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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55화 (5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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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란을 잠재운다?”

    “그래, 지금까지는 힘으로 싸워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한참 잘못된 생각이었어. 싸우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지.”

    “아아, 그러시군요. 그것참 신기한 재주입니다.”

    「뭐야, 오늘따라 철학적인 말을 하는데? 진짜로 그런 재주가 있긴 한 거야?」

    길드장은 의심 반 믿음 반 어린 시선으로 크로버를 바라보았다.

    “비법을 알려줄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듣고 싶습니다.”

    내 말을 믿진 않으면서도 비법이라고 하니 궁금한 모양이었다.

    “알려주기 어렵진 않아.”

    나는 씩 웃으며 크로버의 이마와 눈을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휙 걷어 올렸다. 붉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푸른 눈동자가 좋은 대조를 이루며 빛났다.

    “허어.”

    길드장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훤히 드러난 이마 덕분에 크로버의 이목구비가 한층 더 뚜렷하게 드러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알겠지? 바로 이 얼굴이야. 이 얼굴만 있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평화주의자가 되지.”

    “왜 비법을 알려주셨는지 알겠습니다.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군요.”

    「거참, 할 말이 없군. 저게 진정 사내의 얼굴인가.」

    “그래그래. 무표정이 이 정돈데 윙크나, 미소, 눈물 같은 필살기를 사용하면 어찌 될지 짐작이 가지?”

    이런 헛소리를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 나도, 그것이 중요한 이야기라도 되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길드장도 대단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굉장한 사람은 코앞에서 엄청난 찬사를 퍼부어 대는데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크로버였다.

    “잡담은 이걸로 끝내고, 카피 공장을 좀 가봐야겠는데. 해독제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 카피 제품의 비율을 바꿔야겠어.”

    아쉽게도 해독제는 아직 마룬시에의 손안에 있는 것 같으니 계획대로 카피 공장으로 가야 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바로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얼렁뚱땅 시종 소개까지, 모든 게 척척 진행됐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소파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길드장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마에님, 키가 원래 이렇게 크셨습니까?”

    공략 캐릭터 중 가장 키가 큰 사람은 바로 나 녹시아였다. 반대로 가장 작은 사람은 헤슬루, 그다음이 마룬시에였다.

    “오늘따라 마에님 키가 월등히 커 보여서 말입니다.”

    ‘설마 이렇게 의심을 받는 건가?’

    갑자기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시전 시간이 끝나 종료된 스킬을 다시 사용했다.

    「이상하군. 갑자기 사람 키가 이렇게 커질 수도 있는 건가? 원래는 내 시야보다 한참 아래에 있었는데 오늘은 나와 비슷하지 않은가.」

    의심하고 있었다. 아직 가짜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한번 생겨난 의심은 다른 의심을 불러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 인사도 받지 않으셨지요?”

    “그 인사?”

    마룬시에와 길드장만의 비밀 인사라면……. 분명 DLC로 판매했던 ‘공녀님의 은밀한 사생활’에 등장했을 것이다. 문제는 열심히 플레이했던 본편과는 달리 대충 훑어본 게 전부였다는 것이다. 사고 나기 하루 전 출시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것 봐라, 당황하네? 뭔가 수상한데? 일단 저렇게 잘생긴 놈을 시종으로 삼았다는 것부터가 수상해. 아름답고 예쁜 건 꼭꼭 숨겨놓고 혼자만 보겠다고 하지 않았나.」

    공국의 왕녀다운 재력으로 본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이든 수집하는 마룬시에였다. 크로버처럼 잘생긴 사람은 시종으로 삼기보단 왕궁 어딘가에 감금이라도 했어야 자연스러웠나 보다.

    “네, 그 인사말입니다. 오늘은 받지 않으십니까?”

    ‘대체, 그 인사가 뭐지? 생각해라 생각해.’

    시험장에서 지난밤 보았던 노트필기를 떠올리는 수험생처럼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오래 생각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내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나에 대한 의심이 커질 터였다.

    <1. (발을 앞으로 내밀며) 새 신발 신은 거 안 보여?>

    <2. (발을 앞으로 내밀며) 그럼 지금이라도 인사할래?>

    그래 바로 이거였다. 마룬시에는 길드장에게 충성의 의미로 발등에 입을 맞추는 인사를 받아왔다.

    “이것 봐. 새 신이야.”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연달아 스킬을 시전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 깨끗한 신에 그 추잡한 입이 닿는 건 별로라서.”

    「저 어린것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건방을 떠는 건 똑같군.」

    이번엔 길드장도 사람 좋은 표정을 유지하는 게 힘들어 보였다. 이를 꽉 깨무는 것이 티가 날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마룬시에로 보이기 위해 뻔뻔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내 키가 커 보인다고 했지? 다 이 신발 덕분이지. 키가 작다고 깔보는 인간들이 있어서 말이야.”

    난 앞으로 내민 발을 까닥거렸다. 오늘 신은 건 단순히 새 신발이 아니었다. 목이 긴 부츠로 겉보기에는 꼭 굽이 엄청 높은 것처럼 보였다.

    마룬시에를 아는 누군가가 오늘따라 키가 커 보인다고 말한다면 다 신발 덕분이라고 둘러대기 위해 준비한 물건이었다. 물론 진실은 굽이 아니라 원래의 내 키였지만 말이다.

    “그 신발을 신으시니 정말 키가 커 보이십니다. 물론 전 마에님의 키가 작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저 원래도 작지 않으셨지만, 오늘따라 키가 커졌다고 생각한 거죠.”

