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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의 방향부터 낙엽의 색까지. 아름다움이란 명제 아래 모든 식물이 하나하나 재단된 듯한 뜰이었다. 수확제의 풍요로움은 다른 나라 이야기라는 듯 그저 겨울을 준비하는 짧은 계절의 정취만이 가득했다.
카미앙과 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내가 멀찍이 떨어져 앉은 탓에 그와 나 사이에는 한 명쯤 더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아무리 이벤트가 있다 해도 카미앙과는 이 정도 거리가 적당했다.
‘뭐든 해봐라, 카미앙.’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니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고해를 하는 게 정석이지 싶었다. 왕세자 체면을 생각한다면 일단 사랑의 증표부터 건넨 다음 후회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카미앙이 행동을 취하길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공감대라도 형성하자는 거야 뭐야.’
자꾸만 시간이 흘러갔다. 상상의 나래는 고이 접어두고 좀 더 생산적인 일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짜 향수 이야기를 꺼낼 참이었다. 마룬시에와 카미앙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보기 위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궁금한 건 카미앙이 이 일을 알고 있는지였다.
바렌시드의 왕세자로서 카미앙은 지극히 평범했다. 주변에서 치켜세우는 것만큼 능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적어도 평민들을 괴롭히는 흑막과 손을 잡을 사람은 아니었다.
“참, 여기까지 소식이 전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바렌시드에서 가짜 향수를 파는 사람이 있었데요. 앙루민이라는 유명 향수를 카피한 제품이라더군요.”
카미앙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내 심장도 덩달아 조여왔다.
「마룬시에의 편지가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소문이 퍼진 건가? 녹시아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면….」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가짜 향수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의 속마음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정말 가짜 향수에 대해 알고 있던 거냐. 카미앙?’
내가 제 생각을 읽는지 알 턱이 없는 카미앙은 태연하게 왕세자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저런, 상도덕도 없는 녀석들이군. 하지만 종종 카피 제품을 파는 경우도 있으니 그리 놀라지 않아도 되오. 물론 그 사기꾼은 곧 법정에 서게 될 거요.”
“그 정도 일이라면 굳이 왕세자님께 전하지도 않았겠죠. 중요한 소식은 따로 있어요.”
난 카미앙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부디 이것만큼은 그가 모르고 있길 바랐다.
“그 향수에 중독 성분이 들어있었대요. 사람들에게 많이 팔아먹으려고 그랬다는 사람도 있지만 제가 보기엔 나중에 해독제를 팔아먹을 요량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정말 나쁜 놈들이죠?”
「중독 성분이 들어있다는 것까지 알려졌다고? 큰일이군. 내가 연루되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상당히 곤란해지는데. 혹시 이걸 파고드는 사람이 있다면…. 잠깐. 분명 마룬시에가 편지에 베르만 이야기를 했었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카미앙은 마룬시에가 단순히 공국 영애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손을 잡고 이 음흉한 일을 함께 주도하기까지 했다.
내가 알고 있던 바렌시드가 뒤집힌 기분이었다. 원작과는 너무 다른 설정이었다.
후원에는 또다시 적막이 맴돌았다. 카미앙은 제 나름대로 어디서 비밀이 새 나갔는지 추리하기 바빴고 나는 충격에 빠져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카미앙이었다.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그런 안 좋은 뉴스는 인제 그만 생각하는 게 어떻겠소?”
그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 그 말이 맞았다. 카미앙이 어떻게 변했든, 마룬시에가 무슨 일을 꾸미든 나와는 크게 상관없었다. 크로버와 함께 ‘파르미엔 기사님’ 놀이를 자주 했더니 내가 바렌시드의 수호 기사로 빙의라도 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다.
녹시아는 그저 한낱 공략 캐릭터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내가 생각해야 할 건 나의 목표, 카미앙을 후회 남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이 이벤트에 전적으로 집중해야 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게 초여름이었는데 벌써 가을이 되었군. 바렌시드에서의 생활은…. 이렇게 물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즐거웠소?”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제 좋아지고 있는 참이에요.”
카미앙 앞에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던 때에 비하면 정말 많이 좋아지긴 했다. 이젠 그의 후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고맙다고? 고맙다는 말 자체는 특별한 게 아니었지만, 카미앙의 입에서 나온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는 웬만해서 감사 인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양 적진을 휘젓고 왔을 때나 들을까 말까 한 말이었다.
‘어쩌면 정말 오늘….’
난 고개를 돌렸다. 카미앙이 기다렸다는 듯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진작부터 날 쳐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주한 푸른 눈동자가 가을 하늘처럼 시렸다. 한때 녹시아가 제 목숨보다 사랑했던 눈빛이었다.
