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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파티에서 다리스와 함께 있던 사람이었다. 솔직함과 무례함을 넘나드는 발언으로 다리스가 몇 번이나 끌어내자고 한 적이 있었다. 그저 지나치는 인연이라고만 생각했지 카피 공장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길드장에게 했던 것처럼 건방지다고 할 만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내가 왜 왔는지는 알지?”
“네, 잘 오셨습니다. 공정을 살펴보시겠다고요.”
쇼하트는 내 눈치를 보며 있는 힘껏 미소를 지었다.
“그 전에 따듯한 차라도 한잔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마에님의 고급스러운 취향에 부합할 만한 좋은 차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마르 공작저의 응접실에서 맛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은 것들이죠.”
하마르 공작은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귀족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왕비의 아버지이자 바르하르트 후작가와 함께 바렌시드의 세력가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가문이니 그만큼 진귀한 차들이 많이 있긴 할 터였다.
‘굳이 하마르 공작까지 들먹일 필요가 있나.’
허풍이든 비유든 탐탁지 않았다. 어쩌면 지난 파티에서 나와 카미앙의 관계에 대해 필터 없이 떠들어 댔던 게 마음에 남아있어 그런 걸지도 몰랐다.
“하마르 공작저의 응접실에 어떤 차가 있는지 다 아는 것처럼 말하네?”
“하하, 사실이 그렇습니다.”
역시 이 사람, 허풍이 셌다. 어차피 내가 확인할 수 없는 일이니 큰소리부터 치는구나 싶었다.
“저도 어릴 때는 하마르 공작저에서 살았으니 말입니다.”
“공작저에 살았다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쇼하트가 이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자랑스레 말했다.
“하긴 먼 곳에서 오신 마에님께서는 모르시겠군요. 전 하마르 공작가의 삼남입니다.”
‘나한테 자랑하는 거였어? 자기 아빠가 공작이라고?’
그저 코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아무리 위세 등등한 공작이라고 해도 게임에서는 일개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제대로 된 일러스트 하나 없는 엑스트라. 그러니 하마르 공작의 삼남 따위야 내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이 자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단 말이지.’
차 따위엔 관심 없다고 패스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쇼하트가 굳이 하마르 공작까지 들먹이며 차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을 터였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차도 준비해 놓았으니 좋아하시겠지?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이야.」
아무래도 마룬시에가 부탁한 물건이 있었나 보다.
「몇 번이나 재촉하셨는데 오늘에야 드리게 되어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게다가 빨리 내놓으라고 독촉까지 한 모양이었다. 이쯤 되면 쇼하트의 권유를 거절하는 것도 이상했다.
“좋아. 시종은 여기서 농장을 좀 둘러봐도 상관없지?”
나와 크로버 모두 차를 마시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크로버는 뭐라도 하나 더 살펴보는 쪽이 나았다.
“그럼요. 마에님만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저야 전혀 상관없습니다. 얼마든지 둘러보시지요.”
「잘됐어. 마에님과 오붓한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군.」
갑자기 내게 춤을 신청하던 모습이 겹쳐지며 소름이 돋았다.
“주인님, 정말 제가 없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가만히 있던 크로버도 무언가 꺼림칙했는지 입을 열었다.
“괜찮아. 별일이야 있겠어? 넌 농장 구경이나 실컷 하라고.”
마룬시에로 변장했지만 난 여전히 녹시아였다. 비실비실해 보이는 쇼하트 자작 정도야 한 손으로 상대하고도 남을 터였다.
***
“향이 좋네.”
“역시 마에님은 차를 즐기실 줄 아시는군요. 어렵게 공수해 온 보람이 있습니다.”
「대륙의 남쪽에서만 가공할 수 있는 귀한 꽃차지. 남쪽의 강렬한 햇빛이 아니면 그저 떨떠름한 맛이 날 뿐인데 이렇게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나니 말이야. 마에님께서 좋아하시겠지?」
달착지근한 향과 약간 쓴맛이 났다. 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기에 딱히 호불호가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와 달리 마룬시에는 차에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니 아는 체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뒷맛이 떫었을 텐데 이건 입 안에 부드러운 풍미만 남잖아?”
쇼하트 자작의 생각을 그대로 옮긴 소감이었다. 쇼하트는 내게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눈에 띄게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남쪽의 강렬한 햇빛 덕분이라고 하더군요.”
“공수해 줘서 고마워.”
“네? 혹시 무란 찻잎 말고 이것도 가져가시겠습니까?”
이런, 마룬시에가 부탁한 차는 이게 아니었나 보다. 난 차를 음미하는 척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쓸모도 없는 데다 자칫하면 실수하기 쉬운 차 이야기는 이쯤에서 잘라야겠다.
“그건 그렇고, 카피 제품의 생산은?”
「내가 얼마나 공장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있는지 어필할 기회로군.」
“문제없습니다.”
쇼하트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이게 회사 일이었다면 참으로 반가운 대답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봐, 문제없다는 한마디로 끝내면 이쪽에서 문제가 생긴다고.’
카피 제품에 대해 알아낼 만한 게 있을까 던진 질문인데 문제없다는 한마디로 일축해버리면 곤란했다.
“재료는? 부족하지 않아?”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재료야 길드에서 다 가져오고 있고 맛단나무야 이렇게 널려있는데 말입니다.”
「이런 실수다. 내가 너무 쉬운 일을 하는 것처럼 대답했군.」
실수건 너무 쉬운 일이건 내 알 바 아니었다. 그보다는 요리에 흔히 사용한다는 맛단나무가 쇼하트의 입에 오르다니. 역시 비밀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가공하기 까다로운 부분은 없어? 아무래도 대량으로 생산하다 보면 힘든 일이 있잖아?”
