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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알겠군. 왜 녹시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카미앙은 별안간 떠오른 이 단서가 매우 만족스러웠다.
“녹시아가 원했던 건 나와의 관계를 공론화하는 일이었어.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내 약혼녀라는 것을 밝히고 싶어 했지. 그런데 이번에도 단둘만이 있는 곳에서 일을 진행했으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야.”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카미앙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거야 모든 여자가 바라는 바 아니겠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약혼녀라고 나서고 싶겠지. 당신 약혼녀도 들었던 것보다 야망이 있었네.”
검은 머리에 자그마한 체구. 왕세자인 카미앙 앞에서도 서슴없는 태도. 바이난 공국의 공녀, 마룬시에였다.
“아니, 녹시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야망이라니. 공녀가 녹시아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지금까지 카미앙이 했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는 차인 게 확실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몇 번이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돌려서 까인 적도 있었고 최근에는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대차게 까이기도 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 여자가 아직 자기를 좋아한다고 믿는 거야?’
마룬시에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었다. 카미앙은 녹시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 명제로 정한 채 ‘그런데 왜 그랬을까?’를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저렇게 무리한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다시 한마디 할까 싶었지만 제 힘으로는 저 멍청이를 정상으로 돌려놓을 방도가 없었다.
‘덕분에 아나드에서 승리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파르미엔의 기사가 카미앙에게 푹 빠진 덕분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승리를 얻어냈다.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푹 빠진 건 그쪽이 아니라 카미앙이 아닌가 싶었다.
‘전장 이야기만 들었을 땐 웬 멍청이인가 했더니 지금 하는 걸 보면 그렇게 바보는 아닌 것 같고.’
마룬시에는 카미앙의 책상에 놓인 책 중 하나를 펼쳤다. 카미앙의 말만 듣고 있기엔 그 이야기가 너무 지루했다.
“파르미엔 백작가의 녹시아와 내가 약혼을 한 사이라는 걸 신문에다 먼저 발표를 해야겠군. 왕실 어른들의 허락을 기다리다간 녹시아가 그놈에게 갈지도 모르니.”
“그놈이라니? 약혼녀한테 다른 남자도 있어?”
“꼬리치는 놈이 한 명 있지. 혹시 알고 있나? 동 아그니안 제국에서 온 모리아리티 백작이라고 하더군.”
“멀리서도 왔네.”
마룬시에는 책장을 넘기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분명 여자들이나 꼬시면서 돌아다니는 바람둥이겠지. 하는 행동이 보통이 아니야. 숨 쉬는 것조차도 어떻게 하면 여자의 마음을 홀릴 수 있을까 계산해서 하는 것 같더군.”
아무래도 이러다간 약혼녀의 애인에 대한 험담이 시작될 것 같았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마룬시에가 본론을 꺼냈다.
“그것보다. 쇼하트 자작의 공장에 왔던 녀석들 말이야.”
그와 동시에 두꺼운 지리책을 탁, 덮었다. 제법 큰 소리가 집무실에 울렸다. 그제야 카미앙은 마룬시에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향수 공장을 초토화한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는 게 생각났다.
“아, 공녀로 변장을 하고 자작을 속였다는 사람들 말인가? 아무래도 바르하르트 후작가에서 보낸 사람 같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바르트 신문사에서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쇼하트를 협박했으니 그쪽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머리를 먼저 칠 순 없잖아? 상대는 바르하르트 후작가니까.”
“그 머리가 베르만이라고 생각하니 영 찜찜하군.”
“어쩔 수 없지. 그자는 왕세자와 연관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 테니.”
“분명 그 깐깐한 성격으로 사건을 무섭게 파고들고 있겠지”
카미앙은 감당이 안 된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신중해야 하다고. 그런데 말이지, 난 의심스러운 녀석이 하나 더 있어.”
정신 사납게 책상 주위를 왔다 갔다 하던 카미앙이 그제야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누구지?”
“바르하르트와의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말야. 내 감으로는 단독적으로 움직이는 녀석 같기도 하고.”
“혼자서 향료 길드를 상대하려 한다고? 그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른다고 해도 그건 너무 무모하지. 그래서 대체 누구야?”
마룬시에가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크로버라는 녀석이야.”
