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42화 (42/95)

42

‘잊혀진 퀘스트? 아, 그러고 보니….’

‘카미앙이 참석한 파티에 드레스 입고 나타나기’가 어장 속 물고기 벗어나기 퀘스트 중 하나였던 게 생각났다. 그때는 달성할 수 없어서 그냥 지나쳤던 퀘스트였다.

<당신의 피부가 한결 빛이 납니다.>

<당신의 머릿결이 한 층 더 윤이 납니다.>

<당신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반짝거립니다.>

.

.

.

그렇게 대충 내 미모가 더 아름다워 보일 거라는 메시지가 주르륵 떴다.

<주의사항: 해당 파티에 참석하는 동안만! 효과가 유효합니다.>

‘미약한 보상이라니, 귀엽기도 하지.’

물론 효과가 있는 건지 의심스럽긴 했다.

‘남들한테 더 아름답게 보인다니, 내가 확인할 수도 없….’

아니, 효과가 있었다. 내게 고정된 카미앙의 눈빛에서 난 효과가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평소에 꾸며낸 멜로 눈깔과는 달랐다. 카미앙의 눈동자 속에는 샹들리에보다 더 반짝이는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 내가 왜 이러지? 상대는 녹시아라고. 봐, 드레스도 구닥다리잖아. 저런 건 우리 어머니나 이모님이나 입는…. 그런 디자인인데…. 녹시아가 입으니 마치 여신이 입은 것처럼 멋지고 우아하군. 초록빛의 머리와 아주 잘 어울려…. 아니지,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카미앙은 몹쓸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고개를 휙휙 저었다. 머릿속의 생각을 떨쳐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 댄스 상대로도 부끄럽지 않은 정도지. 나와의 댄스라니, 이 정도면 녹시아에겐 최고의 상…. 이런 녹시아를 쳐다보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잖아? 이러다가 차례를 뺏기겠어.」

그런 카미앙을 보는 내 마음속에선 처음 느껴보는 희열이 일었다. 이건 사냥제에서 카미앙을 농락하거나 넘어진 그에게 지팡이를 쥐여 줄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카미앙이 온전히 나만 보고 있어. 내게 감탄하고 날 원하고 있다고.’

입가에서 삐죽 새어 나오는 게 미소인지 허탈함인지는 알 수 없었다. 녹시아가 본인을 위해 헌신할 때는 말 그대로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던 카미앙이었다. 어장에서 탈출했을 뿐만 아니라 카미앙에겐 일말의 관심도 남아 있지 않은 지금에서야 날 저렇게 바라보다니.

‘멍청한 카미앙. 타이밍을 맞추는 것도 능력이란다.’

일단은 춤을 신청하면 대차게 거절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그럼 카미앙은 후회할까? 오늘이야말로 카미앙이 후회하는 날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대기 중이었는데 카미앙이 내게 오기도 전에 우뚝 멈춰섰다. 고정되어 있던 카미앙의 시선이 오른쪽으로 옮겨 갔다. 루티시나가 서 있는 그 방향으로 말이다.

「루티시나? 지금 루티시나와 녹시아가 함께 있는 건가? 하필 이럴 때에….」

이제서야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왕세자님, 바르하르트 후작가의 루티시나 인사드립니다. 오늘따라 눈부시게 멋지시네요.”

루티시나가 스커트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이렇게 되면 녹시아에게 춤을 신청하기가 껄끄러운데.」

카미앙은 입으로는 미소를 그려냈지만 떨떠름한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루티시나는 첫 번째 댄스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오늘의 첫 곡은 남 대륙풍의 왈츠로군요.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에요.”

동시에 스쳐 가듯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오늘의 승패는 카미앙과의 첫 번째 댄스 상대가 누구인지로 결정나겠구나.’

카미앙을 두고 루티시나와 연적이 되는 듯한 구도가 되는 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내게 춤을 청한 카미앙을 보란 듯이 거절하는 통쾌함을 누릴 수 없게 된다. 그럼 덩달아 카미앙의 후회와도 멀어지겠지.

결국, 나는 승리를 위해, 그리고 카미앙의 후회를 위해 입을 열었다.

“왕세자님, 저번에 다친 곳은 괜찮으신가요? 발목은 어떠세요?”

난 일부러 사냥제에서의 일을 꺼내며 친근함을 표현했다.

“덕분에 다 회복했소. 오늘은 그 뭐랄까. 평소와는 많이 다르군. 정말… 정말… 다르군.”

「다른 영애들에겐 안부 인사처럼 건네던 말인데 녹시아에게는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 하기가 왜 이리 힘들지. 꼭 못할 소리를 하는 것처럼…. 습관 때문인가.」

결국, 아름답다는 그 짧은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카미앙은 말을 마무리했다.

‘속으로는 온갖 감탄을 다 하면서도 그 한마디 해주기가 그렇게 자존심 상한다 이거지?’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였다.

“다행이네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왕세자님께서 직접 초대장을 보내주셨는데 당연히 참석해야죠.”

“그러고 보니 사냥제에서 엄청난 일들이 있었죠?”

루티시나가 자신만 빠질 순 없다는 듯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번엔 아무로 카카론드 새를 잡지 못했더군요. 하긴 왕세자님이 잡지 못하셨는데 다른 누가 잡을 수 있겠어요?”

그러더니 나를 바라보며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듣자 하니…. 파르미엔 영애께서 무례한 행동을 하셨다는데.”

“제가요?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거죠?”

