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40화 (40/95)
  • 40

    지난번 만남에서 난 라라벨에게 카미앙과의 관계를 말했다. 날 고민하게 했던 몹쓸 양아치가 카미앙이라는 걸 알린 것이다.

    이세계에서 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내게 개인사를 늘어놓기 가장 편한 상대가 라라벨이었다. 물론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가면 극장 사건 이후로 날 신뢰하게 된 라라벨을 확실하게 공략 캐릭터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도 있었다.

    “하나같이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네요.”

    “그럼요. 최신 유행이랍니다.”

    “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귀족 영애 스타일이네. 잠시만 실례할게요.”

    라라벨은 옆에 있던 다른 카탈로그를 집어 들었다.

    “그쪽에 있는 건 연배가 있으신 귀부인들이나 입는 스타일이랍니다.”

    헤슬루가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라라벨은 여유 있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꼭 그렇지만도 않죠. 십 년 전에는 이 스타일이 최신 유행이었는걸요.”

    앞서 헤슬루가 권한 것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벨벳 느낌이 나는 짙은 색의 소재에 부풀린 스커트 대신 차분하게 떨어지는 스커트가 인상적이었다.

    “귀여움보다는 기품과 당당함을 강조하는 이런 디자인이 녹시아의 매력을 더 잘 살려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안돼요. 절대 안 돼요. 우리 기사님께 그런 구닥다리 같은 옷은 절대 입힐 수 없답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헤슬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아직은 레이디의 예절을 지키고 있었지만 여기서 라라벨이 강하게 맞받아친다면 레이디고 뭐고 폭발할 것 같았다.

    “아가씨, 흥분하지 마시고 제 얘기를 들어보세요.”

    라라벨은 카탈로그 두 개를 나란히 놓고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다.

    “이 디자인이 왜 길게 유행하지 못했는 줄 아시나요? 어울리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녹시아는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가 있잖아요? 무조건 올드해 보일 거라는 편견은 버리고 봐봐요. 가슴 부근에는 반짝이는 보석을 흩뿌리듯 박아넣고 스커트 뒷부분을 길게 늘어뜨리면 마치 여신처럼 멋질걸요.”

    “아뇨, 유감스럽게도 제 의견은 다르답니다. 그 늘어지는 스커트 대신 풍성하게 띄운 스커트가 더 아름답지 않겠어요? 연한 녹색으로 겹겹이 레이스를 겹치면 우리 기사님의 화사하고 싱그러운 이미지가 확 살아날 거랍니다. 거기에 사랑스러운 레이스와 리본으로 포인트를 준다면 파티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기사님이 되시겠지요.”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저희끼리 이럴 게 아니라 옷을 입을 당사자한테 물어보는 게 어떠세요?”

    내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말이 들려왔다. 라라벨과 헤슬루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헤슬루는 그렇다 치고 라라벨마저 이럴 줄이야.’

    처음엔 그저 헤슬루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건 줄 알았는데 라라벨 역시 진심이었다. 아무래도 카미앙이 참석하는 파티라는 게 승부욕을 건드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바렌시드 자유인으로 칭호가 상승하며 스킬의 능력에도 변화가 있던 것이 퍼뜩 떠올랐다.

    <사람을 분석하는 마케터의 혜안: 대화를 하지 않는 상대의 속마음까지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밀하게 상대의 마음을 알아보세요>

    <의미없는 이사님의 잔소리 흘려듣기: 공략 대상의 말도 흘려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듣고 싶지 않은 세상의 소리를 모두 흘려보내 보세요.>

    <지금이야말로 입을 열 타이밍: 공략 대상만이 아닌 모든 사람의 대화에 활용해 보세요. 연기력이 필요한 순간, 설득력이 필요한 순간, 임기응변이 필요한 순간, 당신을 도와드립니다.>

    난 ‘지금이야말로 입을 열 타이밍 스킬을’ 시전했다.

    <1. 두 벌 다 만드는 건 어떨까요? 입어보고 더 잘 어울리는 쪽으로 하죠.>

    <2. 두 개를 합치는 건 어떨까요? 장점만 뽑아서 완벽한 옷을 만드는 거예요.>

    헤슬루에게 신세 지는 주제에 1번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두 사람의 의견을 합치는 건 어떨까요? 장점만 뽑아 완벽한 옷을 만드는 거죠.”

    내 목소리가 원래 이랬었나? 말을 내뱉으면서도 낯설었다. 이대로 선거에 나가면 어떤 자리에도 당선될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 있는 목소리였다.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닌지 라라벨과 헤슬루가 내게 집중하는 것이 보였다.

    “사실 난 드레스에 대해선 잘 몰라요. 그보다는 두 사람이 나를 위해 이렇게 아이디어를 내주는 게 그저 좋을 뿐이죠. 내가 바렌시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두 사람이 내 드레스를 디자인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거예요.”

    난 양쪽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애매한 대답에 헤슬루가 토라지거나 라라벨이 실망하지 않길 바라며 말이다.

    “어음….”

    헤슬루의 커다란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잠시 잊고 있었답니다. 드레스를 입을 때의 행복한 기분이 그 사람을 가장 빛나 보이게 만들어 준다는 걸요. 이 쪽분과 의견을 합쳐서 만든 드레스가 기사님을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다면 헤슬루는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답니다.”

    헤슬루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로 의사를 밝혔다. 뺨이 붉은 것이 조금 전 언성을 높인 일을 부끄럽게 여기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고집 센 헤슬루가 먼저 마음을 바꿔주다니.’

