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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는데요.”
“…크로버?”
“오늘 이분은 저하고만 춤을 추실 거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쇼하트 자작의 말보다 열 배쯤은 더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소하트 자작은 내게 내밀었던 손의 방향을 바꿔 크로버에게 악수를 청했다. 다리스는 말을 더듬으며 인사를 건넸다.
‘방금 어쩔 수 없이 짝사랑을 끝낸 척 아련하게 굴었는데. 뭐냐구.’
크로버의 저런 발언은 이 상황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파르미엔 기사님을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오셨단 말씀입니까? …확실히 보기 드문 실력자이긴 하십니다만….”
“아뇨, 검술 실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온 게 아닙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 계시다는 말씀을 받았죠.”
“허어, 파르미엔 영애의 미모가 제국에까지 소문이 났다니.”
“아뇨, 정확히는 소문이 아닙니다. 신께서….”
이게 무슨 신관과 외국 귀족의 혼종같은 소리란 말인가. 난 재빨리 크로버의 말을 막았다.
“다리스 대장님, 오늘은 정말 반가웠습니다.”
그리고는 급히 다리스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우리 일단 저쪽으로 갈까요?”
“당연히 갈 생각이었습니다. 이렇게 남자들만 버글버글한 곳에 녹시아 님을 둘 생각은 없었….”
난 크로버에게 팔짱을 가장한 수갑이라도 채운 듯 그를 끌고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의 찬 바람이 크로버가 정신 차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왜 화를 내시는 거죠?”
“그걸 몰라서 묻나요?”
“먼저 파트너를 버리고 사라지신 건 녹시아 님이십니다.”
“파트너요? 내가 당신과 파트너였다고요?”
“그럼요. 파트너가 아니고 뭐였습니까?
크로버가 워낙 당당하게 나왔기에 내가 파티 예절을 제대로 모른건가 싶었다.
“전…. 그저 다른 영애들이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길래 편히 대화를 나누라고 자리를 비켜준 거였는데…….”
“다른 영애들이 제게 접근하는 게 신경 쓰이지도 않으셨습니까?”
“그걸 신경 써야 하는 거였나요? 당신도 오늘 파티를 즐기러 왔다고 했고. 게다가 신관도 연애할 수 있다는 발언까지 했잖아요?”
“아아, 그렇군요.”
크로버가 돌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날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는 옅은 웃음까지 서려 있었다.
“혹시 그다음에 했던 말은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나와 춤을 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파티를 즐기는 방법이라고 했던가?
“그건 그냥 웃자고 한 말….”
“아니요. 분명히 말씀드리는데 전 오늘 녹시아 님과 함께 하기 위해 파티에 참석한 거랍니다. 물론….”
크로버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왕세자님의 관계에도 도움을 주고 말이죠.”
“왕세자님과의 관계?”
“왕세자님을 신경 쓰고 계시잖습니까.”
역시, 그동안 모르는 척했어도 크로버 역시 나와 카미앙의 소문을 다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는 당신도 왕세자와의 관계에 신경 쓰고 있잖아요?”
난 테라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음악과 샹들리에 그리고 사람들로 시간을 알 수 없는 안과는 달리 정원은 밤에 젖어 있었다.
“지금까지 카미앙을 위해 그렇게나 애썼잖아요. 신전에서 성물이 떨어질 때도 그랬고, 가면 극장도 쫓아오고, 동굴에서 기다리기도 하고요. 근데 오늘 일은….“
카미앙 앞에서 굳이 내게 손을 내민 건 지금까지와는 반대되는 행동이었다.
“사실 저야 이득을 보긴 했지만 좀 이해가 안 가긴 해요. 카미앙에게 점수만 깎일 일 같은데. 지금은 당신의 정체를 모른다 해도 평생 얼굴을 안 보일 것도 아니고요.”
오늘 일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왕세자님께 점수 따기에 하등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때와는 달리 얼굴도 전부 드러냈고 말이다. 이 정도라면 나중에 우연히 마주쳐도 카미앙이 크로버의 얼굴을 기억할 터였다.
구구절절 떠들어 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순했다.
“그동안의 일은 제 뜻이 아니라 그저 신의 뜻을 받든 거였을 뿐입니다.”
“이럴 때만 진짜 신관 같은 소리를 하시네요. 동 아그니안 제국의 백작 자제라면서요?”
“그건 크로버 일 때의 이야기죠.”
이쯤 되니 크로버가 신관 흉내를 내는 건지 신관이 모리아리티 백작가의 영식 흉내를 내는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보다 더 헷갈리는 건 카미앙에 대한 크로버의 포지션이었다.
게임에서처럼 연애 힌트를 주는, 아니 게임에서보다 더 카미앙을 적극적으로 돕는 신관이라 여겼다. 동굴에서 굳이 자신의 정체를 숨긴 건 나름대로 뜻이 있어서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대체 뭐지?’
“녹시아 님께서는 너무 의심이 많으십니다. 그저 순수하게 이런 미남이 본인에게 호감을 느꼈다고 생각하실 수는 없나요?”
당연히 없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 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이지 녹시아 님은….”
그리고는 내게 바짝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참 현명하시군요.”
***
루티시나는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숙면에 도움을 준다는 라벤더 차를 마시고 오일로 마사지도 받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눈만 감으면 그 순간이 떠오르는 탓이었다.
