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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58화 (5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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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신성력이 부족하다고?’

    변장을 위해 주머니에 넣어놨던 팔찌를 슬쩍 확인했다. 시스템 메시지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빛을 잃어 쇳덩이처럼 보이는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고성능 충전기인 크로버가 곁에 있으니 문제없다고 여겼는데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나보다. 염색을 유지하는 데는 신성력이 필요하다고 하더니만 이건 신성력 잡아먹는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정말이야?”

    놀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번에는 연기였다.

    “자작의 눈에 연기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그렇게 보이는 거 아냐?”

    “그, 그런 걸까요?”

    쇼하트는 연신 눈을 비벼댔다. 그리고는 제 곁에 있던 하인과 무어라 속닥거렸다.

    “송구하지만 머리색이 변하신 게 맞습니다. 이 자도 그렇게 보인다고 하는군요.”

    “믿을 수 없어. 얼른, 얼른 거울을 가져와!”

    “자네! 당장 가서 거울을……”

    “쇼하트! 당신이 가장 믿을만해. 다른 사람을 시키지 말고 빨리 가져오란 말이야.”

    “그, 그렇죠. 제가 가장 믿을만하시겠죠.”

    그 와중에도 자신이 가장 믿을만하다는 말이 귀에 꽂혔나 보다. 쇼하트와 그의 수하가 농장 건물을 향해 뛰었다.

    지금이야 쇼하트가 경황이 없어 대충 넘겼다지만 눈동자 색까지 변한 걸 보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쇼하트가 돌아오기 전에 크로버를 찾아야 했기에 마음이 급했다.

    ‘나는 크로버를 찾아야 하는데.’

    아직 공장 안에 있는 건지 아니면 밖으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돌아다니다가 길이 엇갈리는 것보다는 공장 근처를 살펴보며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열매껍질인지 뭔지를 잔뜩 쌓아놓은 덕에 몸을 숨길 수도 있고 말이다.

    쇼하트가 돌아올 때까지 크로버를 찾지 못하면 저 열매껍질 안에 숨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공장 입구 뒤쪽에는 연료로 쓸 숯과 나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쪽은 개간하지 않은 모양인지 키가 작은 덤불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별거 없는 덤불이네… 가 아니라 움직이는 덤불? 덤불이 움직이고 있어?”

    근처에 있던 덤불 한 무더기가 위아래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자연 그대로의 덤불이 아니라 그 밑에 나무 뚜껑이 있었다.

    크로버를 찾아야 하는데 대체 저게 뭔지 궁금해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곧 뚜껑이 열리고 무언가가 기어 나왔다.

    “배, 뱀?”

    꿈틀거리는 걸 보니 꽤 큰 녀석이었다. 뱀이 땅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난 그것이 누런 천을 뒤집어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군지 알아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대가 천을 벗어 던지자마자 알 수 있었다.

    “크로버? 왜 매번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놀래켜……”

    그를 책망하려던 차에 크로버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공장 일꾼입니다. 아직 숨은 붙어있어요. 맑은 공기를 쐬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데.”

    크로버는 축 늘어져 있는 사람을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아직 숨이 붙어있다고 했지만 안색만으로는 이미 죽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창백했다.

    “다행히 회복의 성소에서 가져온 물약이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마시게 해봐야겠어요.”

    “그 다음엔요?”

    우리가 이 사람을 데리고 갈 순 없었다.

    “하늘에 맡겨야죠. 운이 좋다면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쓰러진 사람은 아직 앳돼 보이는 청년이었다. 열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아직 어린 나이에 이런대서 고생하다 쓰러지다니. 안타까운 마음에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퉁퉁 붓고 검댕이 묻은 얼굴을 알아본 건 아니었다. 익숙한 쪽은 청년이 걸고 있는 목걸이였다.

    “이 사람 알 것 같은데….”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목걸이를 확인했다. 은으로 세공한 육각형 펜던트에 가운데에는 사파이어를 박은 물건. 생각났다. 라라벨이 동생 루안에게 준 목걸이와 똑같았다.

    “아…!”

    라라벨의 주위에서 얼쩡거리는 남자 중 한 명이 몸을 지켜주는 성물이라며 선물했었다. 카미앙이 기분 나빠하자 라라벨은 그 성물을 동생 루안에게 주었다.

    ‘카미앙 때문에 동생에게 준 게 아니라 원래 루안에게 돌아갈 물건이었나 보네.’

    “정말 아는 사람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라벨 아시죠? 라라벨의 동생이에요.”

    “라라벨양의 동생이요? 정말입니까?”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라라벨은 열다섯 살부터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몸이 아팠고 동생이 셋이었다.

    ‘그리고 막냇동생이 분명 농장에서 일한다고 했었지.’

    바렌시드 근교에 있는 농장으로 다른 곳보다 시급을 많이 쳐준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들어온다고도 했다. 이건 라라벨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다음은 플레이어로서 알고 있는 정보였다.

    ‘남동생이 매우 아파서 약값이 필요했어요.’

    라라벨 루트로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라라벨이 동생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이벤트가 나온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짐작건대 라라벨의 동생은 쇼하트의 공장에서 일했던 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겠군요.”

