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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야 알아들었다. 오전에 카미앙과도 크로버가 말하는 실수가 일어날 뻔했었지.
나는 괜한 시비를 멈추고 얌전히 불꽃이 춤을 추는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크로버의 손은 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기만 했을 뿐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아니지, 진전은 무슨. 그렇게 말하니까 꼭 내가 뭘 더 바라는 사람 같잖아?’
하지만 이 별것 아닌 접촉에 사람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나 보다.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는 장관을 앞에 두고도 자꾸만 크로버의 옆모습이 떠올랐다.
“녹시아 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만….”
끝났다고? 이제야 텅 빈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괜히 눈가를 비비며 대답했다.
“그러네요. 계속 쳐다보고 있었더니만 지금도 눈앞에서 불꽃이 어른거려서.”
“이런 불꽃놀이는 파르미엔 영지에선 없었으려나요?”
난 어깨를 으쓱였다. 파르미엔 백작가에서 불꽃놀이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크로버는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난 이보다 더 화려하고 규모가 큰 불꽃놀이를 여러 번 봤었다.
‘그치만 그때는 저렇게 잘난 얼굴이 옆에 없었지.’
크로버가 괜한 소리를 한 까닭에 나까지 심란해졌다. 고개를 몇 차례 흔들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분위기를 전환할 만한 좋은 이야깃거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사건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실컷 놀다 보니 잊고 있었네요.”
“기억하고 계셨나요? 전 당연히 둘러댄 말인 걸 알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뭐야…. 거짓말을 한 거네요?”
“그렇다고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게 개인적인 용건은 있었습니다.”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크로버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녹시아 님께 주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요.”
뚜껑을 열자 목걸이가 보였다. 실낱같은 줄에 시선을 사로잡는 붉은 보석이 박혀있는 목걸이였다.
“혹시 수확제의 공식 선물이 목걸이인가요?”
크로버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눈으로 되물었다.
“아니 오늘따라 목걸이를 선물하는 사람이 많길래….”
“저 말고 또 다른 사람에게 목걸이를 받으셨나 보죠?”
다른 사람이라고는 했지만 저건 카미앙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크로버의 눈빛이 다시 한번 짙어졌다.
“받을 뻔했는데 거절했어요.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에게 그런 선물을 받으면 너무 부담스럽잖아요? 왠지 빚진 것처럼 찜찜하기도 하고.”
이번엔 크로버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내 말에 긴장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럼… 제가 드리는 건 받아 주실 겁니까?”
“흐음, 어디 보자. 그대는 훤칠한 키에 어디 한군데 흠잡을 때 없는 얼굴에….”
난 괜히 크로버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뜸을 들였다. 내 고개를 따라 크로버의 시선이 함께 움직였다.
“정의로운 심성까지 갖추고 있는 것 같으니…. 안 받을 이유가 없네요.”
“이것 참 영광입니다.”
크로버가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내게 걸어주려 하는 것 같았다.
“제가 직접 해도 되는데.”
“원래 목걸이를 선물할 땐 직접 걸어줘야 합니다. 바렌시드의 오랜 전통이죠.”
진짜인지 아닌지 따질 시간도 없이 크로버가 다가왔기에 난 황급히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전과 같은 자세로 크로버와 있다가는 정말로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설마 제가 목걸이 하나 제대로 걸어드리지 못하겠습니까.”
카미앙의 목걸이와는 무게감부터가 다른 물건이었다.
“그게 아니라, 좀 위험한 자세더라고요.”
난 보석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살짝 들어 올렸다. 카미앙의 것은 귀금속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엄청난 물건이었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이 작은 목걸이는 왜 이리 가슴을 간질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떤 점이 위험하다는 거죠?”
“괜히 너무 가까이 붙어 있게 돼서 말이죠.”
별생각 없이 대꾸하며 요리조리 보석을 돌려보았다.
“가까이 붙어 있어서?”
“그게 고개라도 잘못 돌리면….”
크로버의 눈을 물들였던 그 붉은색과 똑같은 빛깔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고개라도 잘못 돌렸다간 입맞추게 된다, 뭐 그런 뜻인가요?”
뭐지, 어쩌다가 대화가 여기까지 온 거지? 목걸이에서 눈을 떼자 뒤에서 크로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리해 보면 왕세자님이 당신에게 목걸이를 걸어주다가 키스라도 하려고 했단 거네요. 했는지, 하려고 했던 건지는 당신만이 알고 있겠군요.”
“그런 게 아니라….”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크로버가 날 제 품 안에 가두기라도 할 것처럼 내게 팔을 두른 탓이었다.
“마주 보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곧 단단한 가슴이 등 뒤에 닿았다. 크로버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날 흔들 수도 있을 것처럼 거센 박동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고개를 돌리면.”
크로버의 손이 부드럽게 내 턱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나비를 이끄는 꽃향기라도 되는 것처럼 난 손길을 따랐다. 이내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과 마주 보게 되었다.
