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43화 (43/95)

43

난 금색 자수가 놓여진 카미앙의 장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휙 돌려 크로버의 손을 다시 한번 꼭 잡았다.

“왕세자님의 권유는 감사하지만 전 이쪽이 더 마음에 들어서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카미앙은 크로버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가는 나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녹, 녹시아!”

다급한 목소리였지만 난 한 박자 쉬고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또 뭐죠?”

“어째서 내가 아니고 저 사내지?”

뭐지, 굳이 이런 자리에서 확인 사살을 당하고 싶은 건가? 본인이 원한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난 정말로 별다른 생각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환히 웃었다.

“저 얼굴에 약한 거 알고 계시잖아요. 아 물론 왕세자님도 잘생기셨지만, 이분이 더 제 취향이셔서요.”

「정, 정말 단지 그 이유뿐이라는 건가? 물론 녹시아가 미인에게 약하고 저자가 잘생기긴 했지만…. 잠깐, 나보다 저자가 더 잘생겼다고? 그게 일 년 넘게 나만 바라본 녹시아가 할 수 있는 소리인가?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고, 전쟁터에서 그렇게 구르기까지 했었으면서? 내가 아무리 무시하고 여자 취급 안 해줘도 그렇게 따라다니던 녹시아가?」

자기 죄목을 저렇게나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지 싶었다.

‘그러니까 다 알면서 그랬단 말이지.’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해 갑의 위치에 서는 사람은 왕세자건 선배건, 상사건 그저 쓰레기라고밖에는 표현할 말이 없었다.

“이쯤에서 출까요?”

크로버와 난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춤을 추는 다른 커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섰다. 게임에서야 주변의 시선에 주눅이 들어서, 카미앙과 살을 맞댄 게 부담스러워서 실수를 남발했지만, 녹시아도 백작 영애였다.

왈츠 정도야 당연히 출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운동신경이 좋은 걸 보면 춤도 기본 이상은 하지 싶었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크로버와 맞잡은 손을 위로 올리며 리듬을 탔다.

“앗, 미안해요.”

“또 실수를….”

“많이 아파요?”

…아니었다. 녹시아는 춤에 전혀 소질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시아였던 내가 평소에 춤을 췄던 것도 아니었다.

“녹시아 님. 몸에 조금만 힘을 빼시고 제가 이끄는 대로 따라오시는 게 어떨까요.”

결국, 크로버의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왔다. 이대로 가다간 크로버의 발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크로버의 스텝과 호흡을 맞출 수 있게 되자 여유가 생겼다. 발만 쳐다보는 게 아닌 크로버와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눌 여유 말이다.

“매번 사람을 놀라게 하시네요.”

“오늘 등장 괜찮았나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딱 맞는 타이밍에 등장했다. 하지만 감탄을 한다면 크로버는 금세 기고만장해질 사람이었다.

“뭐, 나쁘진 않았어요.”

“이 반응은 뭡니까. 좀 더 기뻐하셔도 될 것 같은데.”

“제가 왜 기뻐해야 하죠?”

“이렇게 잘생기고 스타일 좋은 파트너가 떡 하니 나타났으니 당연히 기쁠 일 아니겠습니까?”

“춤을 추고 있지 않았으면 당장 버리고 나갔을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늘 크로버는 정말 멋졌다. 물론 화사하고 단정해 보이는 카미앙과는 결이 달랐다. 이 게임에 뱀파이어나 마족이 있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그런 모습이었다.

나는 크로버와 높게 맞잡은 손을 축으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았다. 순간이었지만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크로버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네요. 전 지금 정말 기쁜데 말이죠.”

다시 얼굴을 마주하자 크로버가 말했다.

“뭐가 그렇게 좋으신데요?”

“당연히 이렇게 아름다운 분과 함께 춤을 추고 있어서죠. 오늘 녹시아 님을 본 순간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숨이 막혀서 하마터면 등장할 타이밍을 놓칠 뻔했습니다.”

“그런 말을 참 잘도 하시네요.”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진짜로 아름다우시니까요.”

“부끄럽지 않은데요?”

