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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44화 (4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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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뿐사뿐한 걸음걸이가 마치 무용수 같았다.

‘설마 이대로 저 사람이 카미앙의 새로운 연인으로 등극하는 건 아니겠지?’

초조한 마음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분홍색 드레스가 일순간 크게 나부꼈다. 몸의 중심이 무너지며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 것이었다.

“어머 어머, 어떡해!”

그녀의 친구들이 달려가 넘어진 영애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분홍 드레스의 영애는 다리를 접질린 것인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구두에 드레스 차림이니 더더욱 일어나기가 힘든 듯했다.

“저런, 파티에서 다치시는 분이 생기실 줄 몰랐네요. 안타깝군요.”

“오늘은 치유 물약 같은 거 없나요?”

크로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때였다.

“꺄악.”

이번엔 홀 반대편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흰 드레스를 입은 영애의 앞자락이 붉은 와인으로 물들어 있었다. 와인병을 든 시종이 몸 둘 바를 모르며 그 앞에 서 있었다. 보진 못했어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사고가 많은 파티네요.”

“저 정도로 젖었으면 집으로 돌아가야겠는걸요.”

크로버와 그런 말을 주고받던 참이었다.

“당신, 누구신가요?”

어느새 다가온 헤슬루가 크로버보다 한참 아래에서 당돌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크로버는 곧바로 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자기소개하려 했다.

“이름은 아까 들었답니다. 제가 궁금한 건 우리 기사님에게 무슨 속셈으로 접근했느냐예요.”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헤슬루에 비해 크로버는 여유가 넘쳤다.

“속셈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파르미엔 영애께서 너무 아름다우시니 자연스럽게 끌린 것뿐이지요.”

마치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필 왕세자님이 계신 그 순간에요?”

“제가 녹시아 님의 첫 번째 상대가 되고 싶었거든요. 설령 왕세자님이라도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남자대 남자의 일이니까요.”

분명 내게 도움이 되었지만 저렇게까지 말할 일인가.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저 대답에 헤슬루는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좋아요, 다 맞는 말이긴 하네요.”

그러더니만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녹시아 님, 여자가 듣기에 맞는 말만 하는 남자는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답니다.”

나보다 한참 어린 헤슬루가 깜찍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웃으실 일이 아니랍니다. 제가 잠시 곁을 비워야 하니까 그동안 저 사람을…. 아니지, 남자들은 모두 경계하고 있으세요!”

“무슨 일 있어요?”

“제가 아니고 피리스 영애요. 드레스가 조금 찢어지는 바람에…. 드디어 왕세자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왔는데 이렇게 돼버렸답니다.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이에요.”

원래 파티장이란 이렇게 위험한 장소였나?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때 내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나는 시스템 메시지를 몇 번이나 읽어 보았다. 이 말인즉슨 카미앙은 게임에서의 공략 대상이 아닌 사람과는 연애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다친 분도, 헤슬루의 친구도 전부 카미앙에게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려다 일이 터진 거였지.’

멀리 있던 탓에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드레스에 와인이 쏟아진 영애도 카미앙에게 가던 길일지 몰랐다.

불상사가 일어난 영애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거 엄청난 수확이었다.

‘이러다 보면 카미앙에게 접근하는 영애들에겐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돌 테고, 헤슬루와 라라벨은 이미 떠난 기차고, 마룬시에 공녀도 선물을 구하지 못했으니 어찌 될지 알 수 없고. 루티시나만 잡으면 정말로 카미앙 인생엔 아무도 없는 거네?’

행복회로가 잘도 돌아갔다. 아예 내가 직접 소문을 내는 건 어떨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왕세자에게 접근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이다.

‘카미앙도 했었는데 나라고 못 할 거 있나.’

“저기….”

“못 들으셨잖아.”

또다시 영애들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미앙 때문에 불운을 맞이할 가여운 소녀에게 기도라도 해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전 나탈리라고 해요. 파엘 후작 가의 나탈리요.”

“반갑습니다. 파엘 영애.”

하지만 이번엔 카미앙이 아니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누가 봐도 미인이란 소리가 나올법한 소녀가 크로버 앞에 서 있었다.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꼭 쥐고 있는 그녀는 꽤 긴장한 모습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게 성함을 알려주시겠어요?”

크로버가 다시 한번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소녀는 그것만으로도 기쁘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소녀의 친구인 듯한 다른 영애가 나섰다.

“정해진 파트너가 없으시다면 나탈리와 한 곡 추시는 건 어떠세요? 모리아리티 백작님께서 연회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나탈리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답니다.”

미처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파티에 참석한 영애들에게도 눈이 있는데! 크로버 같이 눈에 띄는 미남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게다가 본인 입으로 연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바렌시드의 신관이 정말 연애를 할 수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크로버인 상태에서는 누구든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난 조용히, 마치 발에 바퀴를 단 것처럼 크로버와 반대 방향으로 쓰으윽 움직였다. 전장에서 사용하던 기술이 파티장에서 쓰일지 미처 몰랐다.

