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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소문처럼 왕세자님께서 매일 이 향수를 사용하셨는지. 왕세자님이 가지고 계신 것도 이것과 향이 똑같은지. 뭐 이런 걸 여쭤보려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전 모도루 영애가 왜 그걸 제게 물어보려 하셨는지 전혀 감을 못 잡겠네요.”
헤슬루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앙루민 향수가 왜 유행했는지 알고 계세요?”
“당연히 모르지요.”
“어머나, 전 기사님께서 다 알고 앙루민 이야기를 꺼내신 줄 알았답니다.”
어쩌면 내가 모른다고 착각하는 게 아닐까 싶어 헤슬루의 설명에 집중했다.
“앙루민은 왕세자님이 아나드로 떠나실 때 왕비님께서 선물하셨던 향수랍니다. 이게 바로 바렌시드 왕궁의 향이다. 이 향을 뿌리면 어딜 가든 그곳이 왕궁이 될 거다. 라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왕세자님은 이 향을 맡으며 저 먼 아나드에서도 편히 지내실 수 있었고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인기가 많을 법한데 왕세자님이 아나드에서 큰 승리를 거두시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됐답니다”
정말로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왕비님이 왕세자님께 향수를 주셨을진 모르겠지만….”
자주 사용한 정도가 아니라 난 카미앙이 단 한 번도 저 향수를 뿌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카미앙에게서 이런 향을 맡아본 적도 없고 말이다.
“기사님의 반응을 보니 왕세자님께서 소문처럼 이 향을 자주 사용하셨던 건 아닌 것 같네요.”
카미앙이 춥고 혹독한 아나드에서 편히 지낼 수 있었던 건 파르미엔 백작가의 희생 덕분이었다. 고작 이런 향수 따위가 아니라.
“아나드는 생각보다 훨씬 춥고 혹독한 곳이지요. 기반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요. 이런 향수로 기분 좀 낸다고 해서 왕궁처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누가 생각해낸 건지 몰라도 엄청난 마케팅이었다. 그런 이야기 따위에 현혹된 사람들은 수도와 자신의 영지 정도만 왔다 갔다 하며 편하게 지낸 귀족일 것이다.
‘그건 둘째치고 일개 장사꾼이 왕실을 팔아도 되는 건가?’
이건 영부인이 들었던 가방, 대통령이 착용한 넥타이 수준의 마케팅이었다. 고객들이야 거기 속아 넘어가 물건을 산다 해도 이 정도 유행이라면 왕실에서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여태까지 아무런 제제나 조사가 없었던 건가?
문득, 향료 길드가 세력가들과 손을 잡고 있다는 크로버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마룬시에는 이미 카미앙에게 허락을 받고 이런 마케팅을 한 건 아닐까? 하지만 대체 언제? 카미앙이 가장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공략 캐릭터인 마룬시에였다. 아직 그런 걸 허락받고 말고 할 관계가 아닐 터였다.
‘게다가 지금 마룬시에는 평범한 공략 캐릭터가 아닌 향수 사건의 흑막이잖아?’
카미앙과 마룬시에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만났다는 건 아무래도 비약지 싶었다.
“어쩐지, 피리스 영애가 이 향수를 뿌리면 꼭 왕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을 때도 헤슬루는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답니다.”
뿌듯한 얼굴로 대답하는 헤슬루였다. 난 장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유행 상품으로 화제를 옮겼다.
***
“녹시아 님,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흘 만에 만난 크로버는 마치 사람이 아니라 그림 같았다. 물론 늘 그림처럼 아름답긴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몸에서 핏기와 물기가 다 빠져나가 종잇장처럼 하늘거리는 게 훅하면 날아갈 것 같았다.
치유의 성소를 곁에 두고도 저런 꼴이라니…. 예상은 했지만 정말 크게 앓아누웠던 모양이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게 되었다.
“몸은 괜찮습니다. 녹시아 님은 어떠십니까?”