    “본인 생각이 그렇다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어요.”

    헤슬루가 저런 모습을 보여줘서인지 스킬이 통한 덕분인지 라라벨도 흔쾌히 동의했다.

    “제가 고른 디자인에 아가씨께서 고른 원단을 사용하는 건 어떠신가요? 옛날처럼 무게감 있는 디자인이 아니라 하늘하늘한 느낌이 될 거예요. 레이스도 당연히 사용하고요.”

    “드레스 색은 어떻게 할 거죠?”

    “그거야말로 아가씨의 고견을 듣고 싶네요. 전 갈색이나 검은색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만 들지 어울리는 색이 딱 떠오르질 않거든요.”

    두 사람은 한참이나 대화를 나눈 끝에 샵에 주문을 넣었다.

    주인은 현재와 과거, 우아함과 산뜻함, 당당함과 청초함이 공존하는 어메이징한 드레스가 탄생할 것이라고 했다. 장삿속인지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난 이 고난의 드레스 샵 스케줄이 무사히 끝난 것만으로도 크게 만족스러웠다.

    “날짜는 잘 맞춰주시겠죠?”

    “물론입니다. 모도루 영애.”

    “저번에 제 옷을 맡아주신 마담 있잖아요. 그분 솜씨가 제일 좋으니까 주로 그분한테 맡겨줘요. 알았죠?”

    “걱정 마요. 잘해 줄게요.”

    헤슬루와 라라벨이 번갈아 가며 주인에게 드레스를 부탁했다.

    “그럼 전 이제 제 볼일을 볼까 하는데.”

    “그래요, 오늘 고마웠어요.”

    작별의 고하는 라라벨의 눈빛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나는 그 시선이 헤슬루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 아가씨, 남은 일정도 잘 부탁드려요.”

    “염려 마세요. 이야기 나눈 대로 기사님을 완벽하게 만들어 드릴 거랍니다.”

    갑자기 내 이름이 나와? 영문도 모른 채 서 있는 날 헤슬루가 이끌었다.

    “기사님, 빨리빨리 움직이셔야 해요. 아직 가야 할 곳이 많답니다.”

    “많다고요?”

    “액세서리, 구두, 화장품도 사야 한다는 걸 잊으신 건 아니겠죠?”

    “모, 모도루 영애. 미안하지만 난 수중에 돈이 많지 않아서….”

    앞서가던 헤슬루가 날 휙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설마 지금 기사님이 돈을 지불하실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건가요? 그건 모도루 백작가에 대한 결례랍니다.”

    “하지만….”

    “이건 제 목숨값이니 얼마가 돼도 부족하지요.”

    이래서야 헤슬루에게 너무나 큰 시세를 지는 셈이었다.

    ***

    나는 다시 한번 숨을 내쉬었다.

    꽉 조인 드레스 덕분에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건 불가능했으니 내쉬는 거라도 열심히 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긴장감을 떨치기 힘들 것 같았다.

    “기사님, 걱정 마세요. 헤슬루가 기사님을 도와드릴 거랍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한 올 한 올 억지로 끌어모아 틀어 올린 머리가 두피를 당기고 있었다. 그 위에 올라앉은 반짝거리는 머리 장식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전장에도 다녀온 몸인데 뭐 이런 거로 긴장을 하냐. 정신 차리자.’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은 또 왜 이리 불편한지 모를 일이었다. 발뒤꿈치를 콕콕 파고드는 것 같았다.

    절대로 카미앙을 만나는 게 긴장되는 건 아니었다. 카미앙이 무슨 음모를 꾸미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보다는 처음 맞닥뜨리는 이 상황이 어색했다.

    불편한 복장과 평소와는 다른 헤어, 답답한 메이크업,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연회장.

    가장 걱정되는 것은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에 너무나 익숙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러니 갑자기 또 진짜 녹시아로 돌아가 버린 것 같군. 아니 어쩌면 녹시아의 이벤트인 만큼 그 기분이 전달된 걸지도….’

    이때 녹시아가 얼마나 긴장하고 어설펐는지 게임에선 잘 나타났었다.

    귀족들의 대화엔 제대로 참여하지도 못했고 춤출 땐 카미앙의 발만 연신 밟아댔다.

    ‘그래도 게임에선 카미앙이 연회장 밖까지 마중을 나왔었지.’

    물론 지금 그럴 일은 없었다. 대신 난 카미앙보다 더 든든한 헤슬루가 곁에 있었다.

    “기사님, 저쪽이에요. 제 친구들요.”

    “모도루 영애, 오셨군요.”

    갈색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올 린 자그마한 소녀가 헤슬루에게 인사를 건넸다.

    “피리스 영애, 반가워요. 여러분, 이쪽이 말씀드린 파르미엔 백작가의 녹시아 기사님이시랍니다. 기사님이 제 목숨을 구해주신 일은 다들 알고 계시죠?”

    “그럼요. 정말 소설 같은 장면이었죠.”

    “기사 복장도 멋있으셨지만, 오늘 드레스도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나보다 두 뼘 이상은 작고 열 살쯤 어린 영애들 틈에서 이런 호평을 듣고 있자니 쑥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잠시였다.

    “안녕하십니까. 여기서 녹시아 님을 뵐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드디어 첫 번째 전투가 시작되었다.

    바르하르트 후작 가의 남매 중 베르만이 선공을 해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