“키스하기에 충분한 자세가 나오죠.”
크로버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게 허튼소리를 할 때면 언제나 나타나는 그 미소였다. 리듬감이 느껴지는 말투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난 긴장하고 있었다.
저 눈빛 때문이었다. 진득하게 쏟아지는 그 눈빛이 너무 버거워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고개라도 돌려야 그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이 싫다고 하시면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움찔거리는 것을 거절 의사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내가 여기서 거절한다면 크로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날 보내 줄 것이다.
지난번과 비슷한 고민에 맞닥뜨렸다. 하지만 그땐 크로버가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기에 나도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아직 카미앙의 후회도 받아내지 못했고, 그 이후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크로버는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과 다를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데 그 와중에 얼굴은 제일 잘났고.’
끝나지 않을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었다.
‘모르겠다.’
난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카미앙과의 키스는 시작도 전에 온몸이 거부했지만 크로버는 아니었다. 거부는커녕 심장은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얼굴은 뜨거워졌다.
보이진 않지만 크로버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입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
‘평생 키스 한 번 안 해본 사람처럼 대체 왜 이러니, 나.’
아니지, 이시아는 그랬지만 녹시아는 모를 일이었다. 게임에서 녹시아와 카미앙의 첫 키스는 엔딩에 이르러서였고 파르미엔에서도 딱히 스킨쉽은 없었으니…. 아무래도 녹시아의 몸인지라 긴장한 것 같았다. 분명 그런 거였다. 그래야 했다.
부드럽고 따스한 입술이 닿았다.
‘응?’
입술이 아니라 이마 위에.
혹시 그다음이 있는 건가 싶어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크로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술은 다음으로 아껴두겠습니다.”
응? 그러니까 오늘은 이걸로 끝? 괜히 나 혼자 고민하고 상상하고 긴장한 것 같아 억울했다. 당해보기 전에는 모를 정도로 몹시 억울했다. 나도 모르게 샐쭉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꼭 차후가 있으라는 법은 없지요.”
“그 의미는 지금 이 자리에서 계속하자는 말씀입니까?”
역시 크로버는 사람을 발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누가 그런 뜻으로 말했나요? 남의 집 지붕에서. 민폐에요 민폐!”
“엄밀히 말하자면 남의 집 지붕은 아닙니다. 신전에서 관리하는 건물이거든요.”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양손을 들어 보이는 게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게 신전 건물이라고? 나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건물보다는 크기가 컸지만 그저 상업용 건물이겠거니 여겼다.
“신관이나 행정관료가 아닌 이상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긴 신전 소속의 여관입니다.”
“여관이요?”
신전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공간이 아닌가.
“네. 아무래도 바렌시드 신전이 대륙의 남쪽을 통틀어 가장 큰 곳이다 보니 순례자들이나 다른 신전의 신관님들이 찾아오시지요. 신앙심 깊은 신도님들도 방문하시고요. 그들 중엔 외국인들도 있다 보니 전부 신전에서 모시긴 어려워 부득이하게 별도로 여관을 운영 중입니다.”
그런 사정이 있었다니. 요즘 들어 개발자도 모르는 설정이 너무 많아진 게 아닌가 싶었다.
“라라벨양의 동생 루안군도 이곳에 있습니다.”
루안은 건강도 회복했고 본인이 일자리를 원했기에 이곳에서 시설 관리를 하며 지낸다고 했다. 여관 안에만 있으면 바렌시드 사람하고는 되려 마주칠 일이 적을 거라는 설명이었다.
“다행이네요.”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크로버의 시선이 느껴졌기에 난 좀 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행여라도 말이 끊기게 될까 두려워 급히 다른 주제를 꺼냈다.
“여기는 자주 왔나 봐요? 올라오는 폼이 익숙해 보이던데.”
“요즘은 그다지 자주 오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는 자주 올라오곤 했죠.”
“어렸을 때라면….”
“생각해보니 그렇게 어려서도 아니군요. 열두 살쯤이었던 것 같네요.”
열 두 살의 크로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니 분명 미소년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 신전에 들어갔군요.”
“그땐 수습 사제였습니다.”
“신전 일이 힘들 때마다 여기로 도망 왔던 거죠?”
“지금의 저라면 그랬겠지만, 그때는 꽤 고지식했던 아이라 땡땡이 같은 건 생각도 해본 적 없었지요.”
보통은 신전에 있으면서 원래 성격보다 점점 고지식해지는 것 같던데. 크로버는 정반대로 자란 모양이었다.
“그저 바렌시드의 풍경이 보고 싶을 때 이곳에 올라왔습니다.”
도시의 풍경이 그리워 홀로 지붕에 앉아 있었다니. 감성적이고 조숙한 아이였거나 마음에 큰 상처가 있는 아이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후자 쪽이었을까 봐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상상이 안 가시겠죠.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걸로 충분하다는 듯 크로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혼자 일어날 수 있었지만 사양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