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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에게 모든 걸 맡긴 채였다. 난 그저 그 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볼리가 어디로 가는 건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 후회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고 여겼다. 시스템의 퀘스트도 모두 성공시켰고 카미앙의 태도도 처음과는 많이 달라졌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갑자기 들려온 크로버의 목소리에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인의 분수였다. 평소와 다르게 커다란 호박 장식과 색색 가지 과일이 장식되어 있었지만 어쨌거나 연인의 분수였다.
이 영리한 말이 마치 크로버와 나의 약속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날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전 한참 기다려야 될 줄 알았습…. 녹시아 님?”
크로버가 저렇게 놀라는 걸 보니 내 꼴이 말이 아닌가 보다.
“전 괜찮아요. 그냥 힘이 좀 빠져서 그래요.”
“왕세자님과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난 말에서 내려 분수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크로버가 조용히 내 곁에 섰다.
“언제쯤 그 사람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잔뜩 기대했던 덕분에 더 허탈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참아왔던 내 인내심에 한계가 온 걸지도 몰랐다. 머리가 헝클어지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후회하긴 할까요? 하겠죠? 아… 정말이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 사람이라면….”
“카미앙 말고 누가 있겠어요.”
나도 모르게 크로버를 붙잡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마치 친구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듯 말이다.
“왕세자님의 후회를 바라십니까?”
“네, 엄청! 절실하게! 간절히! 바렌시드의 신께서 지금 제 소원을 하나 말하라고 하시면 카미앙을 후회하게 해달라고 말할 거예요.”
“미안하다. 나도 내 행동을 후회한다. 이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워요?”
비슷한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듣는 사람이 지겨울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춰지지 않았다. 크로버는 별말 않고 술주정 같은 한탄을 들어주었다.
속이 조금은 후련해진 걸까. 쏟아져 나오던 말들이 잦아들기 시작했을 때였다.
“왕세자님이 후회하시면, 그다음엔 뭘 하실 겁니까?”
크로버의 물음에 내 앞의 그를 올려다보았다. 회색빛을 띠고 있던 눈동자가 물에 젖기라도 한 듯 짙게 젖어있었다. 눈높이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그답지 않은 분위기 때문인지 어쩐지 위압감이 느껴졌다.
불현듯 지난번 물에 빠졌을 때 동굴에서 크로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을 왕세자에게서 떨어뜨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왕세자의 주위를 맴도는 게 싫었습니다.’
‘아….’
오늘 후회할 사람은 카미앙이 아니라 나였나보다. 크로버에게 이런 일을 털어놓는 게 아니었다. 나중에 사과하더라도 오늘은 라라벨을 찾아갔어야 했다.
“왜 말씀이 없으시죠?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일이니 생각해둔 게 있으실 거 아닙니까?”
분명 크로버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내가 카미앙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러는 거라고, 카미앙이 후회하면 못 이기는 척 그에게 돌아갈 거라고. 지금까지 카미앙의 주위를 맴돌았던 것처럼 말이다.
‘크로버가 오해를 한다 한들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내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텐데?’
애초에 게임에선 엑스트라에 불과한 존재였다. 굳이 오해를 풀어줄 필요는 없었다.
“…….”
그런데 내가 그러기 싫었다. 크로버가 내 마음을 오해하고 있는 채로 두고 싶지가 않았다.
“뭘 할 거냐면….”
난 뜸을 들이다가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뭘 하긴 뭘 해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아프게 뻥 차 줘야죠. 너도 한번 당해봐라! 내가 이 빚은 반드시 갚아준다! 이 순간을 위해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참아온 줄 아느냐!”
왕궁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지만 크로버가 놀란 눈으로 날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난 일부러 더 떠들어댔다.
“아시잖아요. 제가 왕세자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런데 그냥 조용히 사라져 줄 수는 없잖아요? 아, 파르미엔 백작가에 진 빚도 빨리 갚으라고 해야겠네요. 이래 봬도 어음은 잘 챙겼거든요.”
더는 할 말이 없는데 크로버는 마치 조각이라도 된 듯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크게, 아주 크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그래요. 녹시아 님은 이런 분이셨죠.”
얼마나 신나게 웃어대는지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재밌어요?”
“네, 제가 평생 들었던 말 중 가장 재미있습니다. 그렇지, 시원하게 소리를 질렀으니 목이 아프시겠군요. 마실 거라도 사 오죠.”
“아니, 젤라또가 좋아요. 지난번에 먹었던 거요.”
크로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하는 크로버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가벼워 보였다.
‘역시 크로버는 내게 마음이 있는 걸까? 그동안은 내가 넘겨짚은 게 아닐까 싶었는데 오늘 반응으로 보면…. 아니지,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자.’
난 고개를 흔들었다. 전생에서 남자한테 한두 번 당한 게 아닌지라, 이런 쪽으로 내 촉은 믿을만한 게 못됐다.
‘스킬을 쓸 수 있으면 이런 것 따윈 고민거리도 아닐 텐데.’
크로버에게 스킬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새삼 아쉬웠다.
***
마치 하나라도 놓치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우리는 온종일 행사장을 누볐다. 갓 수확한 밀로 만들었다는 빵을 맛보고 숯불로 구워내는 소시지를 먹었다.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 극장 단원들의 노래를 관람하기도 하고 가장 큰 호박 선발대회를 구경했다.
“우리 진짜 열심히도 놀았네요. 벌써 저녁이에요.”
“아, 이제 곧 불꽃놀이를 하겠네요.”
