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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기서 세워주세요. 돌아갈 때는 알아서 갈 테니 기다리지 않으셔도 돼요.”
모도루 가문의 마부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헤슬루가 수업이 있는 날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분명 같이 나오겠다고 했을 터였다.
‘그렇게 걱정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지. 아니면…. 혹시 내가 좀 어리숙 해 보이나?’
감이 좋은 헤슬루는 내 삼십 년 가까운 인생에서 배어 나오는 호구 냄새를 맡은 걸지도 몰랐다. 자신보다 나이도 더 많은 데다 호위도 따로 필요 없는 날 그렇게나 걱정하는 걸 보면 말이다.
‘크로버를 만나러 나온다는 걸 알았다면 수업을 어떻게 해서라도 빼고 나왔을지도 모르지.’
크로버의 잘생긴 얼굴이 헤슬루에게는 전혀 면죄부가 되지 못했다. 그날 파티에서 크로버와 내가 테라스에서 들어오는 걸 본 헤슬루는 크로버에게 크게 화를 내며 날 데려갔다. 아무 일 없었다고 몇 번이나 해명했지만, 소용없었다.
‘기사님. 저런 얼굴의 사내는 무조건 조심하는 게 좋아요. 지금도 보세요. 기사님이 사라지니까 주변에 구름처럼 여자들을 불러 모으잖아요?’
내 눈에는 여자들이 몰려오는 그것처럼 보였지만 헤슬루의 눈에는 그 반대로 보였나 보다.
“이쪽입니다.”
분수대 쪽에서 손을 흔드는 크로버가 보였다.
“데이트하기 딱 좋은 날씨군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초가을이었다. 바랜시드에 왔을 땐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계절이 변했다.
“데이트뿐만 아니라 빨래하기도 좋은 날씨고 훈련하기도 좋은 날씨네요.”
“아하하, 뭐 그렇긴 하겠군요.”
“자, 그래서 오늘은 어디부터 가야하죠? 아니면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라도 있나요?”
오늘 크로버와 만난 이유는 데이트나 그 비슷한 걸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단지 크로버의 부탁을 수행하기 위해 만난 것뿐이었다.
파티가 있던 날 테라스에서 크로버가 내게 은밀히 속삭였던 말.
‘사실 녹시아 님께 부탁할 게 있습니다. 향료 길드 관련해서 말입니다….’
누가 봐도 오해하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는 크로버가 입에 올린 건 길드의 불법 행위에 관한 이야기였다. 향료 길드의 비밀을 함께 알아봐 달라 부탁한 것이다.
‘역시, 기대하지 않길 잘했지. 아니 근데 그런 얘기라면 꼭 파티가 아니어도 됐잖아? 그렇게 분위기 잡을 필요도 없고, 그렇게 멋지게 꾸미고 올 필요도 없고.’
저런 얼굴로 자꾸만 사람 오해할만한 행동을 하는 일이야말로 불법 행위로 지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불만과는 별개로 크로버의 부탁은 받아드렸다. 결코, 크로버에게 사심이 있어서라든가 미인계에 넘어간 건 아니었다. 그저 내 명성을 올리기에 딱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스템 역시 크로버의 제안을 퀘스트로 인식했다.
‘잘 됐지 뭐.’
내가 파티에 갔을 때부터 이 세계의 흐름은 게임의 스토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지금까지는 공략대로 진행하면 어장 속 물고기에서도 탈출하고 명성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스토리가 바뀐 지금, 내가 아는 공략은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진행해 나가야 카미앙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을지 막막하던 참이었다.
‘전형적인 연애 게임에서 갑자기 오픈 월드로 장르가 바뀐 것 같다고나 할까.’
넋 놓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크로버가 던진 퀘스트라도 진행하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우리 녹시아 님 께서는 뭐가 그리 급하실까.”
크로버는 마치 한국인 같은 바이브를 뽐내며 말에 익숙한 리듬을 붙였다.
