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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47화 (4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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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도 밝지. 루티시나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안으로 들어가는데 다시 한번 그녀가 날 불렀다.

    “파르미엔 영애? 맞으시죠?”

    불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적극성까지 보였다. 더 이상은 무시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바르하르트 영애.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저도 깜짝 놀랐어요.”

    루티시나는 지난 파티에서의 일은 까맣게 잊기라도 한 것처럼 날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아니 기억이 조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전보다 더 내게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하긴 이렇게 훌륭한 상점이니 파르미엔 영애의 이목을 끌만도 하죠. 시향은 해보셨나요? 제가 추천해 드리고 싶은 향도 몇 가지가 있는데….”

    그러면서 점원에게 대여섯 가지 이름을 말했다.

    “마음에 드시는 게 있으시다면 제가 선물 해 드리고 싶네요. 고향에 돌아가셔서도 이 향을 맡으시며 바렌시드를 떠올리실 수 있도록 말이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곧 파르미엔으로 돌아갈 사람이 되어버렸다.

    “…바르하르트 영애.”

    멀찍이 떨어져 있던 카미앙이 이 정도면 오래 기다렸다는 듯 루티시나를 불렀다.

    “참, 내 정신 좀 봐. 데이트! 중이었지!”

    이 상황을 연출하려고 그런 건가. 루티시나는 카미앙과의 데이트를 조금이나마 더 극적으로 알리고 싶었나 보다.

    “죄송해요. 파르미엔 영애가 너무 반가워서 그만.”

    루티시나는 카미앙에게 팔짱을 끼며 내 앞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는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점원이 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왕세자님과 비밀 데이트 중이랍니다. 신분을 숨기시고 평범한 귀족 영식처럼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중이시죠.”

    바르하르트가의 영애와 함께 있는 것부터 평범한 귀족 영식은 아닐테지만. 그런 것까지 지적할 열정은 없었다.

    “물론 저쪽 어딘가에 다리스 대장이 계실 테니 완전히 비밀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요.”

    그리고는 자신이 굉장히 재미있는 말이라도 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뭡니까? 저만 쏙 빼놓고.”

    “어머나, 이분은….”

    크로버의 등장에 루티시나는 눈을 반짝였고 카미앙은 미간을 찌푸렸다.

    “안녕하십니까. 바르하르트 영애 그리고….”

    크로버가 카미앙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카미앙은 너 따위에게 알려줄 호칭은 없다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일단은 그냥 귀하신 분이라고 해 두죠. 파티 이후로 처음 뵙습니다.”

    “그러니까…. 모리아리티 백작님, 맞으시죠?”

    루티시나가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모를 크로버의 가문을 또박또박 말했다.

    “바르하르트 영애께서 절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동 아그니안 제국에서 엄청 멋진 분이 오셨다고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큰 이슈가 됐는걸요. 당연히 알고 있지요.”

    “두 사람은 뭘 하고 있었지?”

    카미앙이 그런 것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는 듯 내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어머, 뭘 그런 걸 묻고 그러세요.”

    하지만 나보다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루티시나였다. 그것도 자신이 괜히 얼굴을 붉히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데이트하시는 중이겠죠. 우리처럼요. 그런 건 물어보지 마시고 적당히 넘어가시면 될 텐데…. 파르미엔 영애가 부끄러워하잖아요.”

    내가? 잘못된 정보는 빠르게 정정해 주는 게 도리였다.

    “저희는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요. 제가 다른 영애들한테는 절대! 비밀로 할게요. 모리아리티 백작님을 노리고 있는 영애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후후.”

    이번에는 크로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백작님도 눈이 높으시네요. 파르미엔 영애를 선택하시다니요.”

    난 재빨리 스킬을 시전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루티시나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뻔했다.

    <1. 데이트가 아니라 관광 가이드 중인데요?>

    <2. 겨우 이 정도가 데이트로 보이시나요?>

    “겨우 이 정도가 데이트로 보이시나요?”

    “겨우…. 이 정도?”

    “단순히 남녀가 함께 좀 돌아다닌다고 해서 그걸 데이트라고 할 수는 없죠. 이 정도는 그냥 외국에서 오신 백작님께 관광 가이드를 해 드리는 수준이라고나 할까요? 바르하르트 영애는 아직 경험이 적으셔서 잘 모르시나 봐요.”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었던 루티시나의 미소가 반쯤 어그러졌다. 난 카미앙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파르미엔 영지에서 했던 데이트 역시 이런 시시한 게 아니었죠. 안 그래요?”

    흙바닥에서 구르기도 하고, 군량을 지고 눈길을 헤쳐 나가는 아주 익스트림한 데이트였지. 물론 다른 사람들은 카미앙과 내가 그곳에서 뭘 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이런 게 아니었다면….”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카미앙의 모습이 루티시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딱 좋았다. 루티시나가 피튀기는 전장을 떠올리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한 번 허심탄회하게 물어보세요. 왕세…. 아니 이분은 지금 영애와의 시간을 데이트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카미앙이 반박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아무 말이 없었다. 어쩌면 진짜로 자신이 내게 감동적인 시간을 선물했다고 믿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한 위인이었다.

    “그럼 저는 백작님께 또 다른 곳을 구경시켜 드리러 가야 해서 이만.”

    나는 크로버에게 에스코트를 부탁한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크로버가 내 손을 살짝 잡았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루티시나와 아직까지 벌건 얼굴을 한 카미앙을 남겨 둔 채로 유유히 퇴장했다.

    “녹시아 님께서 그렇게 개방적이신 분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개방적이요?”

