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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57화 (5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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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라니. 허세 가득한 수하인 줄만 알았는데 설마 쇼하트는 반란을 꿈꾸고 있던 건가.

    하긴 카피제품이 이렇게 잘 팔리는 것을 봤으니 눈이 뒤집힐 만했다. 마룬시에를 포로로 잡아 해독제 레시피를 알아내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수익 분배를 재협상하자고 하든지.

    스커트 안쪽에 숨겨둔 단도가 떠올랐다. 하지만 가터벨트에 끼워두었으니 허벅지가 드러날 터였다.

    ‘쇼하트 앞에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난 천천히 벽에 세워둔 지팡이 쪽으로 걸어갔다.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봐두었던 물건이었다. 보석이 잔뜩 달린 장식품이었지만 검 대신 사용하기는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슬금슬금 이동하는 동안 쇼하트는 가슴 안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설마, 총?’

    아니지, 바렌시드에 총은 없다. 하지만 총과 같은 기능을 하는 성물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역시 선공을 해야 하나?’

    난 지팡이를 검처럼 쥐어 잡았다. 동시에 쇼하트가 무릎을 꿇었다.

    “마에님!”

    “응?”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한쪽 무릎은 세우고 반대편은 바닥에 꿇은, 이른바 왕자님 자세를 하고 앉았다.

    “마에님, 저와 교제해 주십시오!”

    「마에님을 내 사랑의 포로로 만들고야 말겠어!」

    상대방을 겨누는 자세 그대로 난 자리에 얼어 붙어버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사, 사 사랑…. 아니, 좋아했습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사랑 고백이었다. 이시아일 때는 늘 내가 먼저 고백했었고 녹시아는 도전장을 받는 쪽이었다.

    ‘젠장, 처음 받아보는 사랑 고백이 다른 사람으로 변장했을 때라니.’

    괜히 심사가 뒤틀리는 것이 단칼에 거절해 버리고 싶었다. 난 지팡이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멋쩍게 웃었다.

    “…어, 음…. 하하 당황스럽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마룬시에가 쇼하트의 교제 신청을 승낙했을 때 내 목표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마룬시에가 쇼하트랑 사귀면 자연히 카미앙하고는 멀어지지 않나?’

    스토리가 묘하게 뒤틀린 지금, 언제 마룬시에가 카미앙의 연애 상대로 나타날지 몰랐다.

    ‘확 승낙해 버려?’

    물론 내가 지금 좋다고 해도 진짜 마룬시에가 와서 뒤집으면 그만이었다. 그렇다 해도 혹시 내가 아주 작은 가능성의 씨앗을 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아….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군. 아니아니. 그럼 안 되지. 마에님의 대답은 듣고 죽어야지. 아니, 죽긴 왜 죽어. 교재를 허락하실 수도 있잖아? 오늘은 친절하셨으니까.」

    무릎이 덜덜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는 쇼하트에게 나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주인님!”

    운을 띄우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크로버가 뛰어 들어왔다. 마치 대화를 엿듣고 있기라도 했던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이번에는 쇼하트의 주먹이 부들거렸다.

    「저, 저, 저 망할 하인 같으니라고! 마에님의 시종만 아니었으면#$%#%@@」

    어떻게 저런 욕을 생각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창의적인 욕설이 쇼하트의 머리 위로 떠 올랐다.

    “무슨 일이지?”

    “농장에서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나와 크로버는 동시에 쇼하트를 쳐다보았다.

    “거참 대단한 발견을 하셨군.”

    숨이 넘어갈 것처럼 달려온 크로버와는 대조적으로 쇼하트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니지 시큰둥한 정도가 아니라 은근히 비꼬는 말투였다.

    「일하다 보면 한두 사람 정도는 쓰러지고 그러는 거지. 저 시종 놈이 마에님의 시중이나 들다 보니 진짜 일을 한다는 게 뭔지 모르는 모양이군.」

    고백 타이밍을 방해받았으니 쇼하트가 크로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도 이해는 갔다.

    “안내해. 쇼하트 자작도 따라오고.”

    “아, 저 마에님. 그건 공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로 마에님께서 굳이 신경 쓰시지 않아도….”

    “자주 있는 일이라고? 그럼 이참에 공장이 어떤지도 한번 봐야겠네. 빨리 일어나.”

    쇼하트가 원망과 저주를 담아 크로버의 한껏 노려보고 있었다. 크로버는 뒤통수가 따갑지도 않은지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를 사건 현장으로 안내했다.

    ***

    “여기 분명히 사람이….”

    크로버가 데려간 곳은 농장 한쪽에 있는 공터였다. 쓸모없는 나뭇가지나 껍질이 마치 산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봐, 여기도 직원이 있다고. 쓰러진 사람이 있다면 데려갔겠지 설마 길바닥에 그대로 있을 줄 알았어?

    “다른 관리자분이 있다는 걸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충실한 시종이다 보니 그저 제 주인님께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목소리는 공손했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크로버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아, 그러셔.’ 라든지 ‘어라? 내가 잘못 봤네.’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마에님, 시간이 되신다면 언제 제가 좋은 하인을 뽑는 법을 알려드리고 싶군요.”

    “주인님 앞에서는 후작님도 저도 다 같은 하인일 뿐입니다.”

    “내 앞에서 두 사람이 싸우기라도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얼른 공장 안이나 좀 보자고.”

    “알겠습니다. 신속 정확하게 돌아가는 공장을 보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쇼하트는 내 뒤를 따라오는 크로버를 흘깃 돌아보았다.

    “시종은 아무래도 놀란 것 같으니 여기서 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안에 들어가면 놀랄 일투성이라.”

