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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70화 (70/95)

70

“역시 공녀님과 무슨 일이 있으신 거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헤슬루의 협조를 구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의심받고 있는 것 같아요. 쇼하트 농장 사건과 관련해서요.”

“진짜 웃기는 여자네!”

말을 내뱉고는 자신도 놀랐다는 듯 헤슬루는 얼른 입을 가렸다. 그렇게 하면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는 슬쩍 내 눈치를 봤다.

간만에 남의 입으로 들은 속 시원한 소리였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 신호에 안도와 뿌듯함의 웃음을 지으며 헤슬루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우아한 레이디의 화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기사님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요.”

난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대충 쪽지를 휘갈겼다. 예지의 신관으로 있을 그에게 전하는 쪽지였다.

지금 그가 예지의 신관으로서 신전에 있을지 크로버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번거롭다 해도 양쪽 모두에게 연락을 시도해야 했다.

‘핸드폰처럼 연락을 주고받는 성물은 없는 건가.’

게임 속에 들어온 이후 핸드폰의 부재가 이토록 아쉬웠던 적이 없었다.

난 편지를 헤슬루에게 건넸다.

“이걸 근위대의 다리스 대장에게 드리면서 예지의 신관님께 급히 전달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가능한 남들 눈에 띄지 않게요.”

카미앙의 신하인 다리스를 이 일에 끌어들이는 게 맞나 싶었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다리스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그가 신전에 가는 건 카미앙의 명령처럼 보이기도 쉬웠다.

‘카미앙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알면 다리스도 카미앙에 대한 평가가 바뀔지도 모르고 말이지.’

말투가 심각했던 건지 그 내용이 심상치 않았던 건지 헤슬루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자신의 임무를 몇 번 되뇌더니 심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다리스 대장에게 예지의 신관님께…. 그렇다면 그냥 제가 예지의 신관님께 가져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럴 순 없었다. 나와 헤어지자마자 신전으로 향하는 헤슬루라니. 그건 누가 봐도 의심할 만했다. 마룬시에의 감시자는 나뿐만이 아니라 헤슬루도 주목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건 안 돼요. 영애에게도 미행이 붙을 가능성이 크거든요.”

헤슬루의 표정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호감 가는 근위대장을 만나러 온 귀족 영애처럼 행동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여기서 헤어지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헤슬루와 난 전쟁터에서 헤어지는 전우처럼 비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예지의 신관에겐 편지를 보냈으니 이제 난 시가지 어딘가에 있을 크로버를 찾아야 했다.

‘역시, 감시자가 있었군.’

헤슬루의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따라붙는 그림자를 눈치챌 수 있었다. 마룬시에가 언제부터 날 의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의심이 시작된 순간부터 아마 저들은 내게 붙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알아채지 못한 척 자연스럽게 ‘오후의 수다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로버가 그곳에 있다면 있는 대로 없다면 없는 대로 할 일이 있었다.

***

“어이구, 오랜만이네. 설마 지금 그거 다 땀인겨? 날씨가 덥나 왜 그리 땀을 흘렸데.”

땀? 그제야 이마에서 땀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카페 주인은 앞치마를 들어 올려 내 이마를 훔쳤다.

“혹시 크로버 여기 안 왔어요?”

나는 날 따라 카페 한구석에 자리 잡은 감시자들을 의식하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 녀석이 여기 왔으면 카페가 이렇게 조용할 리 없지. 왜, 약속이라도 했어?”

“그런 건 아니지만. 만약에 크로버가 오면 불꽃이 터지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주세요. 밤늦게라도 상관없다고요”

평소 같았으면 ‘밤늦게’라는 말에 꽂혀 이상한 드립이라도 쳤겠지만, 분위기를 파악한 주인은 열심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오후의 수다 카페를 뒤로하고 난 시가지 곳곳을 돌아다녔다. 잡화점이나 레스토랑, 분수대가 있는 광장 심지어 향수 가게까지. 크로버와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같이 갔던 곳은 모두 돌았다.

‘이쯤이면…. 저자들도 지칠 때가 되지 않았나?’

난 내 뒤에 따라붙은 감시자들을 확인했다. 셋이었던 것이 둘로 줄어 있었다.

‘그래, 이 정도 돌아다녔으면 적어도 크로버가 여기 중 한 군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겠지.’

부디 그러길 바랐다. 마룬시에에게 협박을 받는 내가 크로버를 걱정해 그를 찾아 여기저기 헤맨 것으로 보였으면 했다. 그래서 크로버가 이 시가지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랐다.

‘그렇게 얄팍한 수에는 안 넘어갈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지. 이번만은 좀 속아주라.’

마룬시에가 크로버를 의심하며 그가 모리아리티 백작이라는 것까지는 알아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을 찾아낸다고 해서 그것이 크로버를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한 방은 되지 못했다. 어차피 다 거짓말이니 말이다.

하지만 크로버가 예지의 신관이라는 것을 들키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야말로 게임 끝이었다.

‘어쩌면 이런 날을 위해 크로버가 그동안 착실히 카미앙을 도와온 것도 이런 날이 올 것을 예지하고 그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 잠깐만.’

크로버는 예지의 신관이었다. 지금까지 제대로 예지하는 거라고는 카미앙에 관련된 일밖에 없다고 비웃었다.

만일 내가 아는 미래가 카미앙에 관련된 것뿐이어서 그렇게 보였던 거라면? 지금까지 나와 함께했던 많은 일을 그는 전부 알고 있던 거라면?

