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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52화 (5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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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사의 제품을 직접 카피했다는 건가요?”

    “네, 중독을 일으키는 특수 물질을 첨가해서 말이죠.”

    “이미 잘 팔리고 있는 물건이 있는데 굳이 중독 물질을 첨가한 하위 제품을 판다고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뭔가 목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흑막이 바이난 공국의 사람이라는 것도 걸리고….”

    “이 정도 사안이라면 왕궁에서 관여해야 하는 일 아닌가요?”

    카미앙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미앙은 이 일을 알고 있을까 잠시 생각해봤지만, 곧 당연히 모를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플레이할 때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런 걸 지금의 카미앙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향료 길드는 바렌시드에 이런저런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권력 있는 귀족 가문들과도 연줄이 닿아있을 겁니다.”

    “정말요? 바렌시드에 그런 일이 있단 말인가요?”

    우리 게임의 모토가 뭐였는가. ‘꿈과 사랑이 넘치는 바렌시드! 에서 즐기는 왕세자님의 비밀스러운 연애사’ 아니었던가.

    바렌시드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안다고 장담할 순 없어도 여덟 개 정도까지는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국가의 큰 이슈가 될 만한 사건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게임의 기본 스토리가 되니 말이다.

    “이상하네요. 바렌시드에 그런 부정부패와 더러운 범죄조직이 있을 리 없는데….”

    우리가 만들어 놓았던 범죄조직은 뒷골목 불량배 정도가 전부였다. 그것도 공략 캐릭터들과의 데이트에서 카미앙을 돋보이게 해줄 정도, 딱 그 정도의 능력만 가진 놈들이었다.

    “바렌시드에 대해 확고한 믿음이 있으신 것 같네요.”

    “아, 네. 그게…. 파르미엔에 있을 때 바렌시드는 그 어느 곳보다 꿈과 사랑이 넘치는 곳이라고 들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난 슬쩍 파르미엔 백작가를 끌어들였다.

    “꿈과 사랑이요. 좋은 말이네요. 하지만 어디든 가까이서 보면 어두운 구석이 있기 마련이죠.”

    “그 어두운 구석이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캄캄한 것 같네요.”

    “그러니 대 신관님께서 나서셨지요.”

    “대 신관님이요?”

    생각지도 못한 분이 튀어나왔다. 대 신관이라고는 해도 이미지는 흐릿했다. 여느 신관과 마찬가지로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먼 곳에서 설교하는 할아버지 정도였다.

    “이 일을 지휘하시는 분은 대 신관님이십니다. 절 감옥에서 구해주신 분이 녹시아 님이라는 걸 알고 계시기에 이번 일을 부탁하신 거지요. 게다가 녹시아 님 외에는 맡기기 어려운 역할이 있어서….”

    역할이란 단어가 빨간색으로 강조라도 한 것처럼 의미심장했다.

    “역할이라뇨? 또 무슨 변장 놀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놀이는 아니지만, 변장은 맞습니다.”

    대충 던져본 말이었는데 그게 또 맞아들었다.

    “흑막으로 변장을 해 향료 길드에 잠입하는 겁니다.”

    즉 마룬시에인 척 향료 길드의 사람들을 만나며 중독 성분에 대해 조사를 해오는 역할이었다.

    “…그것뿐인가요? 수장을 잡아 올 필요는 없고요?”

    크로버가 고개를 흔들었다. 향료 길드에 흑막에 중독성 약물까지. 뒤숭숭한 이야기였기에 엄청나게 위험한 일을 맡기려니 했는데, 생각보다 간단한 임무였다.

    “그쪽에는 신전이 개입했다는 것을 숨겨야 하니까요.”

    “제조 공정에 연루한 자들을 없애버릴 필요도 없나요?”

    “없습니다.”

    “시설이나 재고를 다 폭파한다든지.”

    “그러다가 시가지까지 날려 버리시겠습니다.”

    크로버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까지 내저었다.

    “기껏 제게 일을 부탁했으면서 검을 쓸 일은 하나도 없네요.”

    “녹시아 님께 부탁하는 이유 중 하나는 본인의 몸을 확실히 지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능하면 검을 꺼내시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그렇군요…. 대 신관님께서도 관여하는 일이라고 해 향료 길드를 다 뒤집어 놓고 연루된 귀족들까지 잡아낼 계획인 줄 알았는데. 정말 아픈 분들의 치료를 위한 일이었네요.”

    “답답하다고 생각하셔도 별수 없습니다. 신전에서 관여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답답하다고 할 마음은 없었다. 바렌시드는 왕권이 신권보다 월등히 우세한 나라였다. 신전에서 이 정도로 민생에 신경을 쓰는 것만 해도 사실 훌륭했다.

    “드디어 큰길이 나왔네요. 이정표도 있고요.”

    좁은 길에서 빠져나와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평평하게 닦아놓은 길 위로 올라섰다. 벌써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대체 몇 시간을 걸은 건지 모르겠다.

    “삼 일 후요.”

    “삼일이요?”

    “삼 일 후에 신전으로 갈게요.”

    “승낙해 주시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크로버는 땅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성 근처에 도착한 데다 내 승낙을 받아낸 덕에 완전히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리액션이 과한데요? 제가 하기로 약속 한 일이었잖아요.”

    “저 때문에 화가 많이 나셨으니 거절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화가 많이 나긴 했었다. 카미앙때와는 경우가 다르긴 해도 어쨌든 신뢰하던 상대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뒤통수를 가격한 이유가 날 공격하거나 기절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 덕에 난 화를 내기도, 왜 그랬느냐고 캐묻기도 어려워져 버렸다.