몸은? 몸 말고 안부를 물어야 할 것이 더 있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설마 그날 일로 상처를 받았다거나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끙끙 앓으면서 다 잊기를 바랐는데 내 기대에 불과했나 보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과장 섞인 대답을 했다.
“아무리 피곤한 하루였다 한들 그 추운 아나드 지방에서 굴렀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죠. 저는 몸도! 완전 멀쩡해요.”
몸도 멀쩡하고 더불어 마음도 멀쩡하다 이거지. 크로버가 내 말을 한 자 한 자 뜯어 다시 읽어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내 뜻을 이해했을 것이다.
“마침 어제저녁에 옷이 완성되었습니다. 입어보시겠어요?”
그래도 목소리만큼은 평소처럼 부드럽고 또렷했다.
“오른쪽에 있는 게 흑막의 복장입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그 옆에 있는 흰색 옷은 제껍니다. 제 신관복이죠.”
헤슬루 이벤트 때 내가 옷을 벗겨 갔던 걸 염두에 둔 말이었다.
“혹시 시중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지쳐버린 건가 했는데, 아무래도 잘못짚었나 보다. 푹 꺼진 듯한 눈두덩이와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회색 눈동자는 꼭 오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하긴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가졌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지 않았던가.
“고맙지도 않고 필요도 없어요. 얼른 저쪽으로 나가계시죠.”
바이난 공국의 복장이 바렌시드보다 훨씬 간단하다는 것을 크로버도 알고 있을 터였다.
바이난 공국은 바렌시드와 국경을 마주한 옆 나라였지만 복장은 사뭇 달랐다. 근세 유럽풍의 드레스처럼 보이는 바렌시드의 복장과는 달리 현대의 원피스에 가까운 옷이었다.
패티 코트나 코르셋 같은 준비물은 필요 없었고 스커트의 길이도 발목 정도로 훨씬 짧았다. 게다가 모자. 흑백 영화에서 많이 본 듯한 이 종 모양으로 챙이 내려오는 모자야말로 바이난 복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주섬주섬 옷을 갖춰 입고 모자까지 써보니….
“크로버, 이거 정말 놀랍네요.”
짠, 완벽하게 바이난 공국의 드레스를 갖춰 입은 녹시아가 되었다. 그렇다. 이건 변장이 아니라 그냥 환복이었다. 난 거울 앞에서 앞뒤로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정면으로 봐도 옆으로 봐도 어떻게 봐도 이건 그냥 녹시아에 불과했다.
“이럴 수가.”
크로버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걸 변장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바이난의 옷이 이렇게나 잘 어울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지, 기사 옷도 잘 어울리시고 지난번 파티에서의 드레스도 정말 아름다웠으니. 무슨 옷이든 다 잘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역시 녹시아 님의 빛나는 외모 덕분이시겠죠.”
입에 침 한 번 바르지 않고 아부를 잘도 늘어놓았다. 일절 정도만 했다면 정말 바이난 옷이 더 잘 어울리나 싶었겠지만 이절 삼절 이어지니 그냥 놀리는 말 같았다.
“있잖아요. 크로버.”
“네, 말씀하세요.”
“난 당신에게서 외모 칭찬을 듣는 게 제일! 싫어요.”
게다가 상대는 크로버였다. 백 점짜리 시험지를 앞에 둔 사람에게 90점짜리가 칭찬을 들어봤자 진심으로 기쁠 리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나 할 때가 아니라고요. 이건 그냥 나잖아요? 이렇게 허술하게 변장을 해서야 향료 길드 사람들이 마룬…. 그 흑막이라고 믿겠어요?”
인제야 내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는 듯 크로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게 끝이 아니죠.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갈고 닦아왔던 변장술을 전부 보여드리죠.”
그러더니만 선반에서 손가락 한마디쯤 되는 듯한 아주 작은 병을 가져왔다. 꼭 실험실에서 쓰는 눈금 실린더에 뚜껑을 달아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그게 뭐죠?”
