 가까이 다가가 크로버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을 봐야 괜찮은지 아닌지 확인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일순간 그가 고개를 휙 들어 올리며 내 팔목을 붙잡았다.
“당연히 괜찮습니다. 아주 멀쩡해요.”
뭐야, 지금 날 속인 건가?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이 나오나요?”
날 속인 게 무척 흐뭇한지 한껏 솟은 양 볼에는 만족스러운 빛이 돌고 있었다.
“이렇게 해야 녹시아 님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델에게 연락을 받고 여기 오신 거 아니신가요?”
제델이라면 예지의 신관을 모신다고 했던 그 꼬맹이였다. 난 고개를 저었다.
“제델을 언제 보냈길래? 난 오전에 티파티가 있어 아침 일찍 저택을 나왔는걸.”
“이런….”
그 표정을 보니 설명하지 않아도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는 당신도 보아하니 내 연락을 받고 여기로 온 건 아닌 것 같고….”
“녹시아 님께서도 제게 연락을 주셨습니까?”
“그래요.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난 팔목을 살짝 비틀며 내 손목을 잡고 있던 크로버의 손을 되려 꽉 움켜잡았다.
“대체 왜 죽는다고 한 거죠? 설명해봐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아니 납득할 수 있도록!”
나도 모르게 또다시 목소리가 커졌다.
“저 안 죽습니다. 죽으려고 생각한 적도 없고요. 오해십니다”
분명 필사적으로 반박하는 것 같은데 왜 이리 즐거워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승천한 광대뼈는 아직도 내려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루안이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요? 그 애가 뭐하러 거짓말을 했겠어요?”
“거짓말이 아니라, 녹시아 님께 제대로 이야기를 못 한 거겠죠. 루안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들으셨죠?”
“자기 대신 크로버 씨가 죽으려 한다고…….”
“죽으려 한 게 아니라 죽은 척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즉 루안으로서 죽은 척을 하겠다는 뜻이었죠.”
“루안으로서 죽은 척을 한다? 그러고 보니 당신…….”
파마라도 한 것처럼 둥글게 말린 크로버의 머리에 손을 뻗었다. 검은색이 아니라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이었다.
“…… 루안으로 변장했군요?”
“허술하긴 하지만 어차피 놈들도 루안을 잘 알지는 못할 테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죠.”
“놈들이라뇨?”
“바렌시드에 온 공녀가 루안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위치가 발각된 것 같다고 하더군요. 이쪽이라면 안전할 줄 알았는데 제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루안이 화를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녀가 루안을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야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이 됐다.
“여기에 온 것도 딱히 예언을 받아서 온 건 아닌가 보네요?”
“예언이라. 그렇죠. 예언은 아니었죠.”
크로버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찌 된 일인지 요즘은 신께서 제게 예언을 잘 내려주시지 않는군요.”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별 시답지 않은 일을 다 예언으로 받더니만. 정작 중요한 순간엔 아무런 예지도 하지 못했다. 원래 게임에서도 카미앙의 연애사에 관한 예언만 했던 걸 생각하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누구와는 달리 설정에 충실한 캐릭터였다. 어쩌면 주인공인 카미앙을 사랑하는 바렌시드의 신께서 왕세자에게 반하는 일을 하려는 예지의 신관을 저버린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마저 일었다.
“죽으려는 생각은 요만큼도 없는 사람에게 죽으면 안 되느니 어쩌니 해서 민망하긴 한데, 그거 알아요? 당신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거.”
날 바라보는 크로버의 눈가에는 이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봄볕 같은 따스함이 어려있었다. 자신에게 닥친 위기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신관이어서 그런 건가? 너무 이타적인 삶을 살아와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마룬시에가 당신, 정확히 말하자면 크로버를 찾고 있어요. 당신이 예전부터 향료 길드에 관심이 많았던 것, 납치를 당해 감옥에 갇혀있다 탈출한 것까지 다 알고 있더라고요. 카미앙에게도 이야기를 했을 테니 정체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지 몰라요.”
말하고 보니 마음이 급했다. 마룬시에 한 명으로도 벅찬데 이 나라의 왕세자께서 몸소 크로버를 찾고 있다니.
“그러니까 얌전히 좀 있지 그랬어요. 모리아리티 백작이니 뭐니 그런 소리를 하며 파티에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아니지. 베르만의 제안을 거절하기만 했었어도 카미앙에게 그 얼굴을 각인시키진 않았을 거 아녜요.”
이제 와 해봤자 하등 쓸모없는 잔소리가 자꾸만 튀어 나갔다. 어쩌면 조급한 나와는 달리 너무나 태평해 보이는 크로버의 표정에 짜증이 난 걸지도 모르겠다.