    “오늘…. 아니지 이제 어제가 되었네요. 어제 들었던 일들은 전부 잊을게요. 아니, 벌써 잊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더는 신경 쓰지 말아요.”

    크로버가 보여주었던 애매한 마음까지도 이걸로 다 못 본 척, 못 들은 척 덮어버릴 생각이었다. 애써 덮어놓은 것을 크로버가 다시 걷어버릴까 걱정스러웠다. 나는 주절주절하는 방법으로 크로버의 눈빛을 무시하고 말문을 막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 옷도 제대로 안 입고 있었죠? 제가 마차를 불러올게요. 신관님은 마차를 타고 들어가시죠. 제가 보기엔 적어도 삼일은 몸살로 고생하시겠어요.”

    그리고 삼 일이 지나면 이 어색한 대화들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싹 잊혀 있길 바랐다.

    ***

    “모도루 영애, 시간 있으면 저랑 차 한잔하면서 수다나 떨까요?”

    난 남은 시간 동안 크로버가 말한 향수에 대해 개인적으로 알아볼 생각이었다. 최신 유행품이라고 했으니 헤슬루라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풀이 죽은 헤슬루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도 할 겸 헤슬루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아…. 헤슬루가 괜히 시간을 뺏는 게 아닐까요….”

    돌돌 말려진 머리카락마저 축 처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들어오지 않은 엊그제 밤, 날 찾겠다고 나서다가 모도루 백작에게 야단을 맞았다고 들었다. 파르미엔 기사님도 본인의 일이 있을 테니 자꾸 귀찮게 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말이다.

    딸 바보로 유명한 모도루 백작이었다. 꾸중을 들은 헤슬루가 얼마나 속상하고 풀 죽었을지 알만했다. 괜히 나 때문에 부녀간에 트러블이 생긴 것 같아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모도루 영애가 아니면 제가 이런 걸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요.”

    “뭐가 알고 싶으신데요?”

    “일단 앉아보세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요.”

    난 헤슬루의 팔짱을 끼고 테라스의 티 테이블로 이끌었다. 루티시나를 만났던 레스토랑과 비슷한 분위기로 미리 세팅해 놓았다. 그 위에는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다.’ 버전으로 모든 맛의 아이스크림을 다 올려두었다.

    “어머나, 젤라또를 이렇게나 많이?”

    “아침 일찍 시가지에 나가서 사 왔어요. 모도루 영애가 젤라또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래도 이렇게나 한꺼번에 많이 먹어본 적은 없어요. 배탈이 나진 않겠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숟가락을 드는 헤슬루의 얼굴은 퍽 즐거워 보였다. 난 헤슬루의 맞은편에 앉아 요즘 바렌시드에서 유행하는 디저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저런 유행이 있었지만 그래도 헤슬루는 이 젤라또가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지금까지도 인기를 누리며 살아남지 않았겠어요?”

    헤슬루가 마지막으로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비우며 말했다. 목소리와 표정이 조금 전보다 한결 활기찼다.

    “참, 요즘 앙루민이라는 향수가 유행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유행하는 디저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건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밑밥에 불과했다.

    크로버는 마룬시에를 흑막이라고까지 칭하며 그녀가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 하지만 크로버나 신관들보다는 내가 마룬시에에 대해 더 잘 알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마룬시에의 기본 공략에서부터 진 공략, 히든 공략까지, 모든 공략을 백 퍼센트 달성했던 나였다. 그 어느 루트에서도 마룬시에가 이상한 향수와 관련 있다는 스토리는 없었다.

    ‘물론 중독 성분이 든 향수가 등장했던 적도 없었고.’

    혹시 신전의 조사과정에서 무언가 오해가 있던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로버의 말만 믿고 있기는 불안했다. 나도 나름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기사님께서도 들으셨군요. 사실 지금 유행이라고 하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답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이 쓰고 있잖아요?”

    헤슬루는 최신 유행에 대한 자신의 식견을 또 한 번 뽐낼 기회라고 생각하듯 했다.

    “모도루 영애도 그 향수를 가지고 계시나요?”

    “그럼요, 향수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유명한 아이템은 하나씩 가지고 있어 줘야죠. 왕세자님께서 가지고 있던 것과 똑같은지 한번 시향 해보시겠어요?”

    향수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왜 카미앙이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잠자코 있는 사이 헤슬루의 시녀가 곧 작은 하늘색 향수병을 들고 왔다.

    “어더르라는 향수 샵에서 구매하신 건가요?”

    “네, 애초에 거기서 밖에 팔질 않는답니다.”

    카피 제품이 아니니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 성분이 들어 있을 리도 없었다. 알면서도 시향을 하려니 괜히 기침이 나왔다. 약한 박하 향과 달콤함이 느껴지는 무난한 향이었다. 이래서 방향제처럼 사용하는 건가 싶었다.

    “어때요? 왕세자님이 쓰시던 것과 똑같나요?”

    또다시 헤슬루의 입에서 왕세자라는 말이 나왔다. 대체 카미앙과 이 향수가 무슨 관계가 있길래 자꾸만 카미앙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다.

    “제가 유행이나 사교계의 소문 뭐 이런 거엔 어두워서 그러는데…. 혹시 이 향수와 왕세자님이 관계가 있나요?”

    내 반응에 헤슬루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 그건 제가 기사님께 여쭤보려고 했던 건데.”

    “저한테요?”

    혜슬루의 뜬금없는 대답에 나도 모르게 말끝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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