난 그 안에서 출렁이는 액체를 보기 위해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머리카락 색을 바꿀 수 있는 액체입니다. 정보에 따르면 바이난 공국에서 온 흑막은 검은 머리라고 하더군요.”
간단히 말해 바렌시드 식 염색약이라는 것 아닌가?
“이야, 바렌시드에도 염색이 보편화되어 있을 줄은 몰랐네요.”
“보편화돼 있다고 까진 할 수는 없겠지만요.”
아무런 색도 없는 말간 물 아니 성수를 내 정수리 부근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크로버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는 듯하더니 어느새 내 머리는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와 효과가 대단한데요?”
머리카락의 색을 몇 번이나 확인하며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굳이 머리를 손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니었다. 긴 머리를 말아 올리고 다니는 마룬시에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내 깊은 뜻을 알 리 없는 크로버가 재촉하듯 염색약을 흔들었다.
“다음엔 눈동자입니다.”
“눈동자도 가능한가요?”
이번엔 정말로 놀랐다. 마룬시에는 보랏빛 눈동자인 데 반해 난 갈색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이 그냥 둘 거로 생각했다.
“그럼요. 이 변장 전문 예지의 신관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예지의 신관과 변장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았지만 난 일단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렌즈도 없는 이곳에서 대체 어떤 방법으로 눈동자 색을 바꿀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이걸 눈에 넣겠습니다.”
“잠, 잠깐만요. 이건 머리에 부었던 거 아닌가요?”
난 크로버의 손목을 붙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맞습니다.”
“근데 이걸 왜 눈에 넣어요!”
“색을 바꾼다는 측면에서 똑같은 역할을 하니까요.”
이거 위험한 사람이네. 인제 보니 염색약을 눈에 들이부을 사람이었다.
“머리카락이랑 눈은 다르죠! 이거 눈에 넣었다가 실명되면 어쩌려고요!”
“왜 실명이 됩니까?”
“염색약은 원래 눈에 안 좋다고요.”
“잘못 알고 계십니다. 염색약이 아니라 성수입니다.”
뒷걸음치는 나를 크로버가 그 문제의 액체가 든 병을 들고 따라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먼저 시범을 보여보죠. 그럼 믿으실 수 있겠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로버는 제 눈에 액체를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실명이 되는 일은 없는 게 확실해 보였다. 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말로 색이 바뀌는지 크로버의 눈동자에 집중했다.
“진짜였어! 크로버의 눈동자가 푸른색으로 변했어요!”
“제가 진짜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염료라고 하는 바람에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은데 이건 기도를 하면 원하는 형태로 모습을 바꿔주는 액체입니다.”
기도만 하면 모양이 바뀐다니, 그거야말로 마법이었다. 내가 바렌시드에 아니 이 게임에 들어와서 본 것 중 가장 신기한 물건이었다.
“그럼 강아지가 고양이로 변할 수도….”
“종이 변하는 건 안 되더군요.”
“이 책이 검으로 변하는 건….”
“물질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는 것도 안 됩니다.”
“그럼 혹시 빵이….”
“식고 오래된 빵이 갓 구워낸 것처럼 맛있어지긴 하더군요.”
딱 그 정도의 쓰임새였다. 그 이상을 할 수 있었다면 단순히 내 머리에 붓는 용도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크로버…. 눈동자 색이 바뀐 것뿐인데 뭔가 사람이 확 달라 보여요.”
“더 잘생겨 보이나요? 여기서 더 멋져지면 그것도 큰일인데요.”
난 손을 휘두르며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 치우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것보다 누구와 많이 닮은 것처럼 보이는데….
“너무 쳐다보시면 이 잘생긴 얼굴이 닳을 수도 있습….”
“그렇지, 카미앙! 카미앙과 똑같은 푸른 눈동자여서 그런지 닮은 것 같아요.”
푸른 눈동자로 날 쳐다보는 크로버에게서 카미앙이 겹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