“크로버?”
“전에 향료 길드를 조사하다 잡혔던 녀석이야. 창고 지하에 있는 감옥에 가뒀었는데.”
“크로버라, 크로버….”
마룬시에는 그 이름을 계속 되뇌는 카미앙을 보며 말을 이었다.
“탈출했어. 간수들을 다 때려눕히고. 몇 달을 누워있다가 간신히 깨어난 총무한테 물어봤더니 그 녀석을 데리고 나간 데 여자 기사였데.”
“기억났어.”
갑자기 카미앙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바람에 마룬시에는 설명을 멈춰야 했다.
“깜짝 놀랐잖아.”
“크로버라는 이름, 들어 본 적이 있어.”
“누군데?”
그렇게 묻긴 했지만, 마룬시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카미앙과 친분이 있는 젊은 사내들은 베르만이나 다리스 같은 귀족 영식뿐이었다. 향료 길드에 들락날락하며 여자들과 잡담이나 나누는 한량이 그가 아닌 크로버일 리 없었다.
“녹시아에게 꼬리치는 모리아리티 백작. 그놈 이름이 크로버였어!”
마룬시에가 예상했던 대로 카미앙은 얼토당토않은 사람을 지목했다. 모리아리티 백작이라는 사람이 언제 바렌시드로 왔는지 모르겠지만 크로버가 향료 길드를 주시했던 건 벌써 몇 년이나 된 일이었다. 똑같은 사람일 리가 없었다.
“…아 그렇구나.”
“비록 녀석은 어두침침하니 시커먼 머리에 칙칙한 눈동자이긴 했지만….”
카미앙의 묘사에 마룬시에는 잠시 허리까지 내려오는 제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서로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없다는 건 진작에 확인했으니 별 타격은 없는 발언이었다. 사람들이 태양을 닮았다느니 황금 같다느니 하는 카미앙의 금발 역시 마룬시에 눈엔 곧 탈탈 벗겨 먹을 밀알쯤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변장이 아주 치밀하다 하지 않았나? 그러니 가발을 뒤집어서 썼든 뭐든 그 정도 차이쯤이야 가릴 수 있었겠지.”
카미앙은 벌써 모리아리티 백작을 범인으로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다 했더니만…. 나도 녀석을 조사해 보도록 하지.”
향수 사건의 범인을 조사하려는 건지 연적을 조사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룬시에는 굳이 카미앙을 말리지 않았다. 애초에 카미앙의 협력을 얻기 위해 그를 찾은 게 아니었다.
‘크로버가 여자 기사와 도망쳤다는 말은 귓등으로 들은 모양이군.’
마룬시에가 알고 싶은 건 그 여자 기사 쪽이었다.
‘이쪽도 나름 실력 좋은 녀석들을 뽑은 건데 혼자서 한 번에 끝내버렸잖아?’
그런 실력을 갖춘 여 기사가 바렌시드에 흔할 리 없었다. 처음엔 용의자 리스트에 녹시아라는 이름을 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녹시아를 기사라기보단 카미앙을 쫓아온 변방의 귀족 영애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은 탓이었다.
마룬시에가 녹시아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그녀의 이름이 바렌시드에 점점 알려지면서부터였다. 카미앙 말로는 자신에게 푹 빠져 모든 걸 다 해주는, 쓸모 있지만 좀 지겨운 여자라고 했다.
남녀의 일이야 원래 제삼자는 그 오묘한 관계를 알 수 없었다. 지겨운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녹시아가 쓸모 있다는 것만큼은 마룬시에도 동의했다. 전쟁터에서뿐만 아니라 여기까지 따라와 카미앙을 몇 번이나 구해주었다. 소문을 들어보니 모도루 백작가의 영애와 바렌시드 극장의 배우도 목숨을 빚진 것 같았다.
‘사람 구하는 게 취미인 여자인가? 그래서 크로버도 구하러 갔다고? 그게 말이 되나?’
크로버와 녹시아가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던 건지, 혹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건 아닌지 알아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크로버에 대해선 수하마다 대답하는 게 달랐다.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도는 점술가라고도 했고 향료 길드를 잡아 삼키려 하는 큰 상단에서 온 첩자라고도 했다. 먼 나라에서 온 귀족이란 소리도 있었고 어느 고명한 귀족의 사생아라는 말도 있었다.