“불꽃놀이도 있어요?”
수확제에 등장하기에는 과한 쇼였다.
“돈 많은 상인이 후원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름이 뭐였더라….”
“누군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어요. 그냥 감사한 마음으로 구경하면 되는 거죠.”
바렌시드는 하늘은 내가 알던 것보다 높고 넓었다. 한낮은 태양과 구름의 도화지였고 밤은 별들의 보금자리였다. 이런 하늘에 불꽃을 쏘아 올린다면 정말 어둠 속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아름답겠지.
그때 크로버가 내 손을 잡았다.
“불꽃놀이를 구경하려면 여기가 아닙니다.”
“네?”
“불꽃놀이 명소가 따로 있습니다. 뛰시겠습니까?”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난 크로버와 함께 뛰었다. 기대감을 동력 삼아 나아가는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축제의 풍경이, 거리의 사람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때로는 내가 앞서서 크로버를 재촉하기도 했고 크로버가 나를 이끌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뛰다 크로버가 멈춰 섰다. 나 역시 그를 따라 멈췄다.
우리는 잠시 무릎을 짚으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힘들다기보단 상쾌했다. 답답했던 무언가가 이 뜀박질에 다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도착한 건가요?”
주위를 둘러보니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확실히 시가지 한복판보다는 여유 있게 불꽃놀이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입니다. 목적지는 저기죠.”
크로버는 어느 건물의 지붕을 가리켰다. 건물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이 나무 위로 올라갔다 반대편으로 뛰어내리면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크로버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날 돌아보았다.
“제가 잡아드릴까요?”
“무슨 소리죠? 설마 지금 나한테 한 말인가요?”
나는 굵직한 나무 기둥을 다리로 휘감고 손으로는 단단한 줄기를 잡으며 보란 듯 위로 올라갔다. 크로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녹시아 님께는 필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한번 말 해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여자들과 왔을 때 했던 말이 습관처럼 나온 건 아니고요?”
이번엔 크로버가 가리켰던 지붕 위로 뛰어내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내 생각에도 그랬다. 농담으로 크로버에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여긴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를 데리고 올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나무를 타고 지붕으로 뛰다 보면 상대는 이건 데이트가 아니라 극기훈련이라고 항의할 게 뻔했다.
“여기서 반대쪽을 바라보면 도시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가뿐하게 지붕 위로 착지한 크로버가 내 어깨에 양손을 올리며 방향을 잡아주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바렌시드가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집집이 켜놓은 불빛이 작은 촛불처럼 앙증맞았다. 시내 한복판의 열기가 알록달록한 빛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멀리 빛나는 게 왕궁입니다.”
형태는 보이지 않았지만, 주변보다 워낙 환해서인지 꼭 달이라도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 왕궁 이야기는 괜히 했군요.”
내가 카미앙을 떠올린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찰나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환해졌다.
“시작했어요!”
우리는 지붕의 가장 높은 곳에 걸터앉았다. 조금 높아졌을 뿐인데 한결 서늘한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녹시아 님, 여기선 이렇게 앉으시면 됩니다.”
크로버는 익숙하게 굴뚝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앞으로 쭉 뻗어냈다.
“꼭 말 안 듣는 열 살짜리 같은 자세인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역시 그를 따라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이렇게.”
동시에 크로버가 걸치고 있던 코트를 내게 걸쳐 주었다.
“옆에 있는 사람 옷을 뺏어서 걸치면 아주 완벽하죠.”
수작인가? 그렇다면 뻔한 수작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아름답고 바람은 기분이 좋았다.
난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펑, 펑!”
노란색 꽃이 만개했다가 사라지려 하면 다시 파란 꽃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아나드 수장의 목을 베던 날. 처음으로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던 날. 오징어 얼굴을 한 크로버를 만난 날…. 녹시아 빙의해 살아왔던 시간이 불꽃과 함께 나타났다 흩어졌다.
문득 기와를 짚고 있던 손끝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났다. 크로버의 손이었다. 맞닿은 손바닥에서 땀이 날 때까지 한참을 잡고 뛰어왔던 손 말이다.
‘뭘 새삼스럽게.’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졌다. 이번엔 내가 골려줄 차례다 싶었다. 폭죽 소리를 피해 크로버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왜요 크로버, 기도라도 하려고요?”
그때 빨간 불꽃이 터지며 크로버의 얼굴을 환히 비췄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엉겨 붙어 있었다. 음영이 진 콧날은 평소보다 더욱 도드라지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내가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이유는 빠알간 불씨가 타오르는 듯한 그의 눈동자였다. 저 불꽃 때문이었다.
‘얼굴이 받쳐주면 어떤 색이든 잘 어울린다지만…. 정말 그런 이유인가?’
원래 크로버는 붉은 눈동자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에게 잘 어울렸다. 푸른 눈동자의 크로버는 어딘지 모르게 카미앙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지만, 붉은색은 그렇지 않았다.
“불꽃놀이가 아닌 제 얼굴을 구경하러 오신 것 같군요.”
시선을 하늘에 고정한 채로 크로버가 입을 열었다. 자신이 먼저 내 손을 찾았다는 건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그런 크로버씨는 먼저 절 부르시고는 제게 눈길 한번 주시지 않네요.”
“지금 녹시아 님을 쳐다봤다가는 괜히 실수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 한 탓에 나는 무슨 실수를 말하는 거냐고 되묻고 말았다. 정말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몰라서 그러십니까? 아니면 바라고 물으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