‘내가 혼자 있으면 크로버가 눈치 볼 수도 있으니까.’

동시에 필사적으로 아는 얼굴을 찾았다. 이것 역시 전장에서 제법 유용했던 멀리 보기 기술이었다.

‘찾았다.’

나는 재빨리 디저트들이 놓여있는 테이블로 이동했다.

“다리스 대장님. 오늘 정말 멋지시네요.”

“…파르미엔 기사님?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내가 열심히 꾸몄다고 한들 이 정도로 놀라면 민망했다.

“제가 평소와 그렇게 다른가요?”

“아닙니다.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아니, 원래 아름다우셨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 친구들과 기사님 이야기를 하던 참이라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곁에는 정말 다리스의 친구처럼 생긴 사내들이 술잔을 들고 서 있었다.

“아, 파르미엔 기사님이시군요. 안 그래도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이봐, 다리스. 이렇게 미인이시라는 이야기는 없었잖나.”

난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내가 낯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난 바렌시드 사교계에서 제법 이름이 나 있는 것 같으니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이미 한번 유명세를 탄 몸이었다.

자기소개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였다.

“이제 와서야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전 처음에 소문만 듣고 철없는 귀족 아가씨인 줄만 알았습니다. 뭐 저주에 걸렸느니 마느니 하는 말도 있었지만 그건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요.”

짙은 밤색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쇼하트 자작이었다. 다리스가 그만하라는 듯 옆구리를 찔렀지만,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마치 입이 근질거려서 가만히 둘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승전과 동시에 나타나서 자신이 왕세자님의 약혼녀라고 주장했으니 말이죠. 다들 그렇게 수군거리지 않았습니까? 잠깐의 불장난이 영원한 사랑인 줄 알고 바렌시드까지 따라온 멋모르는 시골뜨기라고요.”

“쇼하트, 자네는 늘 그 입이 방정이지.”

“파르미엔 기사님, 기분이 상하셨으면 이 녀석을 당장 끌고 나가 검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소문의 주인공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다니, 확실히 경솔한 사람이었다. 베르만의 악담보다 더한 직격탄이 아닌가. 다리스의 제안대로 밖으로 끌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일단 참자. 난 이성적인 사람이잖아?’

표정이나 태도에서 베르만 같은 빈정거림이나 악의가 느껴졌다면 참지 못했겠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점잔만 빼고 있는 귀족 무리에서 이렇게 진솔한 이야기를 듣기도 쉽지 않으니까.’

안 그래도 카미앙의 약혼녀라 거짓말을 했다는 둥, 아나드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둥 나에 대한 괴소문이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명성이 높아지긴 했는데 귀족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정말로 좋아졌는지 알고 싶었다.

지금이 그 타이밍이라 생각한 나는 쇼하트에게 되물었다.

“그럼 지금은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하하,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지요. 지금은 뛰어난 기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고, 무엇보다 근래에 세 번씩이나 활약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빛나는 명성이 그 거지 같은 소문을 잠재웠구나.

“그런데.”

상대가 짐짓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물론 조금 목소리가 작아졌다 뿐이지 주위의 많은 사람이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왕세자님과 뭔가 있었던 건 맞는 것 같은데요. 안 그렇습니까?”

“이런 무례한 자를 봤나. 기사님, 역시 이놈은 정원으로 끌고 나가야겠습니다.”

다리스가 나섰지만 이건 기회였다. 이제 카미앙에게 나는 아무런 마음이 없다는 것을 온 천하에 알릴 수 있는 기회.

“그거야말로 제가 멋모르는 시골뜨기였죠. 사랑의 맹세 하나면 다 끝난 건 줄 알았거든요. 여기 와서 큰 대가를 치르고서야 알게 되었죠. 왕세자님의 사랑은 보통 사람의 사랑과는 다르다는 걸요. 아, 한가지는 확실히 해두죠. 불장난이니 어쩌니 할만한 일도 없었어요. 그냥 소꿉장난일 뿐이었죠.”

저 입 가벼운 사내가 이 사실도 어서 퍼트려 주길 바랐다.

“아…. 파르미엔 기사님, 결국….”

심각한 표정을 한 다리스가 끝내 말을 잊지 못했다. 난 이제야 마음을 정리한 사람처럼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다리스 대장. 결국, 이렇게 됐네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다리스는 분명 사냥제에서 실종됐을 때 무슨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럼 파르미엔 기사님, 아니 파르미엔 영애. 제가 한 곡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쇼하트 자작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뜬금없는 신청을 뭐라고 거절할까 생각하는 차에 등 뒤에서 크로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되겠는데요.”

크로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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