크로버와 녹시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크로버는 아는 여자가 아주 많았다. 귀족 영애에서부터 미망인이 된 귀족, 상인의 딸, 대장장이의 딸…. 그가 한 달간 만난 사람을 조사했더니 바렌시드의 온갖 여자란 여자는 다 명단에 적힌 적도 있었다.
‘편하게 정보 좀 캐내 볼까 했더니. 왕세자는 계속 저런 소리만 늘어놓고, 말이지.’
사실 마룬시에가 의심하는 건 녹시아뿐만이 아니었다. 희박한 확률이긴 하지만 카미앙이 약혼녀를 이용해 카피 향수 공장에 손을 댔을 수도 있었다.
‘왕세자의 자리가 공고해진 지금 뒤가 구린 지난날은 다 털어내고 싶어질 수도 있는 일이니까.’
마룬시에 앞에서 쓸데없는 푸념만 늘어놓는 것도 그녀의 눈을 가리기 위한 연기일지 몰랐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건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래, 잘 좀 알아봐 줘. 그 크로버가 어떤 놈인지 말이야.’
“걱정 마. 녀석의 민낯을 아주 낱낱이 파헤쳐 줄 테니.”
물론 카미앙이 말하는 크로버가 자신이 찾는 사람과 동일 인물일 확률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오지게 재수가 좋은 거지.’
그쪽은 당분간 카미앙에게 맡겨놓고 마룬시에는 녹시아 쪽을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수하들이 들고 온 정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이젠 직접 자신이 녹시아를 만나 볼 차례였다.
***
평소보다 좀 더 일찍 눈을 떴다. 어젯밤 늦게 잠든 걸 생각하면 서너 시간밖에 자지 않은 셈이었다.
‘더 자도 되는데 왜 깼다 싶더니만….’
난 이마를 문질렀다. 정확히 어디라고 콕 짚을 수는 없지만, 그 언저리가 가려운 것만 같았다. 아니, 가려운 게 아니라 좀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크로버의 입술이 닿았던 그 자리가 문제였다.
“아니, 키스도 아니고 그까짓 뽀뽀 좀 한 게 이렇게 신경 쓰일 일이야? 그것도 고작 이마인데…. 진도 좀 더 나갔다간 기절이라도 했겠네.”
이 하찮고 몹쓸 몸뚱이에 하는 소리였다. 지금까지는 녹시아의 몸에 ‘몹쓸’이라든지 ‘하찮은’과 같은 단어를 붙일 일이 없었다.
현대인의 고질병을 고루고루 갖춘 저질 체력 이시아가 어찌 감히 십여 년 단련한 기사 녹시아의 우수한 신체를 폄훼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검과 화살 앞에서도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끄떡없던 이 몸뚱이는 면역력이 너무 약했다. 군대에서 남자들과 성별 구분 없이 함께 고생했으니 딱히 남자에게 약한 건 아니었다.
하녀가 세숫물을 데워오고 옷을 준비했다. 나는 어느샌가 익숙해진 아침 시중을 받으면서도 계속 크로버에 대해, 좀 더 솔직히는 어제의 스킨쉽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미남!’
녹시아의 신체는 미남에게 너무나 약했다. 이 정도면 면역력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내가 할 말은 아닐지 모르지만…. 아니지, 수백 번을 다시 생각해도 난 이 정도는 아니라고. 이건 뭐 거의 초등학생 수준 아냐?”
난 혼자 열심히 항변해가며 녹시아를 나무랐다. 모든 문제는 녹시아에게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절친에게 털어놔도 부끄러울 이 증상을 내가 오롯이 짊어져야 했으니까.
“기사님? 헤슬루에요. 일어나셨나요?”
헤슬루? 그래, 헤슬루 정도라면 이런 반응이 귀여울지도 모르겠다. 백마 탄 왕자님을 꿈꾸는 소녀라는 설명이 붙어도 어색하지 않은 헤슬루였으니까.
난 아침 일찍 찾아온 헤슬루를 맞이하면서까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들어온 뉴스에요! 기사님께 빨리 알려드리고 싶어서 좀 이르지만 찾아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