    행여라도 트집이 잡힐까 길드장의 말이 길어졌다.

    “그렇긴 한데 역시 이런 굽 높은 신발은 발이 아프군. 여기 입을 맞추는 것 대신 날 마차까지 좀 들어다 주는 건 어때?”

    “예? 아이고 제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습니다. 당연히 모셔다드려야죠.”

    「젠장, 어린것 비위 맞추기 한번 힘들군.」

    너무한 처사인가 싶었지만, 덕분에 길드장의 의심은 완전히 거둔 것 같았다. 길드장이 속으로 온갖 욕을 해대며 내게 등을 들이밀 때였다.

    “주인님, 이런 일은 제게 맡기셔야죠.”

    그동안 한마디도 않고 있던 크로버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처음 이곳에 와서 듣게 된 녹시아나 파르미엔 영애와 같은 호칭은 퍽 낯설었다. 녹시아는 내 이름 같지가 않았고, 영애는 소꿉놀이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주인님’만큼은 아니었다.

    주종관계라 했으니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아니 보통은 그냥 아가씨라고 부르지 않나? 내가 머릿속에 떠다니는 물음표를 정리하지 못하는 사이 크로버가 길드장에게 말했다.

    “제가 주인님을 안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러겠나? 하긴 귀한 마에님의 몸에 내가 함부로 손을 대는 것도 가당치 않은 일이긴 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길드장은 아직 등을 내민 채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길드장에게 업히는 것보단 크로버에게 안기는 쪽이 더…….’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좋아, 네가 하도록 해.”

    그렇게 명령하고 나니 문득 걱정되었다. 크로버가 날 안고 이 계단을 내려가 저쪽에 있는 마차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예지의 신관 구출 작전이 까다로웠던 탓인지 크로버는 내게 연약한, 아니 허약한 이미지였다.

    “주인님, 꼭 잡으십시오.”

    다행히 날 들어 올리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듯했다. 내 등과 무릎 뒤쪽을 받치며 단번에 공주님 안기를 해냈으니 말이다.

    “그럼 전 마차를 준비합죠.”

    앞서 내려가는 길드장을 보며 난 크로버에게 속삭였다.

    “계단 내려갈 수 있겠어요?”

    “글쎄요.”

    “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그러길래 뭐 하러 나섰어요? 지금이라도 내려줘요.”

    “주인님께서 발이 아프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외국에서 온 모리아리티 백작 때도 그러더니만 크로버는 또 과몰입해 버렸다.

    “장난치지 말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로버는 성큼성큼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요만큼도 힘을 쓰지 않는 것 같은 모습에 마치 내가 깃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또 봅시다. 마에님, 공장까지는 저 마부가 안내할 겁니다.”

    크로버는 날 안은 채로 인사를 하더니 한 바퀴 뱅그르르 돌기까지 하며 마차 위에 날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럴 필요까진 없었는데요.”

    “제가 몹시 못 미덥다는 얼굴을 하고 계시길래 한번 해봤습니다.”

    “제가 언제요?”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이런 멀대같은 남자가 날 들 수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혹시 나 같은 스킬을 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확한 대답이었다.

    “그런 시선을 받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주인님보다야 못하겠지만 저도 그렇게 약하지는 않습니다. 그나저나….”

    마차 바퀴가 빠르게 움직일 때를 기다리다 크로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주인님의 연기실력도 보통이 아니시던데요? 이건 제 전문분야라고 생각했지만, 주인님도 저 못지않으십니다.”

    “칭찬은 고마운데 계속 주인님이라고 할 건가요?”

    “그럼요. 시종이 주인님을 주인님이라고 하지 뭐라 부르겠습니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요?”

    “일관성 있게 행동해야지 이랬다저랬다 하면 중요한 순간에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나름의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럼 주인님, 카피 공장에 가서 챙겨야 할 것들을 정리해 볼까요?”

    마차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달렸다. 해야 할 일을 몇 차례나 거듭 정리한 뒤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

    시가지를 한참 벗어난 곳이었다. 갈색 열매를 달고 있는 작물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혹시 저게 카피 제품에 들어가는 열매가 아닐까요?”

    크로버는 고개를 저었다.

    “바렌시드에서 가장 흔한 맛단나무입니다. 저 열매로 맛단유를 만들죠. 요리에 많이 쓰입니다.”

    누구나 알아보는 열매에 요리에 흔하게 쓰인다니. 중독 성분이 있을 거로 의심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이렇게 많이 심어놓은 걸 보면 뭔가 쓰임새가 있지 않을까요? 가공 방법을 다르게 한다든지….”

    단순히 농장으로 보이기 위해 심어놓았다기에는 그 양이 지나치게 많았다. 크로버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혹시 주인님과 제가 동굴에서 나와 지나쳤던 농장이 여기 아닙니까?”

    “이런 모양의 건물이 있기는 했는데….”

    그때는 밤이었고 제대로 된 길로 온 것도 아니었기에 확실하지 않았다.

    “그렇지, 철조망. 철조망이 쳐져 있는 게 수상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농장이 시작되는 곳부터 쭉 이어져 있는 철조망을 가리켰다. 크로버의 말에 의하면 바렌시드의 농장에 철조망이 있는 건 처음 보았다고 했다. 대부분 나무 울타리 정도로 경계를 구분한다고 했다.

    “흔하디흔한 맛단나무 농장에 철조망이 있으면 확실히 의심….”

    크로버는 말을 멈췄다. 마부가 누군가를 데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마에님,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면이었다. 마룬시에로서가 아니라 녹시아로서도 구면인 사람이었다.

    “쇼하트 자작이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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