    “왕세자님과 엄청난 데이트를 즐기셨다고 방금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렇죠. 엄청나게 개방적이었죠.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흙이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막 뒹굴고.”

    “뒹굴어요?”

    “네, 바르하르트 영애가 너무 놀랄 것 같아서 그런 얘기까진 못했지만요.”

    크로버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니 제법 재미있었다. 이 자가 왜 매번 내게 허튼소리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향수를 다 못 보고 나와서 어떡하죠?”

    “괜찮습니다. 설명이야 다른 데서 할 수도 있으니까요.”

    카미앙 앞에서 큰소리쳤던 것과는 달리 안내를 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크로버였다.

    “이렇게 된 거 점심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어떠신가요?“

    “그래야 하려나요.”

    생각보다 쓸데없는 일정이 길어지는 것 같지만 어차피 식사는 해야 하니까. 난 다시 크로버의 뒤를 따랐다.

    ***

    프릴이나 레이스가 가득한 드레스에서 모티브를 얻은 게 아닌가 싶은 레스토랑이었다. 저절로 헤슬루가 떠올랐다.

    “여기 창가 쪽에 앉을까요?”

    흰색 식탁보를 늘어뜨린 테이블 중앙에는 파스텔 계열의 꽃들이 부케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이 말랑말랑하고 화사한 공간에서 크로버는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아니 위화감은커녕 인테리어의 한 부분인 양 앉아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꽃처럼 말이다.

    ‘이십 대 후반의 남자가 저렇게 아련하고 청순할 일인가.’

    얼굴은 마음의 창이라더니만 그것도 틀린 말이었다.

    “이렇게 주문하면 되겠죠?”

    “네? 뭘요?”

    “식사요. 주문해야죠.”

    처음엔 그저 레스토랑의 내부를 구경했던 것뿐인데 어떻게 크로버의 미모 감상까지 이어졌는지…. 역시 의식의 흐름이란 무서운 녀석이었다.

    내가 쓸데없는 걸 보는 동안 크로버는 실속있게 메뉴판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잠깐만요. 제대로 못 봤거든요.”

    이렇게 음식을 고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오후의 수다 카페는 늘 주인장 추천으로 메뉴가 통일되어 있었다. 모도루 백작가의 음식은 훌륭하긴 했지만 얹혀사는 주제에 먹고 싶은 음식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요 파스타에 나오는 게요 크기가 얼만 한가요?”

    간만에 누리는 자유였다. 역시 자유 중에 으뜸은 메뉴 선택의 자유지. 난 메뉴판에 적힌 작은 설명까지 차근차근 읽고 직원에게 확인까지 마친 뒤 식사를 주문했다.

    “큰 게가 통째로 올라가 있다니.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겠는걸요?”

    바렌시드는 항구도시와 접해있긴 했지만, 해산물이 풍부한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모도루가 주방장의 취향인지는 몰라도 해산물 요리는 생선구이가 전부였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해산물을 좋아하시나요?”

    “그럼요. 그중에서도 껍데기 있는 것들이 좋아요. 새우, 조개, 랍스타, 꽃게….”

    “백작가에서 자주 드셨나요?”

    “그럼….”

    당연하다는 대답을 하려다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파르미엔 영지는 내륙 중에서도 내륙이었다. 건어물 정도는 있었지만 아무리 귀족이라 해도 싱싱한 해산물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는 않지만…. 모도루 백작가에서 자주 나오더라고요. 여기 와서 그 맛을 알게 된 거죠.”

    “좀 전에 오랜만에 드시게 됐다고….”

    “아, 얼마나 좋아하게 됐는지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꼭 일 년을 못 먹은 것처럼 먹고 싶더라고요. 그만큼 먹고 싶었다. 그런 뜻이었어요. 하하.”

    이 정도면 괜찮은 변명 아닌가? 크로버가 아무리 뛰어난 수사력과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할 테니까.

    어쨌거나 크로버가 더 캐묻기 전에 화제를 전환했다.

    “레스토랑이 분위기가 정말 좋네요. 작은 것 하나하나 아기자기하게 신경 쓴 게 데이트 장소로도 인기가 많겠어요.”

    “데이트 장소요? 지금 데이트라고 하셨습니까?”

    크로버의 되물음을 듣고 나서야 괜한 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평범한 레스토랑에서, 뒹구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의자에 앉아서 음식을 먹을 뿐인데 데이트라고 생각해 주실은 줄 몰랐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통상적으로 그럴 것 같다는 뜻이었어요. 봐요, 지금도 저렇게 커플이 들어오….”

    난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뭐지, 오늘 마가 끼었나.’

    난 크로버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예지의 신관님, 혹시 오늘은 신탁을 받지 않으셨나요?”

    “신탁이요?”

    “동행인의 운세에 불행의 별이 비친다든지 오늘은 시가지를 돌아다니기 적당하지 않은 날이라든지.”

    신탁이 아니라 별자리나 띠별 운세 같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뭐가 되었든 내 일진이 좋지 않은 건 확실했다.

    ‘그래, 레스토랑이 넓으니까. 설마 굳이 이쪽으로 오진 않겠지.’

    난 메인요리가 나오기 전에 테이블에 올라온 샐러드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서 드세요.”

    사교성 좋은 크로버가 혹시라도 동석을 요청할지도 몰랐다. 일단 크로버의 입을 막아둬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아, 전 고기에 집중하자는 주의여서.”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야채도 먹어야지. 자요.”

    난 크로버 앞에 놓여있는 포크를 집어 샐러드 한 움큼을 그의 앞접시에 덜어주었다.

    “어머 어머, 오늘 정말 재미있는 날이네요.”

    이런 내 노력에도 루티시나는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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