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그게 사정이 있어서….”
크로버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와 떠드는 게 별로 즐겁지 않은 모양이시군요.”
안 그래도 대화에 집중하지 못해 내심 미안하던 참이었다. 크로버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모르게 변명이 튀어나왔다.
“그럴 리가요. 정말로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누가 들어도 허술한 핑계였다.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야 하는 개인적인 사정이 뭔지 몹시 궁금하네요.”
좀 전에는 그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고 하더니만 하트를 만들고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물론 물어본다고 해서 대답을 해주실 거라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생각을 해 봤죠. 도대체 저 손동작은 무슨 의미일까, 왜 저렇게 반복하는 것일까.”
“…….”
“아시지 않습니까? 저도 일단은 예지의 신관이니까요. 그리고 나름대로 답을 내봤습니다.”
난 제법 진지하게 그의 말을 경청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예지의 신관이니 어쩌면 이 동작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그건 저에게 보내는 시크릿! 메시지라고요.”
좀 전까지만 해도 한숨을 내쉬던 그의 목소리에 평소와 같은 리듬감이 돌아왔다. 생뚱맞은 결론과 함께 말이다.
“물론 완전한 해답은 아니었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왜 굳이 시크릿 메시지를 보낼까? 혹시 말로 전하기 쑥스러워서 그런 건 아닐까?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알겠더군요. 아무래도 수확제를 함께 보내자는….”
“아닙니다.”
난 양손을 들어 올리며 적극적으로 크로버의 말을 부정했다. 진작 저 말을 끊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한참 잘못된 예언을 하셨어요. 예지의 신관님.”
크로버가 재미있다는 듯 쿡쿡거리며 웃었다. 자신의 추리가 틀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뭐야, 나 속은 거야?’
내가 놀려먹기 좋은 타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딱히 리액션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표정의 변화가 다양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크로버는 툭하면 이런 식의 농담을 던졌다. 근엄하신 신관님들과 엄숙한 대화만 나누다가 나 같은 일반인을 만나면 그동안 억눌러왔던 본성이 튀어나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장난이었어요. 이걸로 좀 전에 제게 소홀했던 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주 배려심이 넘치시는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이래 봬도 신관이니까요.”
내 눈초리가 사나워진 것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입이 삐죽거리는 것을 본 건지 크로버가 얼른 화제를 바꿨다.
“이번 주말이 수확제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당연하죠.”
알다 마다였다. 수확제는 왕실에서 주관하는 기념일은 아니었지만, 게임에서 꽤 중요하게 다뤄지는 행사였다. 수확제 이벤트를 보는 상대는 공략 캐릭터로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수확제에서 아무래도 카미앙이 편지를 보낼 사람은 나지 싶었다. 호수 데이트 이후로 루티시나와는 냉랭한 관계가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라라벨이나 헤슬루와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다.
마룬시에가 남아있었지만 ‘드디어 녹시아에 대한 내 마음을 깨달았어’라는 카미앙의 상태가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날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만.”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도 카미앙을 만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이게 기분 좋은 이유는 아니지만요.”
카미앙으로 플레이할 때 몇 번이나 했던 일이었다. 먼저 공략 대상에게 수확제를 같이 보내자는 편지를 보낸다. 행사를 같이 즐기면 마지막엔 후원에서 이벤트가 발생한다. 공략 캐릭터마다 다르지만, 영원한 사랑의 증표로 목걸이나 반지 같은 선물을 준다. 그 이후로는 엔딩만을 기다리면 된다.
‘아, 키스신도 있었지. 이건 패스하자.’
카미앙과 키스라니 말도 안 된다. 거기까지 안 가도 카미앙을 후회하게 만드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터였다.
머릿속으로 카미앙과의 만남을 시뮬레이션하는데 잔뜩 가라앉은 크로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세자님과의 만남이 기대되시는 모양입니다.”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번에도 변변치 않은 핑계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털어놓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와 속도를 맞추며 걷던 크로버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싶더니 종국에는 걸음을 멈추고 가까이 있는 나무에 기대섰다. 처량함이 한층 더 돋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정말이지 제 생각을 훌쩍 뛰어넘는 다른 이유가 참 많으신 분이로군요. 전 그래도 녹시아 님과 이젠 제법 신뢰를 쌓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번에도 아까 같은 장난을 치려고 밑밥을 까는 건가? 크로버를 유심히 살폈지만, 그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신의 어깨 위로 떨어진 단풍잎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특별할 거 하나 없는 단풍잎이었다. 그저 내가 아닌 시선을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한 듯했다.
“저도 당신을 충분히 신뢰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건 그 누구라도, 설령 카미앙이라 하더라도 말할 수 없는 이유에요.”
“그렇군요.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어린아이처럼 투정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여전히 단풍잎에 시선을 고정한 채 크로버가 중얼거렸다. 어린애처럼 굴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이미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왕세자님과의 관계 역시 부디 제 상상을 훌쩍 뛰어넘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말했잖아요. 카미앙에게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고. 이건 정말로 그와 나 사이의 채무 관계 때문에 만나는 거예요.”