맛단나무에 특별한 처리를 한다는 걸 가정한 질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쇼하트가 머릿속으로 처리 과정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래도 공장 작업이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 이참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걸 알려드려야겠군.」
하지만 그건 내 기대에 불과했다.
“걱정 마십시오. 일꾼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어 별문제 없습니다.”
“그렇구나. 난 소량만 만들어 봤으니 내가 알려준 방법과 뭔가 다른 방식을 사용하진 않았나 싶었어.”
「역시 마에님은 이렇게 많은 물건이 차질없이 만들어지는 게 흥미로우신 모양이군. 좋아, 이런 식으로 계속 어필해야겠어.」
“하하, 바로 그게 이 쇼하트만의 능력입니다. 마에님.”
“어떤 능력인지 궁금하네.”
“인력 운용을 효과적으로 하는 겁니다.”
인력 운용이라니…. 내가 알고 싶은 건 재료 가공법이란 말이다. 원하는 답을 얻지는 못하고 그 근처를 뱅뱅 맴돌기만 하고 있었다.
이쯤 되자 짜증이 일었다. 이놈에 쇼하트 자작의 머릿속은 온통 마룬시에에게 잘 보일 생각밖에 없었다. 쓸모있는 정보는 도통 얻을 수가 없었다.
<1. (쇼하트에게 감탄 한 척)이야 대단하네.>
<2. (따분하다는 듯) 아, 정말이지.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네.>
마음 같아서는 2번처럼 면박을 주고 싶었다. 쇼하트 정도면 마룬시에의 측근인데 괜한 의심을 살 수는 없었다.
“이야, 대단하네.”
나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박수를 쳤다. 말 많은 이사님이 브라보를 날릴 때 사용하는 제스처였다.
“뭔가 대단해 보이는데? 비법을 살짝 알려줄 수 있어?”
아주, 아주 조금 띄워줬을 뿐인데 쇼하트는 제 혼자 하늘로 승천했다.
“일꾼들을 수확팀과 가공팀 두 개 조로 나눠서 수확팀은 열매의 껍질을 벗기고 가공팀은 과육을 볶는 일을 시켰습니다. 1교대로 작업을 하면 공장이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물론 녀석들은 요리에 쓰일 새로운 기름을 제작하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죠. 그렇게 교육했습니다. 그리고…. 아, 그렇지. 가장 중요한 카피 제품의 제조는 믿을만한 부하 몇 명과 길드에서 보내 준 사람이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긴말을 주절거렸음에도 결국 가공법에 대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역시 두 번째를 선택할 걸 그랬나.’
“…그래.”
대답에 실망감이 묻어날 수밖에 없었다. 쇼하트 역시 내 반응이 다르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 아닌데…. 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입술을 잘근거리던 쇼하트는 곧 그 답을 찾아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물론 이 모든 게 마에님 덕분입니다. 맛단열매의 가장 안쪽 과육에서 그런 중독 성분을 얻을 수 있을지 어느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동안은 쓸모없다고 버리는 부분 아니었습니까?”
“그래?”
드디어 카피 제품의 비밀 성분에 대한 단서를 알아냈다. 맛단나무 열매의 과육이란 말이지. 너무 놀란 것처럼 대답한 게 아닌가 싶어 난 말을 보탰다.
“역시 그렇지?”
「좋아 좋아, 내 능력을 어필했을 뿐만 아니라 마에님께 존경을 표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어. 이 정도면 마에님도 흡족해하시겠지?」
간신의 아부에 흡족해하는 못난 왕이 된 기분이지만. 뭐, 상관없었다. 걱정스러운 게 있다면 내가 지식이 없어서 그렇지 이 정도는 기본 상식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역시 현장을 눈으로 보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 공장으로 이동해 볼까?”
“벌써 말입니까?”
“벌써라니, 난 바쁜 몸이야. 여기서 한가롭게 떠들기만 할 수는 없다고.”
“아아, 그렇지요…. 참, 중요한 걸 잊으셨습니다. 무란 찻잎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쇼하트가 그걸 구해놓았습니다!”
얼마나 엄청난 차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받아버리는 게 편할 것 같았다. 쇼하트는 작은 종이상자를 가져왔다. 겨우 이건가 싶을 정도로 작은 양이었다.
“고마워. 그럼 이제….”
의자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는데 쇼하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마에님! 이 찻잔도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지난번 마에님께서 도자기에 관심을 보이시기에 공작저에서 가져온 물건입니다. 이 주전자와 세트랍니다.”
“그러네. 색이 아주 마음에 들어.”
“역시,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마차에 실어놓으라 이르겠습니다. 작지만 마에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래. 그럼 공장으로….”
“마에님!”
뭐야, 설마 이번에도 붙잡을 셈인가? 마룬시에에게 잘 보일 요량으로 선물 공세를 하는 줄만 알았는데 이쯤 되자 쇼하트가 무슨 속셈이 있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오늘따라 마에님께서 내게 친절하신걸? 이렇게 연신 고맙다고 말씀하시고 좀 전에는 칭찬까지 하셨단 말이지. 내가 그동안 들인 노력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건가.」
예상과는 달리 쇼하트는 머릿속은 조금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해가 섞인 자기만족, 마룬시에에게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 곧 또 다른 텍스트가 나타났다.
「그래, 아무래도 오늘이 그때인 것 같군. 그냥 가시게 할 순 없다!!!」
느낌표가 세 개씩이나? 어째 불안했다.
‘이놈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제가 마에님을 포로로 만들어 드리지요.」
쇼하트의 눈동자가 음흉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