“일단 여기 앉아 보세요. 왕궁 정원의 장식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이 분수도 제법 운치 있지 않습니까? 분수 가운데에 있는 저 여신상은 백 년 전 유명한 조각가였던 미켈란멜로우가 만든 작품입니다.”
긴 머리를 땋아 내린 여신이 커다란 물병을 오른팔로 감싸 안듯 들고 있었다. 입구가 넓은 물병이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길이었다.
“멀리서 일부러 들릴 정도로 유명한 분수랍니다. 혹시 저 분수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난 고개를 저었다. 사실 중앙광장에 온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동안은 늘 퀘스트에 관련된 장소만을 다녔기 때문에 바렌시드의 명소 같은 건 즐길 틈이 없었다. 내게 있어서 바렌시드의 명소는 ‘오후의 수다 카페’나 라라벨의 숙소였으니까.
“연인의 분수죠. 사랑이 이루어질 연인들에게는 저 여신상이 물병에서 꽃잎을 뿌려 준답니다.”
정확히는 뿌려 주는 게 아니라 뿌려 준다는 전설이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세상 어디를 가나 그런 전설 같은 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것참 흥미롭네요. 그런데…. 오늘 일은 언제부터 시작할 거죠?”
“일을 시작하기 전에 혹시 아이스크림은 어떠신가요? 바로 요 앞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또 나름 유명한 곳입니다.”
“일 시키기 전에 우선 먹인다…. 뭐 이런 건가요?”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사람 서운하게.”
크로버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달려가더니 곧 젤라또 두 개를 양손에 나눠 들고 돌아왔다.
“제 입맛에는 딸기 맛이 제일 맛있더라고요.”
나는 크로버와 나란히 분수대에 걸터앉아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렸다. 햇살이 좋아서인지 분수 위로 작은 무지개가 생겼다. 간만에 보는 풍경이 반갑기도 하고 자그마한 크기가 귀엽기도 해 자꾸 눈길이 갔다.
크로버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내 뒤로 떠오른 무지개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가 아쉬웠는지 다시 쳐다보는 것을 반복했다.
그래, 처음엔 분명 그런줄 알았는데 좀 이상했다. 그 시선이 무지개가 아닌 날 향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의식 과잉인가? 아닌가? 아니겠지?’
아이스크림의 콘 부분만 남게 되었을 때야 나는 크로버 쪽으로 휙 얼굴을 돌렸다. 마침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크로버와 눈이 딱 마주쳤다. 심증이 확실해진 덕분에 자신 있게 물어보았다.
“왜 자꾸 힐끔거려요? 제 얼굴에 물방울이라도 튀었어요?”
“맛있게 드시나 해서요.”
“맛있네요. 이런 거 오랜만에 먹어봐요.”
“오랜만이라면 파르미엔 영지에도 이런 아이스크림이 있습니까?”
있었지. 파르미엔 영지가 아니라 회사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쯤 떨어진 곳에 있었지. 맛도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젤라또와 상당히 비슷했단다. 물론 이런 말을 크로버에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날 너무 촌뜨기 취급한 거 아녜요? 아무튼 그냥 맛있냐고 물어보면 되지 뭐하러 얼굴까지 확인하고 그래요.”
“그럼 당연히 맛있다고 하실 테니까요. 아 저기!”
크로버가 가리킨 분수 반대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뭐죠?”
“봐봐요. 저 커플 머리 위로 꽃잎이 떨어지고 있잖아요!”
“아아, 저 빨간 꽃잎. 근데 그게 왜….”
지금 크로버는 저 꽃잎이 조각상이 들고 있는 물병에서 나온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정말로?
“설마….”
“바렌시드의 신께서 축복해 주시는 아름다운 커플입니다.”
“지금 여신상이 꽃잎을 뿌려줬다고 말하는 건 아니죠?”
“제가 말씀드렸죠? 사랑이 이루어질 연인에게는 여신상이 꽃을 뿌려 준다고요. 이제 저 커플은 백년해로할 수 있을 겁니다.”
크로버가 너무나 확신에 차서 말하는 통에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크로버는 신관이었지….’