부끄럽지 않기는. 이시아도 녹시아도 아름답다느니 예쁘다는 말에는 면역력이 없었다. 진심이든 예의상 하는 말이든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 허리에 살짝 닿아있던 크로버의 손이 날 앞으로 끌어당겼다. 경쾌했던 악곡이 부드럽게 변하는 순간이었다.

“얼굴 빨개지셨는걸요?”

크로버의 숨결이 내 얼굴을 간지럽힐 만큼 가까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던 마음이 들켰기 때문일까. 아님 그의 숨결에서 묻어나온 옅은 박하 향 때문일까. 얼굴의 온도가 다르다는 걸 스스로가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돼버렸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은데 역시 저 얼굴이 문제였다.

‘저 얼굴을 오징어로 보이게 하는 스킬이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크로버의 얼굴을 바꿀 수는 없으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킬의 도움을 빌려서 말이다.

‘지금이야말로 입을 열 타이밍’ 스킬을 발동했다. 난 ‘그래 내 얼굴 빨개졌는데 그게 뭐 어때서?’와 같은 느낌의 선택지를 골랐다.

“그러는 당신은 오늘 어찌한 일로 파티에 온 거죠? 설마 제 얼굴이나 빨갛게 만들려고 온 건 아닐 테고.”

크로버의 얼굴에 미약한 반격이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어렸다. 다시 한번 크로버와 가까워지는 순간에 난 아예 화제를 바꿔버렸다. 그가 진지하게 답할 수밖에 없는 화제였다.

“또 왕세자님과 관련된 신탁이라도 받았나요?”

“오늘은 그저 파티에 참석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바렌시드는 신관이 파티도 즐기는 모양이네요.”

“파티만 즐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번엔 크로버가 한 바퀴 돌 차례였다. 뒤돌았다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크로버가 말했다.

“연애도 할 수 있죠.”

뭐지 이 눈빛은. 사람을 이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그런 말을 하면 없던 오해도 생길 수 있다는 걸 이 신관은 모르는 듯했다.

“그, 그러시구나.”

마침 바이올린의 스타카토와 함께 음악이 끝났다. 난 냉큼 크로버에게서 떨어졌다.

춤을 연달아 출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홀 중앙에서 슬금슬금 벗어났다. 그런 내 옆에 크로버가 바짝 붙어 따라왔다.

“파티를 즐기고 싶으시다면서요?”

“네.”

“그럼 어서 다른 영애분들과 춤도 추시고, 저기 신사분들과 담소도 나누시고.”

크로버가 내 말을 끊었다.

“제게 있어 파티를 즐긴다는 건 한껏 꾸민 녹시아 님과 춤을 추고 와인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뭐 그런 겁니다.”

아무래도 오늘 크로버의 상태가 영 심상치 않았다.

“… 혹시 신탁이 이거였어요? 녹시아에게 달라붙어 있어라. 아니면 녹시아와 몇 번 이상 춤을 춰라.”

“하하, 그거 좋네요. 맞아요. 신탁이었습니다.”

크로버가 어찌나 유쾌하게 웃어대는지 베르만이 가까이 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첫 번째 댄스가 끝나는 걸 기다리고 있다가 이쪽으로 달음질쳐 온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시죠?”

“바르하르트 드 베르만이라고 합니다.”

생뚱맞은 자기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베르만은 닦달하듯 크로버에게 물었다.

“이름과 신분을 밝혀줬으면 합니다만.”

내가 이름을 알려줬으니 너도 당연히 신분을 밝혀야 한다는 논리인가 보다. 남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기 딱 좋은 태도였다.

“왕실 파티에 참석할 정도면 이름과 신분은 확실할 거란 생각은 안 해보셨는지요.”

“말이 길 군요. 보통 사기꾼들이 말이 긴 경향이 있지요.”

베르만의 무례와는 별개로 나도 같은 의문이 일었다. 크로버는 이 파티에 어떻게 참석한 걸까? 역시 예지의 신관이란 신분으로 들어온 걸까? 애당초 신관에게 파티 출입 허가가 나는 걸까?

“크로버 라 모리아리티. 동 아그니안 제국에서 왔습니다.”

내 걱정과는 달리 크로버는 평범한 귀족의 이름을 댔다.