“그건 아닐 겁니다. 제 얼굴은 한 번 본 이상 잊기 힘들어서.”
아까부터 혼자 봄볕에 있듯 얼굴에 따스한 바람이 분다 했더니만 머릿속에 꽃밭까지 키워낸 게 분명했다.
“좋아요.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죠. 루안으로 변장해서 어떻게 죽은 척할 거죠? 이번에도 이상한 소릴 하면 기절시킨 다음에 들쳐 업고 가버릴 거예요.”
“버리지 않고 업고 가주신다니, 괜찮은 선택지인데요?”
내 표정이 변하는 걸 알아챘는지 크로버는 얼른 뭔가를 들이밀었다.
“이겁니다. 제가 바람의 신관에게 간곡히 부탁해 어렵사리 공수해 온 최상급 성물! 옛날 성 기사들이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높은 신성력을 가진 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성물!”
지금까지 성물 앞에 이렇게 많은 설명이 붙은 적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람의 가호입니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자기 키의 다섯 배를 넘지 않는 높이에선 떨어져도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예상대로 엄청난 아이템이었다.
“그리고 저 언덕 끝….”
크로버의 설명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루안! 루안이 어떤 녀석이냐.”
여관의 출입문이 열리며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덕 끝으로 도망가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겁니다. 그럼 누가 봐도 죽었다고 생각하겠죠.”
놈들이 이렇게 일찍 도착할 찾아올 줄은 몰랐다. 크로버의 말이 빨라졌다.
“루안은 저쪽에서 청소하고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서 몸을 숨기십시오. 녹시아 님이 여기 계시면 곤란한 입장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맡은 역할을 하기 위해 크로버는 로비 쪽으로 걸어갔다.
‘곤란하다니.’
크로버는 내가 마룬시에의 의심을 받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나선다고 해서 더 나빠질 것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루안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크로버의 계획이 어긋나버린다. 이번 위기는 피한다 해도 루안 역시 계속해 마룬시에의 수하들에게서 도망 다녀야 할 터였다.
“그래, 네놈이 루안이란 말이지? 그런 짓을 하고도 잘도 살아있구나.”
목소리만으로도 어떤 사람일지 상상이 갔다. 분명 엄청난 덩치에 손 한번 휘두르면 크로버를 묵사발로 만들 수 있는 놈들일 테지.
“일단 한 대 맞으면 너도 생각이 달라질걸?”
“꺅!”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이 발목을 붙잡았다. 당장 쫓아가 놈들을 때려눕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참았다. 지금은 크로버의 계획을 따라야 할 때였다.
***
‘설마 늦진 않았겠지?’
난 언덕을 거슬러 올라가며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졌다.
원래는 언덕을 따라 내려간 후 크로버가 떨어질 법한 지점에서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녀석들이 크로버가 떨어지는 걸 그냥 지켜만 보고 있으리라는 법이 있나?’
떨어지기 전에 칼로 찌른다든지 떨어지는 사람을 향해 단도를 날린다든지. 아니면 떨어진 사람 위로 돌덩이나 나무 등을 던져 좀 더 확실히 일을 처리할 수도 있었다.
지나친 걱정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수도 없이 봐온 장면이었다.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
제아무리 신성력이 높고 엄청난 성물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는 신관이었다. 어떤 식으로 죽고 죽이는지 제대로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난 방향을 바꿨다. 그가 태평하게 보인다고 나까지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을 몇 번이나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여기서 당신들에게 죽나 살아남아 베르만님께 죽나 난 어차피 똑같단 말이야!”
멀리서 크로버의 외침이 들려왔다. 칼을 든 두 명의 거구 앞에서 맨손으로 소리치는 크로버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애처로웠다.
그 와중에도 크로버는 바르하르트 후작가의 명을 받고 숨어든 첩자인 척 연기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정말이지 제게 다친 위기는 바보스러울 만큼 깨닫지 못하는 신관님이었다.
“뛰어내리겠어!”
크로버는 알지 못했다. 검이라는 게 얼마나 빠르게 사람을 벨 수 있는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다고 해서 검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것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미 늦은 것이었다. 검이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움직임을 읽어야 했다.
퍽.
내가 던진 단도는 정확히 사내의 목 뒤에 꽂혔다. 크로버의 배를 쑤시려던 녀석은 외마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대로 고꾸라졌다.
“마룬시에 님이 이쪽에 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남은 한 놈의 시선을 돌리고 싶었다. 내가 크로버의 곁으로 달려갈 시간을 벌고 싶었다.
하지만 녀석은 노련했다. 크로버를 납치했던 녀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녀석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동시에 붉은 피가 뿜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