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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갖춰 입은 모습을 보니 새롭군요. 이제야 좀 백작가의 영애다우십니다. 곁에 있는 영애들에게 많이 배우시면 좋겠군요.”
한참 어린 헤슬루 무리에 끼어 있는걸 비꼬는 말이었다. 마치 1학년 교실에 6학년 학생이 들어와 있다는 듯한 말투로 말이다.
“어머나, 소 후작님. 뭔가 잘못 알고 계신답니다. 파르미엔 기사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셔주는 거랍니다. 저희가 모르는 것들을 많이 알고 계신걸요.”
“그렇긴 하죠. 파르미엔 기사님은 평범한 영애들이 모르는 재미난 일을 많이 알고 있긴 하시겠죠. 야영장 텐트를 세우는 방법이라던가 눈밭을 빨리 걸어가는 법 같은 건 참으로 유용하고 신기한 기술이었습니다.”
날 굳이 파르미엔 기사라고 칭하는 것부터가 속셈이 뻔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건 영애들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것들뿐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모두 전쟁터에서 유용하게 사용하신 기술이겠죠. 안 그래도 저희가 아나드 토벌전에서의 활약을 궁금해했답니다.”
헤슬루가 날 대신해 나섰다. 사교계가 낯선 나를 위해 나름대로 용기를 낸 행동이었다.
하지만 모도루 백작가의 어린 영애는 바르하르트 후작가의 능구렁이를 당해내긴 역부족이었다.
“녹시아 님이라면 그러실 만하네요. 전쟁 이야기가 가장 적합하겠죠. 사교계에 갓 데뷔한 영애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로 말입니다.”
파르미엔의 시골뜨기가 귀족 영애들 틈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고작 이거란 말이지?
나보다 더 분해하는 사람은 헤슬루였다. 작은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더는 헤슬루 뒤에 숨지 말자.’
<1. 영애들에게 유용한 팁도 알려줬죠.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베르만 님 같은 남자를 사귀어야 한다고요.>
<2. 아무래도 제가 이 파티에 오신 게 못마땅하신 모양이네요.>
지금 필요한 건 강력한 한방이었다. 두 번째 선택지 같은 말을 해봤자 베르만이 정중한 얼굴로 그럴 리 없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선택지는 대체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지….’
모 아니면 도였다.
“제가 검 휘두르고 활 쏘는 이야기만 하셨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전 영애들에게 유용한 팁도 알려줬죠.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베르만 님 같은 남자를 사귀어야 한다고요.”
베르만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일단은 성공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 위험했던 전쟁터에서 단 한 번도 위험한 적 없었던 베르만 님이시잖아요. 적과 검 한번 부딪치지 않으시고 토벌전의 일등 공신이 되셨으니. 애인으로서 얼마나 마음 놓이고 든든한 일이겠어요. 그렇죠, 헤슬루 영애?”
헤슬루와 그녀의 친구들이 과연 그렇다고 입을 모아 대답했다. 몇몇은 뒤에서 저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서로 묻기도 했다.
“녹시아 님, 이런 발언은 정말 무례하시군요.”
“어머. 무례했다면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세요. 하지만 저는 이게 왜 기분 상할 일인지 영 모르겠네요. 저같이 어수룩한 사람보다야 베르만 님처럼 영민하신 분이 장차 영애들의 애인이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베르만의 낯빛이 영 좋지 못했다. 어린 영애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오라버니, 여기서 뭘 하시는 거죠?”
적절한 타이밍에 루티시나가 등장했다.
“어린 영애들만 모인 곳에서 대체 뭘 하시는 거예요. 사람들의 눈도 있는데 가문의 체면을 생각하셔야죠. 이쪽에서 페르디운 공작가의 영애가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언뜻 들으면 베르만을 타박하는 말이었지만 결국 수준 안 맞는 애들하고는 놀지 말라는 뜻이었다.
“루비카,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언니가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잖니.”
갈색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올렸던 소녀가 주춤주춤 앞으로 나왔다. 헤슬루가 피리스 영애라고 소개했던 소녀였다.
이름이 호명된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자신을 찾으러 나타난 가족이나 지인의 부름에 헤슬루의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결국, 내 곁에 남은 건 헤슬루 한 명뿐이었다.
‘이렇게 2차전을 해보자는 건가.’
파티가 아니라 전쟁터라고 했던 헤슬루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비유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전쟁터와 다를 게 없었다.
“안녕하세요, 파르미엔 영애. 지난번에 장미 정원에서 뵈었었죠?”
“반가워요, 바르하르트 영애. 다시 뵙네요.”
“바렌시드 생활이 잘 맞으시나 봐요. 그때보다 훨씬 좋아 보이시네요. 물론 그때도 파르미엔 영애는 참 귀여우셨지만요.”
어장 속 물고기의 제약에 걸린 그때의 나는 참 우스워 보였다는 말이었다. 말을 빙빙 돌리기로 유명한 루티시나와의 원활한 대화를 위해 난 스킬을 발동했다.
「그땐 제대로 말도 못 하던 촌뜨기가 바르하르트의 소 후작에게 말대꾸를 했다는 거군요. 안 그래도 카미앙 님과의 추문 때문에 신경 쓰이던 참이었는데, 차라리 잘됐어요. 오늘 단단히 창피를 줘서 다시는 사교계에 발을 못 붙이게 해주겠어요.」
뼛속까지 귀족 영애인 루티시나에게는 일단 곰 작전으로 나가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바르하르트 영애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아하시네요.”