    크로버가 반격을 하기 전에 내가 반대했다. 나보다는 크로버가 공정을 살펴보는 쪽이 도움이 될 터였다.

    결국 쇼하트는 나와 크로버를 달고 앞장섰다. 이번에는 순순히 공장을 안내하는 걸 보니 마룬시에에게 고백하려고 했던 것 외에 다른 꿍꿍이는 없던 모양이었다.

    “…공장?”

    “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외부에 노출을 피하고자 지하에 시설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래, 볼 때마다 놀랍네.”

    놀라운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위장이라고는 하나 저 넓은 땅덩이를 내버려 두고 굳이 지하에 공장이 있다는 것부터가 놀라웠다. 지하라고 해서 현대의 건물 지하처럼 번듯하게 지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조명은 겨우 앞을 비출 수 있을 정도였고 환기는 전혀 되지 않았다.

    “잠시 이 스카프로 입을 가리시겠습니까? 여기서부터 과육을 가공하고 있습니다. 태울 때 나는 연기가 혹 몸에 좋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말하는 걸 보니 이 환경이 건강에 해롭다는 걸 모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콜록, 콜록.”

    말이 공장이지 이건 그냥 거대한 부엌이었다. 볶아지고 있는 게 저 원두인지 나인지 구분할 수도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게다가 원두를 단순히 볶는 게 아니라 태우기라도 하는 건지 사방에 연기가 자욱했다. 기침과 눈물이 동시에 나왔다.

    “양쪽으로 나 있는 길은 뭐지?”

    나는 개미굴이 떠오르는 통로를 보며 물었다.

    “일꾼들이 쉬는 곳입니다. 우리 공장은 일꾼들의 휴식 시간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근로환경은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고도 쇼하트는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주의를 둘러보던 나는 무언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만, 내 시종은 어디 있지?”

    “글쎄요. 이 연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거 아닐까요?”

    “설마, 내 옆에 있었는데.”

    “아니면 공장 안을 구경하느라 잠시 곁을 비웠을지도 모르죠.”

    쇼하트는 내 곁에 바짝 붙어섰다.

    “마에 님, 제가 곁에 있지 않습니까? 아무 일도 없겠지만 혹 무슨 일이 생긴다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마에 님을 지켜드릴 것입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잘도 떠들어댄다 싶었다. 말해봤자 연기만 마실 뿐이었기에 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쇼하트야 그냥 둘러댄 것뿐이겠지만 크로버는 정말로 일꾼들에게 뭔가 물어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이, 정신 차려봐! 이봐!”

    그때 어디선가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누군가 바닥에 쓰러진 게 보였다. 놀랍다기보다는 환자가 생기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절한 거 아냐?”

    “종종 몸이 약한 사람들이 있더군요.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에 너무 나약한 종자들이죠.”

    쇼하트는 마치 밭을 갈던 소가 쓰러졌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얼른 쉼터로 데리고 가.”

    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쇼하트 자작의 눈치를 보며 쓰러진 자를 질질 끌고 복도로 사라졌다.

    “바쁘신 마에 님께서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셨군요. 어서 이쪽으로 가시죠.”

    이번에야말로 조금은 부끄러운 듯한 기색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내 착각이었다. 쇼하트는 조금 전과 똑같이 스스로가 대견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룬시에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쇼하트였다. 평소에 마룬시에가 일꾼을 염려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하지 않았을까?

    “쉼터에는 창문이 있어?”

    “그럴 리가요. 굴뚝은 문 앞에 있는 저 하나로 충분합니다. 마에 님께서도 연기가 밖으로 너무 많이 빠져나가면 의심을 살지 모른다고 이 구조를 마음에 들어 하셨었죠.”

    “그래. 저 사람은 쉼터에서 쉬다가 집으로 가나?”

    “집으로 가는 건 한 달에 한 번입니다. 일단 농장으로 위장하긴 했지만 어쨌든 시가지와는 한참 떨어져 있으니까요. 마차를 이용해야 하는데 매일 왔다 갔다 하기엔 효율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악덕 사장 같은 말을 하고서는 또다시 칭찬해달라는 것처럼 뿌듯한 얼굴을 하는 쇼하트였다.

    “한 달 내내 이 공장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한다는 거네. 역시 쇼하트 자작이야. 마치 기계를 굴리는 것처럼 인력을 운용하고 있잖아? 이런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과찬이십니다.”

    평소 마룬시에의 행동이 어땠는지 알 만했다. 어디서부터 설정이 어긋난 건지는 모르겠다. 크로버의 말대로 지금 내가 플레이하는 세상에서 마룬시에는 흑막이라 할 만했다.

    공장을 빠져나오는 길에 퀘스트 달성 메시지가 떴다.

    ‘명성이 겨우 20 상승했다고?’

    직접적으로 사람을 구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것도 아픈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일 아니었나? 게다가 마룬시에인 척 길드장과 쇼하트를 상대한 일은 절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내 불만을 듣기라도 한 듯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연계된 퀘스트라니. 또 다른 퀘스트가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뭐지? 내가 직접 찾아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앞으로 퀘스트가 등장한다는…….’

    연계 퀘스트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갑자기 쇼하트가 냅다 소리를 지른 탓이었다.

    “아아아, 이걸 어쩌죠? 역시 고귀하신 마에 님께는 너무 해로운 장소였나 봅니다. 머리색, 그 까마귀 깃털처럼 검고 윤이 나던 머리카락이 꼭 마른 풀처럼 누레지셨습니다!”

    “뭐라고?”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변신이 풀려버린 것이다.

    ‘그새 신성력이 다 떨어졌다고?”

    난 황급히 눈을 깜박이며 시스템 창을 불러보았다. 시스템 창 대신 반갑지 않은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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