    마룬시에로 변장을 한 이상 지금은 루안을 데려가려면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나는 루안의 목걸이를 가리켰다.

    “혹시 이 성물 알아요?”

    심각한 얼굴로 목걸이를 살펴보던 크로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건 모조품입니다. 신의 방패라 불리는 성물을 본떠 만들었군요. 겉모양은 아주 비슷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헷갈릴 정돈데요.”

    “좋아, 그럼 됐어요. 모조품이든 뭐든 쇼하트가 구분 못 할 정도로 진짜 같아 보이기만 하면 되니까.”

    “루안을 데리고 나가기 위한 핑곗거리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장이 열악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죽어가는 사람까지 있을 줄은 몰랐어요.”

    크로버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미 죽은 사람도 서넛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가망이 있어 보여서 데리고 나온 겁니다.”

    “죽었다고요? 저 안에서요?”

    그래, 사실 쓰러지는 게 아니라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환경이었다. 1교대 근무만으로도 힘든데 저 햇볕은 들지 않고 연기가 가득한 저 땅굴에서 한 달을 살아야 했다.

    “아까 쇼하트에게 사람이 쓰러졌다고 했던 말이 사실이었군요.”

    “아니요. 그건 거짓말이었습니다.”

    크로버가 루안을 천으로 덮어주면서 대답했다. 거짓말을 한 사람치고 너무 뻔뻔스러운 반응이 아닌가 싶었다.

    “뭐…. 이해해요. 티타임을 끊기 위해 핑곗거리를 만들어 낸 거죠?”

    “아닙니다.”

    본인을 위해서 해준 말이었건만 굳이 아니라고 대답하는 크로버였다. 어째 오늘은 안 해도 될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왜 그런 거짓말을.”

    “쇼하트가 주인님께 수작 부리는 걸 들었거든요.”

    “수작? 아 그거….”

    “주인님께서 똑 부러지게 대답을 못 하시기에 제가 나섰습니다.”

    나를 힐끗 돌아보는 크로버의 얼굴에 왠지 원망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저한텐 그렇게 매몰차게 말씀하셨으면서, 왜 자작 앞에선 머뭇거리셨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동굴에서 있던 일을 들먹이는 건가? 상황이 이런데?

    “생각보다 뒤끝이 있으시네요.”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는데 뒤끝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크로버의 표정에서 그 뜻을 읽어보려 했지만,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기에 불가능했다.

    “마룬시에 흉내를 내고 있는데 어떻게 마음대로 대답할 수가 있겠어요? 적당한 대답을 고민하고 있었어요.”

    내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크로버는 제 혼자 중얼거렸다.

    “쇼하트 자작이란 사람, 파티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감히 주인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질 않나. 주제를 모르고 춤을 추자고 하질 않나….”

    “그만 구시렁거리고 나 좀 봐요.”

    난 크로버에게 억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크로버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살폈다.

    “아름다우십니다.”

    “아니, 지금 그런 장난을 칠 때가….”

    “신성력이 다 떨어지신 모양이군요.”

    크로버는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양손으로 내 손을 감싸 쥐었다.

    “혹시 저 사람에게도 신성력을 주입해 주면 뭔가 달라질까요?”

    “대부분 사람들은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무의미한 일이죠.”

    “중독 물질이나 만들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을 이렇게까지 혹사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어요.”

    아무리 회사가 짜증 나네 힘드네 해도 생명줄을 잡고 있던 적은 없었다.

    “혹시 바렌시드에선 이런 근무 환경이 흔한가요?”

    “신분이 다르니 농민들이 차별을 받는 건 흔합니다만, 이 정도로 가혹하게 일을 시키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크로버는 담담하게 말을 했지만 날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쇼하트도 그렇지만 마룬시에…. 마룬시에가 이렇게까지 잔인할 줄이야.’

    그때였다. 새로운 퀘스트를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아까 말한 연계 퀘스트가 바로 이거였나보다. 연계 퀘스트를 달성하면 추가로 명성이 상승한다더니만 제목이 어째 심상치가 않았다.

    ‘일꾼이 아니라 일꾼들?’

    이건 단지 루안만을 일컫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눈을 껌벅이며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이거야말로 시스템이 나를 너무 과대평가한 거 아닌가? 마룬시에로 변장해 정보를 빼내는 것까지는 크로버의 도움을 받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장의 일꾼을 도우라니. 이런 건 신전에서도 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일 아니었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나요?”

    “아 그게…….”

    지금은 당연히 못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어쩌면 난 이 퀘스트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우연이든 계획적이든 크로버는 퀘스트를 달성하는 데 도움을 줬었다. 이제까지의 패턴을 보면 그랬다.

    “너무 분하고 화가 나서요. 힘도 권력도 없는 일꾼이라고 짐승만도 못하게 부려먹다 버리는 이 상황이 너무 화가 나요. 이 분노가 쇼하트 자작을 향해야 할지 그 흑막을 향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네요.”

    내 인생에서 가장 기민하게 머리를 굴린 게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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