크로버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저 꽃잎이 바렌시드의 신께서 내리는 축복이라고 믿고 있을지 몰랐다.
“그…. 갑자기 꽃잎이 나타나다니 신기하긴 하네요.”
주변에 꽃이 핀 나무는 없었다. 바람에 실려 어디선가 날아온 게 아닐까 주위를 둘러봤다. 혹시 꽃잎이 아니라 단풍잎은 아닐까 눈을 부릅떠봤을 때였다.
“저 사람…. 카미앙과 루티시나잖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네? 잘 못 들었습니다.”
크로버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나는 떨어지는 꽃잎 아래 서 있는 커플을 가리켰다.
“저 커플 왕세자와 바르하르트 영애라고요.”
“신의 축복을 받아 백년해로할 저 커플이 왕세자님과 바르하르트 영애란 말씀입니까?”
“그것까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두 사람이 맞아요.”
서로 눈을 맞추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영락없이 데이트 중인 남녀였다. 오늘은 왕세자님께서 시가지 데이트라도 나오신 모양이었다.
때마침 저들도 우리를 알아본 것 같았다. 루티시나가 이쪽을 가리키더니 카미앙에게 속삭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스크림도 다 먹었겠다 이만 가죠.”
난 크로버를 재촉했다. 괜히 저 두 사람하고 마주쳐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네네,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일단 거기부터 들리죠.”
이번에는 크로버도 쓸데없는 소리 않고 바로 목적지로 안내했다.
***
“여기요?”
“네.”
“오늘 가야 할 곳이 여기라고요?”
건물 밖까지 분내가 폴폴 풍기는 건물이었다.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된 건물은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어쩐지 의아한 마음에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정확히는 오늘 가야 할 곳 중 한 군데가 여기입니다.”
크로버는 가게 문을 열었다. 유리병에 든 향수부터 도자기에 든 물건까지. 여기는 바렌시드 최대의 향수 샵이었다. 카미앙으로 게임을 플레이할 때 두어 번 들른 적 있는 곳이었다.
‘분명 저 조그마한 물건이 백 골드 정도는 했었지.’
엄청나게 사악한 가격 덕에 귀족이나 큰 부자가 아니고서는 찾아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손님들을 복장으로 차별하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네.”
점원이 우리를 보고는 까닥 목례를 했다. 그뿐이었다. 아마도 오늘 우리의 옷차림이 그다지 값어치 나가 보이지 않았나 보다.
“이 향수들의 원료 유통 및 가공을 향료 길드에서 전담하고 있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원료 유통이야 그렇다 쳐도 가공까지 길드에서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럼 이 가게 자체가 향료 길드 것이나 다름없네요.”
“그렇죠. 사실 이곳이 향료 길드의 돈줄이나 마찬가집니다.”
“남기는 게 많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불법이라고 볼 수는 없잖아요?”
“당연하지요. 문제는….”
크로버와 내가 속닥거리고 있는데 백년손님이라도 오신 것처럼 점원이 누군가를 맞이했다.
“저희 가게를 찾아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레이디께 어울리는 향수를 찾으시나요? 아니면 눈부시게 멋진 신사분이 사용하실 물건이 필요하신가요?”
우리가 들어왔을 때와는 정반대의 반응에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출입문을 쳐다보았다.
‘아, 하필….’
하필이면 루티시나와 카미앙이 서 있었다.
“크로버, 우리 저 안쪽으로 들어갈까요?”
“잠시만요. 사실 저기 저 향수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크로버가 가리킨 것은 동그란 유리병에 든 하늘색 향수였다. 다른 제품에 비해 크기가 큰 데다 베스트셀러라고 적혀있는 덕에 눈에 확 띄었다.
“알겠어요.무슨 물건인지는 봤으니 저 안쪽에서 설명하시죠.”
“갑자기 왜….”
크로버를 억지로 밀며 현관에서 보이지 않는 쪽으로 이동하던 참이었다. 루티시나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꽂혔다.
“어머나, 파르미엔 영애 아니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