어쩌면 이번에도 그럴지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샘솟았다. 난 무작정 바렌시드의 뒷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게임 개발사의 일원이었던 나조차도 헷갈렸던 길이었다.

지금이야 라라벨이 알려준 팁 덕분에 헤맬 일 없다지만 마룬시에의 수하들은 어떨까? 막다른 길인 것 같은 골목에 사람 하나 정도가 몸을 숨길 수 있는 가려진 공간이 있다는 것까지는 모르지 않을까?

내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자 녀석들이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로 간 거지?”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난 왔던 길을 되짚어 볼 테니 넌 이곳을 조사하도록.”

다른 쪽을 살펴보겠다고 떠난 녀석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곳에 남은 녀석은 한 평 남짓한 벽돌 틈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감시자를 떼어낸 나는 크로버와 불꽃놀이를 봤던 장소로 달려갔다.

전장에서도 촌각을 다투는 일은 많았다. 자칫하다간 우리 군사들이 전멸할 수도 있었고 간발의 차이로 눈사태를 피한 적도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안절부절못했던가?’

늘 나는 것처럼 빠르다고 느꼈던 몸뚱이가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깃털처럼 가벼웠던 다리가 이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잘 될 거란 생각만 하자. 다 잘 될 거야.’

운이 좋아 가게 주인들에게 소식을 들었다면 크로버를 그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크로버가 정말 영험한 신관이라 오늘 일을 예지했다 해도 그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크로버가 말했던 여관의 입구에서 잠시 서성였다. 하지만 크로버라면 역시 지난번에 있던 곳으로 오지 않을까 싶었다. 건물 뒤로 돌아 언덕을 따라 올라갔다.

일전에 올라탔던 나무까지 가기도 전에 한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크로버의 이름을 외칠 뻔했지만, 곧 크로버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곳에 남자가 있단 사실만으로 크로버라 생각했지만 누가 봐도 생김새가 달랐다.

‘설마, 적?’

허리춤에 숨긴 단도에 손을 가져갔다. 날 미행하던 녀석에게서 빼앗은 물건이었다. 상대가 먼저 이쪽을 돌아본 탓에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루안? 여기서 뭘 하고 있어?”

이 여관에서 일한다고 들었던 라라벨의 동생이었다.

“기사님, 정말 오셨군요.”

내가 올 줄 알았다는 듯한 루안의 반응에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크로버 씨께서 기사님이 이쪽으로 오시면 말을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크로버는? 크로버는 어디 있는데?”

내가 지금 확인하고 싶은 건 크로버의 전언이 아니라 그의 모습이었다.

“분명 그렇게 물어보실 테니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질문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제 와서 천 리를 내다보는 도사 흉내라도 내겠다는 건가. 루안의 태도가 완강했기에 일단 전언을 먼저 듣는 수밖엔 없었다.

“첫 번째는 선물로 준 목걸이를 기사님이 잘하고 계셨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게 길잡이가 되어줄 거라고.”

그거라면 전에도 한 번 들었던 이야기였다. 불꽃놀이가 있던 날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늘 몸에 지니고 있으라며 설명했다.

‘이래 봬도 이건 성물입니다. 어떤 기능이 있냐고요? 녹시아 님께서 길을 잃지 않으시게 도와줄 수 있는 물건이죠.’

내가 어린아이냐고 화를 냈었다. 시가지가 복잡하다고 말했던 적이 있긴 해 이런 선물을 준비했나 싶었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낸단 말인가?

‘길잡이라는 게…. 혹시 신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라던가 하는걸 뜻하진 않겠지?’

방정맞은 생각이지만 크로버가 남긴 전언이 자꾸 안 좋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

루안이 머뭇거렸다.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자 한층 더 불안해졌다.

“왜? 또 무슨 말을 했는데?”

“저기 그게…. 크로버 씨가 일단 저 대신 죽긴 하겠지만 절대 놀라지 말라고….”

“주, 죽어? 죽는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나도 모르게 루안의 옷섶을 잡고 흔들어댔다.

“크로버가 어디 있는지 빨리 말해! 저 안에 있는 거야? 맞지?”

루안의 고개가 끄덕거리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난 그를 내팽개치고 언덕 아래로 달려갔다. 낙엽과 풀이 눈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 위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주위를 둘러보자 부엌이나 다용도실로 통하는 것 같은 작은 문이 눈에 들어왔다.

‘잠겨있어?’

세게 흔들어 보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몸을 뒤로 빼고 다리를 높게 들었다가 발바닥 전체로 문을 걷어차 버렸다. 요란 맞은 소리와 함께 문이 반쯤 뜯겨 나갔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 누구시오?”

여관 주인인지 직원인지 모를 남자가 어깨를 잡으며 날 막아섰다.

“여관에 수상한 자들의 침입이 있었나요? 아니면 실종된 직원이 있다든지.”

“당신이 가장 수상한 자요!”

남자는 겁먹은 표정으로 소리쳤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마룬시에의 부하와 한통속이 되어 날 속이는 날 속이는 걸지 몰랐다.

스킬을 사용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난 그를 밀쳐내며 복도로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크로버란 이름을 목놓아 외치고 싶었지만 지금 그가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 알 수 없었다.

만일 마룬시에의 수하와 대치하고 있다면, 긴장감 가득한 곳에서 크로버가 숨죽이고 숨어있다면, 난 되려 그를 위험해 빠뜨리는 셈이 된다.

여러 사람을 빠르게 훑으며 여관을 헤집었다. 하지만 크로버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벌써 잡혀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때였다.

“녹시아 님.”

어느 틈엔가 세상에서 가장 친숙하게 들리게 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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