“오라버니께서 파르미엔 영애가 당돌하게 왕세자님의 사냥감을 가로챘다고 하시던데요. 물론 저는 파르미엔 영지에서는 볼 수 없는 귀한 사냥감이 눈앞에 있으니 실수를 한 것 아니겠냐고 말했지요.”

파르미엔에서 온 촌뜨기가 사냥감을 보고 흥분해 날뛰었다는 말이었다.

“글쎄요. 설마 다른 사람에게 사냥감을 뺏길 정도로 왕세자님의 궁술 실력이 형편없다고 생각시는 건 아니죠?”

날 욕보이려 한 것 같은데 역효과였다. 사냥감을 이야기를 꺼내봤자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건 카미앙 쪽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네요. 어떻게 그런 식으로 제 말을 곡해하실 수가 있죠?”

“바르하르트 영애의 말씀이 결국 왕세자님께서 제게 사냥감을 빼앗겼다는 뜻이니까요.”

“크흠, 다 지난 일이니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아름다운 두 레이디께서는 파티를 즐겨야 하지 않겠소?”

카미앙이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루티시나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재빨리 거기에 동조했다.

“맞는 말씀이에요. 이런 파티에 사냥제 같은 건 영 어울리지 않는 주제죠.”

루티시나는 그대로 카미앙에게 오른손을 뻗었다.

“첫 번째 춤을 함께 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파티가 될 것 같아요. 왕세자님.”

수줍은듯하면서도 당당한 저 표정, 우아하게 뻗어 올린 손동작, 자신감에 찬 대담한 발언. 스킬을 사용하면 나도 저 정도로 할 수 있을까?

<1. 카미앙, 제게 춤을 신청하려던 거 아니었나요?>

<2. 당신이 원한다면 첫 번째 상대가 되어드리죠.>

난 간만에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카미앙, 제게 춤을 신청하려던 거 아니었나요?”

눈꺼풀을 내리까는 것과 동시에 속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는 모순된 행동을 자연스럽게 해내며 난 카미앙을 바라보았다.

도도하기로 말하자면 내 목소리도 루티시나에게 뒤지지 않았다. 역시 레벨업을 한 보람이 있었다.

카미앙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른쪽에서는 내가, 왼쪽에서는 루티시나가 파트너가 되기를 요청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원래는 녹시아와 춤을 추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바르하르트 영애는 이런 일에 민감하니 어쩔 수 없군. 게다가 바르하르트 일가가 전부 다 파티에 참석했지. 녹시아는 어차피 첫 번째 상대 같은 건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을 테고. 늘 나를 이해해 줬으니 나중에 상황을 설명하면 되겠지.」

듣고 싶지 않은 속마음이 떠오름과 동시에 카미앙이 입을 열었다. 입 모양만 봐도 내 이름이 아니었다.

‘뭐야, 카미앙이 후회하기는 커녕 내가 카미앙에게 차이는 전개라고? 아무리 내가 주인공이 아니어도 그렇지 갑자기 이렇게 틀어질 수가 있어?’

오늘 후회하는 역할은 카미앙이 아니라 나였나보다. 나는 조금 전의 바보 같은 선택을 마음 깊이 후회했다.

“… 바르….”

카미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였다.

“아름다우신 레이디. 부디 제게 첫 번째 춤을 허락해주십시오.”

낮고 달콤한 음성에 뒤를 돌아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루티시나를 비롯한 다른 영애 모두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검은 슈트를 모델같이 소화한 미남자가 사람들의 시선 끝에 서 있었다.

“누구지? 누굴 부른 거야?”

“저분이 레이디라고 부른 사람은 누굴까?”

굉장히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그자가 내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나의 착각이라 여겼을 것이다.

“파르미엔 영애,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크로버가 날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까만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겨서인지 단순히 후드를 벗어서인지 평소보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죠?”

“파르미엔 영애에게 애인이 있었나요?”

반쯤 접어 웃고 있는 눈가에서는 다정함과 애정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땐 내게 흠뻑 빠진 연인이라도 되는 줄 알 정도로 말이다.

‘카미앙에게 다시 한번 배신당하는 순간에 내려온 동아줄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카미앙이 아니어도 댄스 상대 정도는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

사실 이건 크로버의 손을 잡은 후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이미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녹시아!”

카미앙이 내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이시죠?”

“좀 전에 내게 춤을 추자고 하지 않았소?”

내게 말을 걸면서도 카미앙의 시선은 크로버를 향하고 있었다.

「저자는 누구지? 모든 영애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군. 녹시아하고는 원래부터 알던 사이인가? 그럴 리 없는데. 설마 녹시아에게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건가?」

크로버의 등장에 꽤 당황한 눈치였다.

“그랬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왕세자님께서는 저와 춤을 추고 싶으신 것 같지 않아서요.”

난 루티시나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 바르하르트 영애라는 말이 입 밖으로 반쯤 튀어나오지 않았었나?

“아니, 오해한 모양인데 난 그대에게 춤을 신청하려던 참이었소.”

「역시, 녹시아는 예전의 녹시아가 아니야. 요즘 들어 귀족들 사이에서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더니만…. 이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

이제야 카미앙의 꿍꿍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전쟁터에서만 쓸모 있는 줄 알았던 나는 왕도에서도 여전히 쓸모 있는 사냥개였다. 뒤늦게 깨닫고 좀 귀여워해 줄까 싶었는데 생각지도 않던 라이벌이 나타난 셈이었다.

‘본인이 갖긴 내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남 주기도 아까운 존재라 이거지.’

어쨌거나 명성을 올린 게 효과가 있었다. 루티시나도 있는데 정말로 카미앙이 내게 손을 내밀었으니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