‘아니, 오해를 한 모양인데 그대에게 춤을 신청하려던 참이었소.’
카미앙의 목소리 또한 생생했다.
‘내가 아니라 녹시아라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 뭔가 사정이 있었을 거야.’
루티시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엄청난 사정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왕세자님의 눈에 뭐가 씌웠다거나 나와 그 여자를 헷갈렸다거나. 아니면 동굴에서 무슨 협박이라도 당한 게 아닐까?’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오늘 일은 이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황당하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리 없었다.
거실 불을 켜자 쇼파에 앉아있는 베르만이 보였다.
“오라버니. 이제 오셨어요?”
“온 지는 좀 됐는데 생각할 게 있어서…. 그보다 너는? 시녀 말로는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던데.”
“그건 좀 나아졌는데 영 잠을 잘 수가 없네요.”
루티시나는 베르만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도 오늘은 네가 경솔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그대로 파티장을 나와버리다니.”
베르만의 질책에 루티시나는 입을 삐죽이며 언성을 높였다.
“그럼 오라버니께서는 제가 왕세자님을 붙잡고 구걸이라도 해야 했다는 건가요? 파르미엔 영애 대신 저랑 춤을 춰달라고요?”
루티시나가 이렇게 격양된 모습을 보이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어려서야 자주 화를 내고 떼를 쓰던 아이였지만 사교계에 발을 들인 이후엔 절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긴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리는 루티시나였으니.’
오늘 일로 얼마나 실망하고 부끄러웠을지 짐작할 만했다. 베르만은 바로 사과를 했다.
“왕세자비가 되는 게 가문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는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왕세자비 따위가 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고요.”
자신은 카미앙의 지위를 사랑하는 것이라 해도 카미앙은 그런 일이 없어야 했다. 금테를 두르고 태어난 왕세자라 할지라도 남자는 남자였다. 자신에게 빠지는 건 당연할 거라 자신했었다.
“그건 너무 넘겨짚은 것 같구나. 오늘 왕세자님의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 호승심이었다. 자신의 충직한 애완견을 다른 사람이 넘보니 그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신 거지.”
“그걸 오라버니가 어떻게 알아요?”
“왕세자님과 일 년 넘게 형제처럼 붙어 있었다. 바르하르트가의 후계자가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사람으로 보이느냐?”
루티시나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베르만은 눈치가 빨랐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신호나 감정들도 대번에 알아차리곤 했다.
“그래도 전 좀 더 확실히 하고 싶어요. 애완견이든 뭐든 왕세자님이 그 여자를 신경 쓰는 게 싫다고요. 설마 제가 왕세자비가 된 후에도 그 여자를 곁에 둘 생각은 아니시겠죠?”
“그건 나도 동의한다. 왕세자님께서 파르미엔 영애에 대한 태도를 좀 더 확실히 하실 필요가 있어. 신하인지 여인인지 말이야. 전쟁터에서 함께 구르는 바람에 그런 구분이 애매해져 버렸지.”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 점이 가장 후회스러웠다. 토벌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왕세자님과는 얼굴도 마주할 일 없는 사람이었다.
루티시나와 비교했을 때 모든 면에서 부족할 뿐만 아니라 가문도 바르하르트 후작 가가 한 수 위였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싫은 소리 못하는 왕세자님이었다. 왕세자가 끊어 내지 못했다면 자신이 바렌시드에 오기 전에 어떻게든 끊어 냈어야 하는 인연이었다.
‘진작 그랬다면 루티시나가 오늘 같은 수모를 당하는 일도 없었을 테고.’
그래서 베르만은 이번일 만큼은 자신이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베르만에게 이번 일은 애정 싸움 따위가 아니었다. 아나드에서 달고 온 망령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 내가 다 생각해둔 방법이 있단다.”
“방법이라뇨?”
루티시나의 목소리에 금세 윤기가 돌았다. 베르만은 허튼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으니 좋은 수를 생각해 낸 게 분명했다.
“제국에서 온 귀족이라는 그 모리아리티 백작이란 자, 그 사람을 만날 셈이다. 어떻게 시작된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파르미엔 영애와 제법 가까운 관계인 것 같으니.”
“그자를 만나서 뭘 어쩌시려구요?”
“파르미엔 영애와의 관계를 왕세자님께 보여주라 할 참이다.”
“…왕세자님께….”
루티시나 역시 영리한 편이었디. 게다가 이런 종류의 일이라면 종종 해본 적이 있었기에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치만 만약 그 남자가 파르미엔 영애와 생각만큼 깊은 관계가 아니라면요?”
“그게 무슨 대수겠느냐.”
베르만은 차를 음미한 후 말을 이었다.
“왕세자님 눈에만 그렇게 보일 수 있도록 만들면 될 일이지. 만일 그자가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일이 좀 더 쉽게 진행될 테고 그렇지 않다 해도 우리 가문의 신문사가 있으니 그걸 이용하면 될 거 아니냐.”
베르만을 따라 차를 마시는 루티시나의 모습이 좀 전보다 한결 여유로워 보였다.
“네가 할 일은 그저 왕세자님을 모시고 데이트를 즐기는 것뿐이란다. 간단하지?”
“그럼요. 왕세자님께 잊지 못할 데이트를 선물 해 드려야죠. 물론 파르미엔 영애에게도요.”
베르만은 그런 루티시나를 보며 역시 바르하르트 가문의 여인은 환히 웃는 얼굴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