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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데자뷔라고 할 수도 없고…. 어쩐지 자꾸 루티시나에게 발견 당하는 느낌이 드는데….’
루티시나를 신경 쓴 나머지 내가 과민 반응을 하는 걸까?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듯 인사를 하는 크로버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네요. 이쯤 되면 신의 뜻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신의 뜻보다는 바렌시드 집단 지성의 뜻일 확률이 높았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분수대를 구경한 후 향수 가게서 잇템을 구입. 그리고 이 레스토랑에서 식사.
이게 바렌시드 시가지 정석 데이트 코스라고 알려져 있는 게 아닐까.
“저희도 이쪽 테이블에 앉아도 될까요?”
향수 가게에서 내가 무안을 주었던 게 불과 한 시간 전 일이었던 것 같은데. 루티시나는 이번에도 지난 일은 싹 잊었다는 듯 친근하게 굴었다.
‘그 정도 말로는 전혀 타격이 없다 이건가.’
바르하르트 후작가의 아가씨는 의외로 강철 멘탈에 뻔뻔스러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미앙으로 플레이할 때는 고상한 귀족 아가씨였는데 말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너무 좁을 것 같은데.”
분명히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루티시나는 강경했다.
“파르미엔 영애가 모르셔서 그래요. 이 레스토랑은 4인 이상일 때만 시킬 수 있는 특별한 메뉴가 있답니다. 왕세자님께도 멀리서 오신 모리아리티 백작님께도 좋은 대접이 되지 않겠어요?”
“나도 따로 먹는 게 좋다고 보는데.”
“왕세자님도 왕궁 요리가 아닌 새로운 음식을 맛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바르하르트 영애가 그렇게까지 추천하는 음식이 뭔지 저도 궁금하네요.”
카미앙이 거절했는데 크로버가 굳이 찬성표를 던졌다.
‘너무 모리아리티 백작 역할에 심취한 거 아닌가? 마치 정말 외국에서 온 사람인 양 대답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결국,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식사 자리가 완성되었다. 직원이 몇 번이나 괜찮냐고 물어본 끝에 테이블에 올라온 요리는 럼주에 절인 새끼 야크 통구이였다.
크로버는 이렇게 엄청난 고기는 처음 본다며 애매한 감탄사를 연발했다. 루티시나는 자신이 먹겠다고 우긴 탓에 어쩔 수 없이 칼질하고 있었지만 영 입에 맞지 않는 눈치였다.
묵묵히 자기 몫을 해치운 카미앙은 디저트로 차가 준비되었을 때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녹시아가 그대를 안내하게 되었지?”
“파티에서 약속했습니다.”
“앞으로의 일정은?”
“며칠 더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녀 볼까 합니다.”
그렇게 취조라도 하듯 질문을 던진 카미앙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는 내게도 들린 걸 보면 그리 작은 소리가 아닐지 몰랐다.
“… 데이트 맞군.”
그와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카미앙 앞에서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기?
그래, 이런 것도 있었다. 어장 속 물고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생각해 냈던 임무 중 하나였다. 난이도가 높아 정작 그때는 실행하지 못했었다.
<공략 대상이 당신의 인간관계에 과민하게 신경을 쓰게 됩니다.>
<주의사항: 이 효과는 오늘 하루 동안만! 지속됩니다.>
‘당신의 인간관계에 과민하게 신경을 쓴다라….’
뱅뱅 꼬아서 설명해놨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질투한다는 말 아닌가? 내 데이트 상대로 인식한 크로버를 말이다. 그러니까 카미앙의 질투심이 몇 배로 증가하는 게 오늘의 보상이었다.
‘이런 게 보상으로 떴다는 건 카미앙의 질투를 잘 이용해야 한다는 뜻일 텐데….’
지금까지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었던 시스템이었다. 지난 파티 때는 시스템이 준 보상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었다. 오늘은 달라야 했다.
“그러네요. 백작님과는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데이트하는 기분이 나네요. 아무래도 바르하르트 영애의 말이 맞았나 봐요.”
쨍그랑. 카미앙이 들고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내게는 마치 카미앙의 질투심이 올라가는 알림음으로 들렸다.
“여기 좀 치워주세요.”
침착하게 직원을 부르는 루티시나도 카미앙의 이런 격렬한 반응에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보세요, 제가 뭐라고 했어요. 두 분 데이트 하시는 거라고 했잖아요.”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역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나와 크로버를 엮은 게 굉장히 기쁜 모양이었다.
‘그럼 카미앙은 어떨까. 파티에선 평소와 달리 나한테 약간 미련을 보이긴 했는데….’
카미앙의 심경을 살피기 위해 스킬을 사용했다. 의도는 그랬는데 루티시나가 카미앙의 재킷에 튄 차를 닦아준다고 나서는 바람에 그쪽에 스킬이 그쪽에 적용되었다.
‘루티시나야 볼 것도 없지. 날 제치고 카미앙을 차지하게 된 것 같아 신이 났을 테니.’
난 다시 ‘사람을 분석하는 마케터의 혜안’ 스킬을 사용했다.