“어머나, 별말씀을요. 우아하기로 말하자면 오늘 모인 영애 중 파르미엔 영애를 따라올 사람이 없죠. 페르디운 공작부인이나 왕비님과 비견할 만해요. 안 그런가요?”
루티시나가 곁에 있는 영애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저런 한물간 디자인의 옷을 입고 오다니. 잘 어울리긴 하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비웃어 줘야 해.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도 제대로 못 들고 다니게 말이야.」
“그러네요, 루티시나 영애의….”
난 루티시나와의 전투에 집중하기 위해 주변 소음은 차단하기로 했다. 제 나름대로 한마디씩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내겐 그냥 입만 벙긋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약간의 연기력이 필요했기에 스킬의 힘을 빌렸다. 루티시나의 숨은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제가 그렇게 우아해 보이나요? 모두에게 자랑이라도 해야겠어요. 루티시나 영애에게 왕비님만큼이나 우아하다는 평을 들었다고요.”
난 한치의 타격도 없는 사람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치 빠른 루티시나도 내 연기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저런 저런.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군요. 설마 정말 칭찬이라고 알아들은 건가요?」
다른 패를 꺼내 들 생각인지 루티시나는 미간을 좁히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껄끄럽지만…. 파르미엔 영애를 위해서 말씀드릴게요. 요즘 사교계에서 제일 이슈가 되는 사건이 뭔지 아시나요?”
모르겠다는 대답을 바랐겠지만 난 오늘 한 마리의 곰이었다.
“그럼요, 저와 왕세자님의 약혼 소식 아니겠어요?”
「어머나, 이걸 자기 입으로 말해? 정말 부끄러움이라고는 요만큼도 모르는 사람이네요.」
“정확히 말하자면 약혼 소식이 아니라 파르미엔 영애의 약혼 주장이겠지요.”
“뭐, 왕세자님의 마음 덕분에 그렇게 보이긴 하겠지만요. 아무튼, 약혼을 했던 건 사실이에요. 이제 와서 왕세자님이 아니라 하셔도 말이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티시나 영애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았나요? 오라버니께서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아뇨, 전 처음 듣는 소리네요. 정말 부끄러움도 없는 분이시군요. 어떻게든 왕세자님과 본인을 약혼으로 엮으려 하시다니. 귀족 영애로서 자존심도 없으신가요?”
“음…. 귀족 영애의 자존심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루티시나 영애께서 보여주시면 제가 대답해 보도록 할게요. 전 그게 뭔지 잘 모르겠거든요.”
루티시나가 흰 부채를 쥐어 잡았다. 저 부채가 빠르게 그리고 자주 움직일수록 내게 판이 유리하게 흘러간다는 증거였다.
‘그래,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만큼 답답한 상대도 없는 법이지.’
그때 루티시나의 곁에 있던 영애가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다. 루티시나의 부채가 다시 그녀의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좋아요, 파르미엔 영애를 위해서 제가 오늘 파티 내내 귀족 영애의 자존심이 뭔지 보여드리죠.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게 있네요. 오늘 참석자 명단에 파르미엔 영애는 없던 거로 알고 있는데. 곁에 꼭 붙어 계신 모도루 영애의 지인으로 참석하신 건가요?”
「파르미엔 영애에게 보내는 초대장은 없었다는 말이죠. 좋아요. 초대장도 없이 파티에 참석한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알려드리죠.」
“아뇨, 왕세자님께서 얼마 전에 초대장을 보내셨어요.”
“왕세자님이요?”
“네, 저도 깜짝 놀랐지 뭐에요. 보통 초대장은 한 달 전에 보낸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초대하시다니요.”
“아마 왕세자님이 직접 보내신 게 아니라 그냥 왕세자님의 이름으로 보낸 걸 거예요. 생각해 보니 저도 이번 파티 초대장은 왕세자님의 이름으로 되어있던 것 같네요.”
「왕세자님이 파르미엔 영애를 뒤늦게, 직접 초대하셨다고? 대체 왜?」
그런데도 루티시나는 평온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아, 그런 거군요. 저는 또 왕세자님이 저를 챙겨주신 건 줄 알았죠. 그럼 대체 누가 저를 뒤늦게 초대한 걸까요?”
“글쎄요, 행정관들이 뒤늦게 초대장이 누락된 걸 알아챈 게 아닐까 싶네요.”
「정말 왕세자님이? 파르미엔 영애가 왕세자님을 구해줬다더니만 설마 그것 때문에 마음에 변화라도 생기신 건가? 설령 그렇다 해도 초대장은 그저 인사치레일 뿐이겠지?」
그 말을 끝으로 연회장 내에 음악이 연주되었다. 곧이어 하나둘 짝을 지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댄스 타임인 건가.’
첫 댄스 타임이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모도루 영애, 이 정도면 충분해요. 영애도 가서 파티를 즐기세요.”
계속 헤슬루를 내 곁에 잡아둘 수는 없었다.
“이 전쟁은 이미 제가 승기를 잡았답니다.”
헤슬루가 까치발을 들며 내게 속삭였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마세요.”
헤슬루가 눈짓으로 가리킨 곳에서 카미앙이 걸어오고 있었다.
새하얀 예복을 입고, 금발 머리를 뒤로 넘겨 한껏 멋을 부린 카미앙은 지금껏 내가 보았던 그 어느 때 보다 빛났다.
칭호의 변화 덕분에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상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저쪽에 있는 게 녹시아?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드레스가 정말 잘 어울리는걸. 녹시아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군.」
나보고 드레스는 어울리지 않으니 입지 말라고 했던 게 누군데. 본인이 했던 말은 까맣게 잊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