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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68화 (6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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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꼭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크로버 납치사건. 크로버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납치된 것이 아니라 수행을 다녀왔던 것처럼 위장했었지만 어쨌든 내가 구한 사람이었다.

‘마룬시에가 크로버를 알고 있어?’

생각해보니 그럴 만했다. 납치를 했던 게 향료 길드였으니 마룬시에도 크로버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을 터였다.

‘크로버라고 추측할 만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길 기다리는 건가? 나와 크로버가 연관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처럼 이건 그냥 내 지레짐작일지 몰랐다. 일단 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혹시 사람을 몇 명 이상 구한 자에게 바이난 공국에서 주는 상이라도 있나요?”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죠.”

“좋네요. 바렌시드엔 그런 좋은 제도가 없거든요. 앞으로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후후, 우리 기사님이 이렇게 유머 감각이 있으시답니다.”

이, 이 정도로 유머 감각이라고 하니 민망하긴 한데. 나는 헤슬루의 말이 맞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덕분에 분위기가 썰렁해졌는데?”

단 한마디도 지고 싶지 않아 하는 건 게임에서와 똑같았다. 덕분에 마룬시에와 루티시나가 만나면 살벌한 설전이 일어나곤 했었다.

‘지금 와서야 다 쓸모없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트릴 겸 선물 수여식을 해볼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멀찍이 서 있던 시녀가 작은 가방을 들고 왔다.

“여러분들에게 줄 선물을 가져왔어.”

“선물이라니? 대체 뭘까요?”

“공녀님께 받는 거라면 뭐든 특별하지 않을까요.”

마룬시에는 분위기를 주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 마룬시에가 들고 있는 유리병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는 영애들이라면 앙루민 향수 정도는 이미 써봤겠죠?”

앙루민보다 훨씬 작고 앙증맞은 모양새였다. 뭔지 모를 작은 보석들이 뚜껑에 촘촘히 박혀 빛을 내고 있었다.

“이건 이번에 향료 길드에서 새로운 레시피로 개발한 제품이에요. 여러분들이 마음에 들어 한다면 내년 봄 유행 제품으로 밀고 싶어서.”

그야말로 신상 중의 신상이었다. 최신 트렌드에 관심이 많은 영애에게 이 선물은 그 무엇보다 값진 것 일터였다. 황제의 서신이라도 받아드는 듯한 자세와 반쯤 벌어진 입이 그걸 반증했다.

“향을 한번 맡아봐요. 영애들의 의견이 듣고 싶어.”

순간 향수병에 담긴 액체가 하늘색이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앙루민도 하늘색이었지만 앙루민의 카피 제품 또한 같은 색이었다.

‘설마…. 그 카피 제품을 들고 온 건 아니겠지?’

이 자리에 있는 영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가는 공녀라 해도 그 여파를 당해내기는 어려울 터였다. 게다가 카피 제품에 중독 성분이 있다고는 해도 단 한 번의 시향만으로 신체적인 증상을 유발하진 않았다.

‘내가 지나친 생각을 한 것….’

그때 마룬시에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그녀는 향수병을 흔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야, 저 태도는.’

순간 심장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아니야. 저건 도발이야. 동요해선 안 돼.’

마룬시에라고 해서 내가 생각한 것을 예측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저 미소는 그저 날 시험해보기 위한 게 확실했다. 과연 이 향수를 보고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말이다.

“특히 모도루 영애의 의견이 궁금한데.”

마룬시에는 내게 흔들어 보이던 향수병을 헤슬루에게 건넸다.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다른 것에 비해 보랏빛이 도는 물건이었다.

카피 향수 공장에서 쇼하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맛단열매유가 많이 들어가게 되면 아무래도 원본보다 붉은빛을 띠게 되더군요. 꼭 보라색처럼 보이게 말이죠. 예? 그게 많이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줄 기억하냐고요? 그렇게 기본적인 걸 물어보시면 이 쇼하트가 서운합니다. 구토를 유발하고 이십사 시간 내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하시질 않았습니까.’

원래 향수보다 붉은빛을 띤 향수. 왜 하필 저 보랏빛 향수를 헤슬루의 손에 쥐여준 거지? 아무 의미 없는 그저 내 과민반응일 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 나 보란 듯 향수병을 흔들지 않았던가.

‘이건 카피 향수가 아니라 분명 신제품이라고 했잖아, 그치? 그냥 평범한 향수라고. 이건 내가 카피 제품의 비밀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 시험해보려는 함정….’

“안돼! 헤슬루!”

향수 뚜껑을 여는 헤슬루를 보는 순간 마룬시에의 도발인 걸 알면서도 반응하고 말았다. 헤슬루가 들고 있던 향수를 낚아채 버린 것이었다.

“꺄아! 기, 기사님?”

“깜짝이야. 무슨 일이죠? 모도루 영애?”

해명해야 했다. 머뭇거리면 의혹만 키울 뿐이었다. 급한 마음에 스킬을 시전했다.

“뚜껑이 잘 열리지 않는 것 같아서 제가 열어드리려고요. 이렇게 보석이 알알이 박혀있으니 우리 헤슬루 양의 손바닥을 찌르지 않겠어요.”

“아아, 그러셨구나.”

이 거짓말에 헤슬루와 티파티 친구들은 감동한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마룬시에는? 내가 카피 향수를 떠올리고 놀랐다는 것을 간파했을까?