“그대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소.”
뭔지 짐작이 갔다. 영원한 사랑의 증표일 게 분명했다.
카미앙은 내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한때는 익숙했던 온기가 느껴졌다. 이제 그와 나 사이에 틈은 없었다.
“왕실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목걸이요. 영원한 사랑의 증표라고 하지.”
장신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지만 그걸 본 순간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조금 과장해서 주먹만 한 다이아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커다란 다이아를 호위하듯 작은 다이아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이렇게 엄청난 선물은 게임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대에게 잘 어울릴 거요.”
목걸이를 손에 쥔 카미앙의 목소리는 한층 자신만만하게 들렸다.
“내가 직접 걸어주겠소.”
카미앙이 그대로 내 목 뒤에 손을 둘렀다. 자연스레 가까워지던 얼굴이 내 귓가에서 멈췄다. 숨소리인지 심장 소리인지 모를 박동이 느껴졌다.
곧 목 언저리에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목걸이 수여식은 끝난 것 같은데 카미앙은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녹시아.”
목소리보다 숨이 먼저 귓가에 닿았다. 동시에 부드러운 손이 반대쪽 뺨을 감쌌다. 카미앙의 시선이 내 입술에 내려앉았다.
‘이건… 키스 타이밍!’
머뭇거리다가는 저 입술이 내 얼굴에 닿는다.
‘그럴 순 없지!’
난 한쪽 손으로 벤치를 짚고 있는 힘껏 몸을 뒤로 밀었다. 덕분에 마치 화살처럼 카미앙의 반대 방향으로 튕겨 나갈 수 있었다.
“…?”
갑자기 일어난 일에 카미앙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했소?”
그래, 긴장했지. 조금만 늦었어도 네 입술이 내 위에 포개지는 불상사가 일어날 뻔했으니. 지금까지는 카미앙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날 사랑하고 있다는 제 착각에 한껏 취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어쩌면 녹시아로 빙의한 이후 가장 중요한 한마디가 될지도 몰랐다. 난 스킬창에 뜬 선택지 중 하나를 골랐다.
“이건 제가 받을 물건이 아닌 것 같네요.”
도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녹시아로 빙의한 직후, 루티시나와 함께 있던 카미앙에게 바로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었다.
동시에 나는 목걸이를 풀어 카미앙에게 들이밀었다.
“녹시아?”
“소중한 물건 아니에요? 땅에 떨어지면 곤란할 것 같은데.”
그제야 내가 이 주먹만 한 다이아를 내던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카미앙은 재빨리 목걸이를 받아 갔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갑자기라뇨. 제가 말로, 행동으로 충분히 전하지 않았던가요? 전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요.”
“혹 내가 그대를 서운하게 해서 이런 거라면….”
“대체 몇 번을 반복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서운한 것도 없어요. 그냥 왕세자님을 향한 제 바보 같은 사랑이 끝난 거예요. 지금은 그저 파르미엔 기사 녹시아가 왕세자님을 알현하고 있을 뿐이죠.”
시스템 창이 나타났나? 아직인가? 난 ‘카미앙이 후회하고 있습니다.’와 같은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을까 기다리는 중이었다.
“갑자기 왜 제가 좋아지셨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늦었어요. 왕세자님과 저는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고요. 후회하셔도 소용없어요.”
난 일부러 후회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카미앙의 변화를 알리는 메시지는 볼 수 없었다.
‘…설마 오늘이 아닌가?’
“녹시아.”
그 순간 카미앙이 입을 열었다.
‘그래, 후회한다고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말해!’
주변의 모든 게 사라지고 오로지 카미앙의 입만이 클로즈업된 채로 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오늘은 너무….”
‘너무?’
“흥분한 것 같군. 다음에 다시 부르도록 하지. 그때는 그대가 더 만족할 만한 선물을 준비하겠소.”
‘끝? 이게 끝이라고?’
카미앙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높이 쌓았던 기대가 일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누가 선물 달라고 했어? 내가 원한 건 선물이 아니라 후회란 말이다!
“선물보다 전 왕세자님의 진심 어린 사과가 필요해요.”
이렇게 가르쳐 주지 않으면 어쩌면 카미앙은 평생 후회 따위는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사과라니. 그건 우리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말 같군. 아무튼, 오늘 일은 정말 유감이오. 어쩌면 나 혼자 너무 앞서갔던 것일지도 모르겠군.”
카미앙은 시종을 불렀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나가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발걸음을 옮기며 몇 차례나 카미앙의 집무실을 되돌아보았다. 집무실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데 날 붙잡는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인정해야 했다. 결국, 내가 기대했던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