「세상에, 녹시아가 내 눈앞에서 다른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다고? 믿을 수가 없군. 파티에서야 상황이 그럴 만했다고 넘어갔지만 이건 일부러 만남을 만들었다는 거 아닌가.」
찻잔을 떨어뜨렸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카미앙은 패닉이라도 온 것 같았다. 내가 제 엄마도 아니고.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 평생 저만 바라볼 거로 생각했나? 카미앙이 특이한 것인지 원래 왕족의 사고방식이 저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난 평소보다 훨씬 상냥한 목소리로 크로버를 돌아보았다.
“모리아리티 백작님, 식사는 맛있으셨….”
가루. 시나몬 가루가 크로버의 입가에 묻어있었다.
“뭐죠? 녹시아 님. 왜 웃으시는 건데요?”
사실 식사 중에 가루가 묻은 게 그렇게까지 우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작고 사소한 일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미켈란멜로우의 명화에 누군가가 귀여운 장난을 처논 것 같네요.”
오전에 배웠던 이름까지 활용해 오글거림을 한층 더 끌어올린 대사였다. 게다가 무려! 손수건으로 직접 크로버의 입가를 닦아주기까지 했다.
“설마 일부러 묻히신 거는 아니죠?”
루티시나가 추임새를 더했다.
「단순히 칠칠찮은 게 아니라 얕은 수작까지 부리고 있던 거란 말인가? 정말 요망한 녀석이군. 녹시아도 그렇지. 아무리 날 잊기 위해 아무 남자나 만나고 싶었어도 그렇지. 저런 여우 같은 놈을….」
그래, 카미앙. 더더더 질투해라. 그다음엔 크로버에게 뭘 어떻게 해야 카미앙의 질투를 유발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이상한 것이 보였다.
「백작님은 왜 저렇게 소극적이실까. 분명 오라버니하고는 얘기가 잘 되었다고 들었는데.」
루티시나의 속마음이었다. 내가 카미앙에게서 떨어져 나가 기뻐하는 것까진 알겠는데 베르만과 크로버가 무슨 이야기를 했다는 거지?
「여기서 뭔가 파바박 하고 찐한 액션을 보여줘야지. 왕세자님이 파르미엔 영애에게 정나미가 뚝 떨어질 정도로 말이야. 얼굴이 반반해서 여자 꽤나 울리고 다녔을 것 같은데. 설마 파르미엔 영애가 맘에 안 들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이제 와 그러면 계약 위반이라고.」
계약? 난 크로버를 빤히 바라보았다. 난 크로버가 그저 외국에서 온 귀족 역할에 심취해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루티시나와 모종의 계약을 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아니겠지. 크로버가 왜 루티시나랑 계약을 해? 내가 메시지를 잘못 해석한 거겠지.’
마음 한쪽이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크로버에게 스킬을 시전 하는 것이었다.
“……!”
파티에서 신성력이 바닥날 정도로 스킬을 사용한 탓이었다. 게다가 신성 회복력이 엄청나게 느리다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크로버에게 기도를 받아둘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다 드셨으면 이만 자리에서 일어날까요?”
“백작님, 이렇게 된 거 더블데이트는 어떨까요? 파르미엔 영애와 오붓한 시간은 내일로 미루시고 오늘은 저희와 함께 다니는 것도 좋지 않겠어요? 멀리서 오신 파르미엔 영애보단 제가 바렌시드에 재미난 곳을 더 많이 알고 있기도 하고요. 파르미엔 영애의 의견은 어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거 루티시나에게 시전한 스킬이 종료되기 전까지 알차게 써먹을 필요가 있었다.
「안 되겠어. 빨리 호수로 이동해야지. 분수대, 숍, 레스토랑이라니. 연달아 마주치긴 편하지만, 극적인 이벤트가 일어날 만한 곳이 없잖아.」
이건 또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오늘 루티시타와 카미앙을 이렇게 자주 만난 게 우연이 아니란 말인가?
‘설마 크로버와 한 계약이라는 게….’
“아니, 오늘은 여기서 이만 헤어지도록 하지.”
루티시나의 속마음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카미앙이 대뜸 돌아가겠다는 발언을 했다.
“어머, 왕세자님. 더블데이트가 안 내키세요?”
“갑자기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게 떠올라서 말이지. 후작 가의 마차를 불러드리겠소.”
오늘 넌 그렇게 돌아가면 안 된다니까.
“바르하르트 영애 말대로 하는 게 어때요? 어차피 오늘 하루는 휴가를 내고 나오셨….”
카미앙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눈빛 빔을 쏘았다. 얼마나 위력이 대단했느냐 하면 내가 미처 말을 다 끝내지 못할 정도였다.
「녹시아, 대체 뭘 보여주고 싶은 거야? 저자와 즐거워하는 네 모습이라도 지켜보라고?」
내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긴 했다.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일 뻔했으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난 그 이름을 불렀다.
“카미앙!”
지금 가버리면 기껏 받은 보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제법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바쁘면 잠깐 아이스크림이라도….”
“아이스크림?”
차는 여기서 마셨으니 또 차 한잔하자고 하기는 그렇고 생각난 게 하필 아이스크림이었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래서 더더욱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쪽 광장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코스라고 하더라고요. 왕세자님은 그런 거 안 해봤을 거 아녜요? 밖에서 걸어 다니면서 아이스크림 먹기.”
순간 카미앙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제 알겠어. 녹시아가 왜 이런 건지 이제야 전부 이해가 가는군.」
아니, 내가 뭘 했다고. 고작 아이스크림 먹자는 그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카미앙은 세상의 모든 신비와 비밀을 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