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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슬루의 눈이 저렇게 반짝거리는 걸 보니 꽤 흥미로운 소식인 게 확실했다. 물론 나도 관심이 갈 만한 뉴스인지는 들어봐야 아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헤슬루가 엄청난 뉴스라며 쫓아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중 대부분은 양장점에 새로 들어온 옷감이나 어떤 영애가 누구와 연애를 한다와 같은 내용이었다.
‘어찌 됐든 덕분에 머릿속에서 크로버를 좀 밀어낼 수 있겠군.’
난 몹시 궁금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리며 헤슬루를 바라보았다.
“내일 모래 있을 저희 티파티에 바이난 공국의 마룬시에 공녀님께서 참석하신대요!”
“마룬시에?”
헤슬루는 내가 그 이름을 잘 모를 거로 생각했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바이난 공국의 첫째 공녀님이요. 아주 가끔 왕궁에 들리시는 적은 있었는데 이렇게 바렌시드의 영애들과 모임을 갖는 건 처음이랍니다! 왕비님이나 바르하르트 후작 영애가 여는 다과회가 아닌 저희 티파티에 처음으로 참석을 하신다니…. 다들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답니다.”
“…대박.”
이번에는 헤슬루가 맞았다. 정말 엄청난 뉴스였다.
“네?”
“아뇨, 너무 놀랐다는 뜻이에요. 진짜냐고 다시 물어보고 싶을 정도네요.”
헤슬루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네에, 정말이랍니다. 어제 피리스 영애 앞으로 기별이 왔다지 뭐에요.”
헤슬루는 나지막이 ‘꺄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양 볼을 손으로 감쌌다.
“공국의 공녀님께 서신을 받다니, 너무 멋지지 않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소녀인 후작 영애였다. 이웃 나라의 공녀에게서 온 서신은 충분히 가슴이 설렐 일이었다. 그 내용이 티파티에 함께 참석하고 싶다는 거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헤슬루의 티파티지?’
아직 어린 영애들의 모임이었다. 이 또래의 공주나 공작가의 여식이 있어 함께 어울리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바렌시드에서의 첫 사교활동으로 헤슬루의 티파티를 선택했다? 아무런 의도도 없는 선택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설마 내가 헤슬루와 가까운 관계인 것을 알고 이 티파티를 선택해 내게 접근하려고 한 건….’
평소였다면 자의식 과잉이라고 피식거리며 넘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무려 ‘흑막’으로 평가받는 마룬시에였다. 흑막이 괜히 흑막이겠는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와 같은 태평한 소리는 흑막에 어울리지 않았다.
“기사님, 어때요? 기사님도 내일 같이 가시겠어요?”
마룬시에가 기대했을지 모를 요청이었다. 만일 내가 쇼하트의 공장 사건과 관계가 없다면 헤슬루와의 순수한 친분만으로 티파티에 참여할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쇼하트 공장 사건의 범인이라면 마룬시에가 참석하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역시 피해갈 수는 없지.’
“물론이죠. 바이난 공국의 공녀님을 뵙다니, 정말 영광이네요.”
마룬시에의 계획대로라고 해도 나 역시 그녀를 한 번쯤 보고 싶었다. 원작에서 얼마나 달라진 건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바렌시드에 마수를 뻗치는 건지 직접 만나 알아보고 싶었다.
만난다 한들 무슨 수가 있을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겐 스킬이 있었다.
***
“반가워요. 바이난 공국의 마룬시에입니다.”
“어서 오세요. 피리스 후작가를 비롯한 바렌시드의 귀족가에서는 공녀님의 방문을 환영한답니다.”
흑단 같은 긴 머리를 말아 올리고 모자를 얹어 마무리한 헤어스타일, 안경 너머에서 영리하게 주변을 살피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 겉모습만큼은 내가 알고 있는 마룬시에 그대로였다. 게임에서 늘 입고 있었던 하늘색 원피스까지 입고 있는 탓에 더욱더 그러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여섯 명의 영애와 차례차례 통성명하던 마룬시에가 마침내 날 바라보았다.
“반가워요. 파르미엔 백작가의 녹시아라고 합니다.”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살짝 까딱인 것까지는 다른 영애를 대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청순해 보이는 외양은 게임 일러스트와 똑같아 혹 내가 오해하고 있던 건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 쪽분만 어째 나이가 좀 있으시네. 기분 나쁜 건 아니죠? 나랑 나이가 비슷해 보여 반갑다는 뜻이에요.”
갑작스러운 마룬시에의 시비로 난 착각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말싸움을 걸겠다는 태도였다.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가 없었다. 존댓말인지 반말을 하는 건지 확실치 않은 말투 하며 처음 보는 자리에서 나이를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 것이 그랬다.
‘하지만 난 이런 건 벌써 루티시나에게 많이 당했다고.’
별 타격 없는 선제공격이었지만 나 역시 그녀를 향해 날을 세울지는 생각해 볼 문제였다. 날 떠보려고 이러는 건지 아니면….
“파르미엔 기사님은 제가 초대했답니다. 저희같이 어린 영애들만 있으면 공녀님께서 따분하지 않겠어요?”
내가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헤슬루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난번 이런 자리가 어색하다며 먼저 자리를 뜬 나를 위한 배려인 것 같았다.
“어머, 그런가요. 안 그래도 귀여운 영애들만 잔뜩 있어 좀 부담스러웠는데 잘됐네.”