사정을 설명하기도 곤란하니 그냥 오해하도록 놔둬도 될 텐데. 왜 자꾸 변명을 늘어놓게 되는지 모르겠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우리 사이에 그 정도 신뢰는 있는 거죠?”
“이게 거짓말이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크로버가 거짓말의 대가로 바랄만한 것이 있던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국 나는 성물을 걸었다.
“신성력 측정 팔찌를 반납하도록 하죠.”
그제야 크로버는 단풍잎을 버리고 다시 내 곁에 섰다. 이번엔 장난을 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살짝 삐졌던 게 아닌가 싶었다.
“팔찌를 반납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녹시아 님을 믿으니까요.”
“뭐, 그렇다면 저야 고마운 일…….”
문득 길게 늘어진 나와 크로버의 그림자가 제법 가까이 붙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살짝 시선을 돌려 옷깃이 닿을 듯 말 듯한 크로버와의 간격을 확인했다.
‘이 정도로 가까운 건 가족이나 남친뿐이었는데.’
그런데도 이 간격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크로버가 가족은 아니지. 가족은 아닌데 그럼 남친….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대신 채무 관계를 청산하신 후에 저와 수확제를 함께 보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이번에는 내 쪽에서 걸음을 멈췄다. 꼭 뭐에 놀란 사람처럼 말꼬리를 높이면서 말이다.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요.”
“아, 보답. 그렇죠. 팔찌도 필요 없다고 했으니 다른 보답을 해야겠죠.”
괜히 멋쩍은 마음에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고 보니 크로버는 수확제를 계속 입에 올리고 있었다. 자꾸 집착하는 거로 봐서 아무래도 그날 무슨 일이 있는 게 확실했다.
“혹시 또 무슨 사건이 생겼나요?”
크로버가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녹시아 님께서 아주 흥미로워하실 것 같은 사건이 생겼습니다.”
이번에도 퀘스트 창이 나타나려나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신호가 없었다.
“연인의 분수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왕세자님과의 일이 끝나면 그쪽으로 오시겠습니까?”
하긴 퀘스트가 끝난 후에 명성이 오른 적도 있었다. 난 그렇겠다고 약속했다.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니 편지 한 통이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금색 인장이 찍힌 붉은색 카드, 내 예상대로였다. 카미앙이 보낸 것이었다.
***
수확제는 왕궁이나 신전에서 주도하는 행사가 아닌 민간에서 자연스럽게 열리는 축제였다. 한 해 동안 수확한 농작물 중 가장 크고 실한 것을 뽑는 대회도 있었고 다양한 먹거리를 팔기도 했다.
물론 춤과 노래가 빠질 수는 없었다. 바렌시드 극장은 물론이고 멀리서 떠돌이 악단이나 서커스단이 찾아오기도 했다.
헤슬루는 친구들과 함께 축제를 즐기기로 했다면서 새벽부터 들떠있었다. 혹시나 내가 함께 어울리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활기가 넘치는 시가지를 가로질러 왕궁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한참을 달려야 도착하는 장중한 건물이 오늘따라 삭막해 보였다.
흥겨운 분위기의 시가지와 대조되기 때문인지 아니면 궁에 있던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러 나간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난 빠르게 카미앙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 와. 약속 시간은 아직인데, 일찍 왔군.”
“이 만남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요.”
“날 조금이라도 더 일찍 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며칠 안 본 새에 머릿속에 꽃밭이 활짝 피어난 모양이었다. 내가 호수에서 했던 말은 그 꽃밭의 거름으로 삼은 게 분명했다.
“피차 바쁜 몸이니 쓸데없는 건 생략하죠. 꼭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죠? 그 이야기만 듣고 싶네요. 번거롭게 시가지까지 나갈 필요 없이요.”
어차피 수확제 이벤트에서 중요한 건 후원에서의 대화였다. 카미앙과 함께 수확제를 즐기며 데이트를 하는 것 따위는 필요 없었다.
“하아, 녹시아. 내가 바쁜 걸 알고 그렇게 말하는 모양인데 그대와 함께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소.”
언제는 정식으로 알현을 신청하고 만나러 오라고 하더니만. 확실히 카미앙은 변했다. 물론 제 좋을 대로 내 말을 해석하는 건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마 그건 카미앙이 후회하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난 괜찮소.”
“제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카미앙은 끝까지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 뜻을 따라주긴 했다.
“그대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그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카미앙은 남쪽으로 나 있는 문을 가리켰다.
“후원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떻겠소?”
왕세자의 후원은 그만의 은밀한 장소였다. 몰래 들어갔다가 면박을 당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그런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제가 먼저 날 후원으로 이끈다.
아무래도 내가 예상했던 대로 일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가슴이 세게 요동쳤다.
“훗, 그대 얼굴이 꼭 저 단풍잎 같군.”
흥분한 탓에 얼굴이 붉어졌나 보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있는지 모르는 카미앙은 또다시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래, 행복한 꿈을 꾸는 것도 여기까지겠지.’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먼저 후원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