‘그러고 보니 향료 길드의 점원도 크로버를 다른 나라의 귀족으로 알고 있었지.’

그저 둘러댄 소리인 줄만 알았는데 제법 구체적인 신상이 있었다.

“모리아리티라면 그 상인 가문을 말하는 겁니까?”

심지어 베르만이 알고 있는 가문인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최근엔 백작위를 받았지요.”

베르만은 카미앙에게 지시 받은 게 분명한 질문을 건넸다.

“파르미엔 영애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육하원칙에 따라 밝혀 주셨으면 합니다.”

대화라기보단 취조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바렌시드의 소 후작 정도 되면 귀족 영애의 사생활을 함부로 캐도 되나 봅니다.”

“귀족 영애의 사생활이라뇨?”

“저와 녹시아 양의 관계를 궁금해 하셨으니 귀족 영애의 사생활에 관해 물으신 거나 마찬가지지요.”

“아니, 이건 사생활을 캐묻는 게 아니라.”

베르만이 말을 멈췄다. 굉장한 실례를 범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언제나 귀족의 예법 따위는 집어 치운 채 녹시아를 대하다 보니 내 얼굴만 보면 절로 이런 태도가 나오나보다.

사례라도 들린 듯 몇 번이나 헛기침하던 베르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동 아그니아 제국의 귀족과 바렌시드 귀족 영애 간의 국가적인 만남에 대한 행정적인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질문일 뿐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바렌시드의 왕세자 보좌관께서는 파티에서도 행정 자료를 수집하실 만큼 업무에 열성적인 분이시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한껏 비꼬는 말투였지만 본인이 내뱉은 말이기에 베르만은 뭐라 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저와 파르미엔 영애의 만남에 행정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저희는 국가적 차원에서 만난 게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관계를 맺은 것뿐이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난 크로버가 던진 ‘쿵’을 ‘짝’소리 나게 받았다.

“모리아리티 백작님의 말이 맞아요. 가서 왕세자님께 전해주세요. 녹시아가 개인적으로! 백작님을 만나고 있었다고요.”

결국, 베르만은 아무런 소득 없이 물러났다. 베르만의 걸음이 향하는 곳 끝에 카미앙이 보였다. 베르만이 어떤 소식을 물고 돌아올지 기다리는 눈치였다.

“뭡니까? 그 아련한 눈빛은.”

“아련이요?”

“지금 왕세자님을 엄청 아련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제가요?”

“저와 사적인 만남을 가져왔다고 왕세자님께 전해지는 게 신경 쓰입니까?”

“아뇨, 그걸로 자극이 된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죠.”

원래는 루티시나에게 춤을 청하려다가 크로버의 등장에 승부욕이 일어 내게 손을 내민 카미앙이었다. 지금처럼 크로버와 나 사이에 뭐라도 있는 것처럼 전해지는 게 그의 승부욕을 또다시 자극할지도 몰랐다.

‘이걸 질투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크로버의 존재가 녹시아를 보다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게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카미앙의 후회를 하루라도 빨리 앞당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자극…. 자극이란 말이죠.”

“네?”

내 생각에 빠져 크로버의 중얼거림을 놓쳐버렸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왕세자님의 이름이 들리는 것 같은데….”

크로버의 말대로 뒤쪽에서 카미앙을 입에 올리며 떠들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 카미앙에 대한 내 태도를 비난하는 건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가봐, 왕세자님 곁에 지금 아무도 없잖아. 기회라니까?”

“괜찮을까? 괜찮겠지?”

“그럼, 너도 루티시나에게 뒤지지 않아.”

내 예상과는 달리 카미앙을 흠모하는 영애들의 대화였다.

‘카미앙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걸 잊고 있었네.’

동시에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 게임에서의 공략 캐릭터가 아니라도 카미앙은 얼마든지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몇 명인지 셀 수도 없는 수많은 귀족 영애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었다. 게임이 현실이 된 지금 카미앙의 연애 상대는 우리가 정했던 공략 대상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내 불길한 예감이 맞기라도 하다는 듯 곧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영애 한 명이 카미앙을 향해 다가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