“어머, 정말 세심하고 든든한 기사님이네. 나도 저런 기사 하나 둘까 봐.”

날 향하는 마룬시에의 목소리엔 조롱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든든한 기사님이란 소리도 들었겠다 나는 계속 그 컨셉을 유지하기로 했다. 향수 뚜껑을 마저 열어 코 아래에 가져갔다.

“아직 세심하다는 소리를 듣기는 이르죠. 모도루 영애 대신 제가 시향을 해봐야겠어요. 우리 섬세한 헤슬루 양은 향에도 민감하거든요. 너무 낯선 향이거나 강한 향이면 두통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어요?”

평범한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 전해져왔다. 이 향수 안에도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앙루민의 향은 아니었다.

“여기 계신 영애들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상큼한 향이네요. 모도루 영애가 시향 해봐도 별문제가 없겠군요.”

마룬시에는 그런 내 행동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영리해 보이는 눈동자로 내 행동을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뻔뻔하게도 연기를 한다고? 아니면 궁지에 몰린 꼴이 우습다고? 행여라도 기사 놀이에 심취한 영애로 봐주진 않을까?

“그런데 왜 공녀님께서 향료 길드의 신제품을 나눠주시는 거죠?”

그때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다.

“그거야 마룬시에 공녀님께서 향료 길드의 수장이기 때문 아니겠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고개를 돌리자 이곳에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우아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의자를 든 하인을 동행한 채로 말이다.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네요.”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그다지 미안할 게 없어 보이는 그녀는 하인이 세팅한 의자에 앉았다.

“바르하르트 영애? 여, 여긴 어쩐 일이세요?”

주최자인 피리스 영애마저 놀라는 것을 보니 예정된 방문이 아닌 게 확실했다.

“초대받지도 않은 티파티에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오늘 이곳에 아주 귀한 분이 오신다고 하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말이죠. 부디 이 무례를 용서해 주시죠.”

그렇게까지 말하는 루티시나를 쫓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를 노리고 여기 찾아온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루티시나의 안중에 나는 없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바라보고 있는 건 오로지 마룬시에 뿐이었다.

입술을 꾹 누르며 삐져나오려는 미소를 감췄다. 아무래도 내가 준비한 폭탄이 생각보다 더 좋은 패를 모셔온 것 같았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나누세요. 향수 길드의 수장으로 신제품을 들고 온 공녀님께 다들 궁금한 게 많으시지 않나요?”

다들 마룬시에와 루티시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긴 이렇게 튀는 스파크도 감지 못한다면 장차 사교계에서 살아가기 힘들 터였다.

두 사람은 게임에서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바렌시드의 귀족들은 친바이난파와 반바이난파로 나뉘었는데 바르하르트 후작은 강경한 반바이난파였다. 그러니 루티시나가 바이난의 공녀인 마룬시에를 좋아할 리 없었다.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서도 둘은 성격 자체가 맞지 않았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높고 자기주장이 강한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부딪칠 뿐이었다.

어쩌다 루티시나와 마룬시에 중 한 명을 골라야 하는 선택지라도 발생하면 한쪽의 호감도가 바닥까지 내려가는 건 감수해야 했다.

“그럼 공녀님은 신제품 홍보를 위해 바렌시드에 오신 건가요?”

분위기를 띄워보고자 하는 피리스 영애의 노력이 엿보였다.

“마침 왕실에서 초대도 있었고. 겸사겸사해서 왔죠.”

애매한 마룬시에의 대답에 루티시나가 바로 반박했다.

“어머나, 제가 알기론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던데요?”

“내 일정을 바르하르트 영애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사회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모를 수가 없는 이슈라서 말이죠. 향수 재료를 공급하는 농장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요? 그 일을 수습하러 오셨을 텐데요.”

“바렌시드에 향료 길드의 농장이 있었나요?”

헤슬루의 질문에 루티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죠. 사실 문제가 있는 건 그 안에 있던 공장인 것 같지만요.”

“그런 일이 있었어?”

“난 마부한테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상심이 크시겠어요.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해야 하려나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마룬시에에게로 향했다.

“바르하르트 영애의 말이 맞긴 해.”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이 자신의 농장을 어떤 놈들이 망쳐놓아 범인을 잡으려고 한다 따위의 말을 늘어놓으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룬시에가 입을 열기 전에 루티시나가 말문을 막았다.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니…. 글쎄요. 그렇게 떳떳하지는 못하실걸요.”

까닥까닥하던 마룬시에의 고개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뚝 멈췄다. 그런 마룬시에의 반응 따위는 알 바 없다는 듯 루티시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 안에 있던 공장이 알고 보니…. 불법 향수! 제조처였다네요.”

“불법 향수요?”

“앙루민 향수의 카피 제품을 만들던 곳이었데요. 앙루민이 귀족들에게 인기가 좋으니 대충 그 향을 흉내 내 시민들에게 좀 더 싼 값에 팔았던 거죠.”

“어머나, 말로만 듣던 카피 제품이 정말 있었단 말씀이세요?”

불법이니 카피 제품과 같은 말은 어린 영애들에게 꽤 자극적인 단어였다. 동요하는 이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루티시나가 테이블에 갈색 종이를 내려놓았다.

내가 열심히 준비한 폭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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