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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54화 (5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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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카미앙과 크로버의 이목구비가 닮아 보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 그 푸른 눈동자로 날 바라보는 눈매가 일순간 비슷하게 느껴졌다.

‘아, 혹시 그런 건가? 같은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렸으니까. 미형의 캐릭터들은 어쩔 수 없이 그림체가 비슷비슷해진다든지.’

크로버의 얼굴만 뚫어지게 보고 있던 터라 그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미안해요. 카미앙과 닮았다고 하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네요.”

“아닙니다. 감히 왕세자님과 닮았다는 말을 들어도 되는 건가 생각했을 뿐입니다. 한낱 신관이 그런 높으신 분과 비슷하다니, 오히려 영광스러워해야 할 일이지요.”

“그, 그렇죠? 그렇겠죠?”

생각해보니 카미앙을 닮아서 기분 나쁘다고 생각할 사람은 이 바렌시드 전체에 오직 나밖에 없을 터였다. 일단은 왕세자인데다 설정상으로 이 세계 최고의 미남이었으니 말이었다.

크로버는 그런 건 어찌 되었든 상관없고 빨리 변장을 마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작은 병을 다시금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제 녹시아 님의 차례입니다.”

액체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나 역시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톡. 톡. 눈동자 위로 떨어지는 느낌은 안약을 넣을 때와 똑같았다. 크로버의 기도가 끝나자 내 눈동자는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머리카락 색은 그렇다 쳐도 눈동자는 정말 신기한데.’

내가 몇 번이나 거울을 확인하는 동안 크로버가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한 가지 중요한 건 염색의 지속 시간입니다.”

“혹시 신성력으로 이 염색을 지속 시키는 건가요?”

“맞습니다. 녹시아 님은 신성력 측정 성물을 가지고 계시니 그걸 보시면서 지속 시간을 체크 하시면 갑자기 변장이 풀리는 곤란한 상황을 겪진 않으시겠네요.”

신성력이 떨어지는 시간을 가늠할 수 있으니 무방비 상태에서 변신이 해제될 일은 없었다. 그건 다행이었지만 신성력을 잡아먹는 스킬이 하나 더 늘어난 건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대충 보면 마룬시에라고 믿을만하겠는데?’

정작 마룬시에를 정확히 모르는 크로버는 나보다 훨씬 만족해하고 있었다. 변장이 아주 완벽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놈들을 속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잠깐만, 그럼 크로버는요?”

“제게도 역할이 있지요.”

크로버는 다 생각해 뒀다는 듯 어깨를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흑막의 연인 역할입니다. 어때요, 그러면 둘이 돌아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죠?”

“음…. 흑막이 과연 일터에 연인을 데리고 올까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는 곳인데?”

“두 사람이 협업하고 있다는 설정이면 괜찮지 않을까요?”

“협업하는데 남자 쪽은 처음 보는 사람인 것도 이상하죠.”

내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크로버는 입을 닫았다. 나는 큰 도움이라도 주는 것처럼 크로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것보다는 시종이 어떨까요?”

“시종….”

“흑막의 충실한 시종이라 어디든 따라다니는 거죠. 시종이라 별 존재감도 없으니 사람들이 크게 신경 쓰지도 않을 테고요. 혹시 허름한 옷 없어요?”

이렇게 흑막과 흑막의 시종 작전이 시작되었다.

***

“어서 오세요.”

향료 길드에 들어서자 이전에 봤던 직원이 내게 인사를 했다.

“길드장님을 만나러 왔어.”

“약속하셨나요?”

이 말단 직원은 아무래도 마룬시에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날 보면 없던 약속도 있다고 하고 싶으실걸?”

직원의 표정이 떨떠름 해졌다. 웬 갑질 손님이라도 온 게 아닌가 하는 눈치였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긴 했다. 높임말을 쓰지 않는 것. 이게 마룬시에의 화법이자 기획팀에서 설정한 마룬시에의 특징이었다.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마에라고 전하면 알아듣겠지만 그건 녹시아가 알고 있기엔 지나치게 고급 정보였다. 크로버가 대체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면 둘러댈 말이 없었다.

“길드장 위에 있는 분이 왔다고 전해줘.”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직원이 후다닥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크로버가 내게 속삭였다.

“와, 이 포스는 뭐죠?”

“흑막이라면서요.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아무래도 어색했다. 마룬시에는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이런 반말이 어울렸다. 하지만 변장, 아니지 이 정도면 변장이 아니라 변신이었다. 변신을 했다 한들 내게 그런 카리스마가 있을 리 없었다.

“부디 그 태도가 길드장에게도 먹혔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오버하는게 아니냐는 듯한 말투였지만 난 두고 보라는 듯 웃었다. 길드장 앞에서는 역시 스킬을 사용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곧 다시 나타난 직원은 크로버와 나를 길드장에게 안내했다. 좁고 놓은 계단이 꼭 탑이라도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응접실이라면서 아무도 찾아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어 놓은 곳 같았다.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건지 응접실에 다다르자 저절로 문이 열렸다.

“아이고, 마에님. 이렇게 기별도 없이 갑자기! 찾아주시니 더욱 반갑습니다.”

특정 단어를 강조하는 모양이 불쑥 찾아왔다고 돌려까기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태도는 퍽 공손했다. 불손함을 나무라려 해도 상대가 진심으로 반가웠다고 하소연하면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크로버의 말대로군.’