“귀여운 영애들에 멋진 기사님에 청순하신 공녀님까지 있으니 정말 멋진 티파티가 될 거로 생각한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헤슬루가 주변을 돌아보며 대답을 유도하자 다들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냥 어리게만 봤던 헤슬루에게 이런 재치가 있을 줄 몰랐다. 헤슬루가 이렇게까지 나섰는데 내가 깽판을 칠 수는 없었다. 난 그동안 배웠던 귀족 영애의 예법대로 대화를 이어갔다.
“모도루 백작 영애의 초대로 공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네요. 앉으시죠.”
다행히 마룬시에도 더는 시비를 걸 생각은 없는 듯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러고는 마치 나 대신이라는 듯 테이블 위를 덮은 하얀 장식보에 관심을 보였다.
“어머나, 이 장식 좀 봐. 정말 예쁜데요? 대체 어떻게 하신 거죠?”
마룬시에의 탄성으로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 해졌다. 피리스 영애는 레이스 사이에 꽃을 끼워 넣는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곧 이런 레이스는 어느 가게가 잘한다는 등 꽃은 어떤 것을 써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이 작은 테이블보로 이토록이나 풍성한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난 스킬을 시전했다.
마룬시에가 나에 대한 관심을 잠시 접어두고 다른 영애들과의 대화에 몰두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왔는지 낱낱이 파헤쳐주마.
“……!”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고? 왜?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다시 스킬을 시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아니, 대체 왜? 마룬시에가 흑막이라며. 흑막에게 사용 못 하면 스킬을 어디다 써먹으라고? 게다가 나 이제 파르미엔의 기사님이라고!’
“기사님? 어디 불편하시기라도 한가요? 표정이 안 좋으세요.”
엔터 버튼을 연타하는 기분으로 스킬을 시도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험악한 표정이 되었나 보다.
“아뇨, 제가 잘 모르는 분야이다 보니. 그저 영애들의 말씀을 재미있게 듣고 있었지요.”
세상 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지만 지금 난 몹시 불편한 상황이었다. 마룬시에에게 스킬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난이도가 단숨에 상승해 버린다.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아는 사람처럼 마룬시에가 말했다.
“그러네? 우리끼리 너무 재밌게 떠들고 있던 건가? 파르미엔 기사님, 재밌는 이야기 좀 해주세요. 기사님은 저희가 모르는 세상을 많이 알고 계시잖아요?”
그새 작전을 바꾼 건지 헤슬루를 따라 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덕분에 모두의 기대 어린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티파티의 입담꾼 타이틀 같은 게 아니라, 생각할 시간이었다. 모두의 관심은 반갑지 않았다.
“전쟁 얘기보다야 학문적이고 자유로운 바이난 공국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지 않겠어요? 듣자 하니 남녀가 함께 공부하는 아카데미도 있다죠?”
바이난 공국은 바렌시드보다 좀 더 현대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특히나 아카데미는 헤슬루 나이대의 귀족들이 공부하는 곳이기에 모인 영애들에게도 큰 관심사일 터였다. 피비린내 나고 땀내 나는 전쟁터 뒷이야기보단 이쪽이 훨씬 재밌을 게 뻔했다.
‘일단 관심은 다시 마룬시에에게 돌려놨지만…. 대체 왜 마케터의 혜안 스킬이 통하지 않는 거지?’
흑막이라 내 목표 달성을 방해하기 위해? 바이난 공국의 사람이라? 그냥 시스템 마음인가? 크로버 때도 밝히지 못한 이유였다. 이쪽이라고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번엔 파르미엔 기사님의 이야기를 듣자. 난 파르미엔 기사님이 정말 궁금했거든.”
그 사이 아카데미 이야기는 벌써 끝난 모양이었다. 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켜 보였다.
“제가 궁금하셨다고요?”
“네, 무척이나.”
마룬시에의 의미심장한 눈빛이 나를 쏘아보았다. 맨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아무래도 선전포고가 확실한데 어느 쪽 선전포고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같은 공략 캐릭터로서 카미앙을 사이에 두고 암투라도 벌이려는 건지 아니면 공장을 망가트린 범인을 응징해 주겠다는 건지.
“어떤 소문을 들으셨길래.”
“저 먼 북쪽에서 오신 기사님이 사람들을 구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바이난을 떠들썩하게 했었어. 무슨 영웅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청나던데?”
마룬시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헤슬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영웅담이라는 단어가 헤슬루의 시동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거라면 이 헤슬루가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답니다. 우리 기사님께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바로 저, 헤슬루거든요. 그러니까 그날은 축일을 맞이해 모두가 대 신전에 모인 날이었답니다.”
“왕세자님께서 처음으로 공식 행사에 참석하신 날이기도 했어요!”
“전 두 눈으로도 보고 있으면서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지요.”
다들 그 현장에 있던 영애들이었는지 여기저기서 증언이 튀어나왔다. 단연 신난 건 헤슬루였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데요? 그럼 혹시 기사님이 구해준 다른 사람이….”
“왕세자님이요!”
“바렌시드 극장의 프리마돈나라고 불리는 라라벨 양이 있답니다.”
“이야, 정말 대단한데.”
하지만 마룬시에는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았다.
“또 다른 사람 없나요? 좀 더 평범한 가계 주인이라든지….”
“가게 주인이요?”
“아니면 여기저기 떠도는 행상인이라든지….”
이쯤 되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룬시에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달리 찾는 대상이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내가 누굴 구했길 바라는 거지? 헤슬루도 라라벨도 아닌 내가 구해줬던 사람이 달리 있다면….
‘크로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