할아버지 대부터 길드장을 지내며 향료 사업으로 크게 돈을 번 집안이라고 했다. 즉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 약삭빠르고 사업 수완이 좋은 자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저 베테랑을 내가 속일 수 있을까?’

일단 두 가지 스킬을 한꺼번에 시전했다.

‘시스템. 마룬시에 알고 있지? 난 지금 마룬시에로 변신한 상태니까 마룬시에처럼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선택창을 바라보았다.

<1. (도도한 목소리로 상석에 앉으며) 내가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알고 있지?>

<2. (상대를 살피며 퉁명스럽게) 아직 잘 살아있네?>

잠시 망설이다가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마룬시에와 길드장 사이의 일을 모르면서도 단번에 그 핵심을 알아낼 수 있는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잘 살아있네?”

정말 멀쩡한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난 길드장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말했다.

「어린것이 말하는 본새 하고는…. 돈이 되는 일을 물고 오니 내 참고 있긴 하다만 언젠가는…」

마룬시에와 길드장이 엄청난 의리나 우정으로 맺어져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길드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마룬시에에게 쌓인 게 많아 보였다. 겉으로는 더없이 충직한 하인처럼 길드장은 머리를 조아렸다.

“아하하. 당연합죠. 마에님이 주신 해독제를 먹으니 그간 있었던 증상이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다시는 내 몸에다 실험을 하나 봐라. 독한 놈 같으니라고. 해독제가 진짜였으니 망정이지….」

‘해독제?’

난 또 한 번 ‘지금이야말로 입을 열 타이밍’ 스킬을 사용했다.

“효과가 있다니 다행이네. 다른 사람은?”

천연덕스럽게 길드장의 말을 받아넘기며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만한 질문을 던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아, 후안 말씀이시군요. 녀석에게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딸 녀석도 마찬가집니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효과가 있는 게 확실합니다.”

가만 들어보니 길드장과 마룬시에는 일종의 인체 실험을 한 듯했다. 크로버가 말했던 중독 증상을 치료하는 약을 가지고 있는 건가? 난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물었다.

“더는 중독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지?”

“네. 하지만 저희야 카피를 사흘간만 사용하기도 했고 해독제 원액을 마시기도 했으니 말입죠. 그것이…. 물건을 사 간 사람들은 그보다 더 오래 약을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효력이 너무 좋아도 문제야. 한 번에 다 나아버리면 약을 많이 팔 수가 없잖은가. 이놈도 그 정도는 다 생각하고 있겠지?」

이제 확실해졌다. 향료 길드에서는 앙루민 카피 제품에 중독 성분을 넣고 뒤에서는 해독제를 만들고 있었다. 병 주고 약 주고를 문자 그대로 실천해 돈을 벌어들일 요량이었다.

‘마룬시에가 정말로 흑막이었다는 소리네.’

크로버가 마룬시에를 흑막으로 지목했지만,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향료 길드에서 진상을 파악하면 오해였다는 결론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전개라면 마룬시에가 정말 바렌시드를 어지럽히는 흑막인 셈이었다.

‘어째서 내가 모르는 설정이 생긴 거지?’

일단은 묻어둬야 할 질문이었다. 지금은 마룬시에 흉내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네 말이 맞아. 이렇게 고생했는데 오랫동안 많이 벌어야지.”

“하하, 역시 마에님은 참으로 현명하십니다. 그런데…. 이쪽은 누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못 보던 얼굴이군. 평소에 데리고 다니던 그 덩치 큰 놈은 어디 가고 저렇게 키만 멀대같이 큰 놈이 따라온 거지?」

길드장이 크로버를 가리켰다.

“신경 쓸 것 없네. 내 시종이야.”

시종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던 내 말과는 달리 길드장은 크로버에게 관심을 보였다.

“새로 오신 분인가 보군요. 그럼 이분은 어떤 특기가 있을지 참으로 기대됩니다.”

「그동안 곁을 지키던 놈들은 하나같이 다 무시무시했지. 맨손으로 벽돌을 부수고 사람 두셋은 너끈하게 들어 올리고. 그런데 저놈은…. 아무리 봐도 그런 쪽은 아닐 것 같은데. 갑자기 새로운 놈을 데려온 게 영 이상하단 말이지.」

덕분에 생각났다. 마룬시에의 보디가드들은 전부 엄청난 덩치와 힘을 자랑했다. 공략 초반 마룬시에와의 이벤트에는 ‘보디가드를 따돌려라!’ 나 ‘보디가드와의 가위바위보에서 이기자.’와 같은 미니게임이 따라오곤 했었다.

‘설마 내가 가짜라는 걸 눈치채진 않겠지?’

하인의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해서 내가 마룬시에를 사칭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지나친 걱정이었다.

“이번 시종은 좀 특별한 능력이 있지.”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라고 해야 할까. 지나친 걱정이라 생각하면서도 굳이 해명을 했다.

“역시 이번에도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난 크로버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크로버가 입을 앙다물고 볼을 씰룩거리며 열심히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이상한 거 시키지 말라는 뜻인가.’

하긴 길드장의 반응을 보아하니 힘 좋은 진짜 하인들은 차력쇼라도 보여준 모양이었다. 벽돌을 부수고 마른오징어에서 물을 쥐어짜고 그런 것들 말이다. 크로버에게는 절대 무리였다. 나는 길드장에게 가까이 오란 손짓을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 시종은…. 모든 분란을 잠재우는 재주를 가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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