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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시아를 꼬신 이유는 명확했는데 이렇게까지 싫은 이유는 명확지가 않았다.
가문 때문에? 그건 아니었다. 왕세자로서 카미앙의 위치는 약혼자 가문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공고했다.
‘그냥…. 그냥 싫었던 거지.’
언제나 자신에게 휘둘리는 게 싫었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것도 싫었고, 자신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싫었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모습이 되레 싫었다. 사람들은 그걸 사랑이라고 한다지만 카미앙에겐 그저 답답해 보일 뿐이었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맘이 바뀐 건가?’
바뀐 건 카미앙 자신이 아니라 녹시아였다. 예전과는 다르게 당당하게 본인의 의사를 표현했다.
늘 먼발치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대신 적극적으로 대시하고 자신을 쫓아다녔다.
‘심지어는 내 손목을 먼저 잡기까지 했지.’
그날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녹시아가 제 팔목을 휘어잡는 순간, 분명 건방진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 박력을 보일 줄이야.’
녹시아가 강한 기사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녹시아를 약혼녀로 인정하겠다거나 당장 혼인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귀찮은 사람에서 어디 한번 두고 볼까 싶은 정도로 변한 것뿐이지. 이제야 바르하르트 영애와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왔다고나 할까.”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사실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신관의 예언이었다.
중요한 인연을 만날 거란 예언을 들었던 날마다 카미앙의 앞에 나타난 건 녹시아였다.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위기의 순간마다 카미앙을 구해주기까지 했다.
성당에서는 떨어지는 성물을 피하게 해 주었고 극장에서는 괜한 시비에 휩쓸릴 것을 막아주었다.
‘아, 그때는 남장까지 했던가? 평소에 전혀 올 것 같지 않은 곳까지 따라오면서 말이지.’
사냥제에서의 일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괜히 시비를 건다 생각했는데 그건 순전히 녹시아의 부끄럼 많은 성격 때문이었다.
실은 자신을 지켜보며 위험한 순간에 나서려 그랬던 것이었다.
그런 일로 카미앙은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설마…. 예지의 신관이 말한 중요한 인연이 녹시아인가?’
***
“왕실에서 초대장이 왔다고요?”
“네, 얼마 안 남은 왕실 파티 초대장일 거로 생각한답니다.”
태연한 목소리와는 달리 헤슬루는 꼭 쥔 주먹을 흔들며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 왕실의 인장이 찍힌 봉투를 여니 헤슬루의 말대로 파티의 초대장이 있었다.
“녹시아 님과 함께 파티에 갈 수 있다니! 헤슬루는 너무나 기대된답니다.”
“이제 와서 파티에 오라니….”
늦어도 한참 늦은 초대장이었다. 대체 무슨 속셈으로 초대장을 보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상관없어요! 이 헤슬루가 일주일 동안 완벽하게 파티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드릴 수 있답니다. 드레스건 헤어건 다 저에게 맡기세요!”
깜박하고 있었다. 파티에는 나름 갖춰야 할 것이 있을 텐데 말이다.
녹시아가 아닌 다른 캐릭터로 빙의했다면 열 번도 더 경험했을 일이었다. 일 년이 지난 지금이라면 파티 경험치가 제법 쌓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녹시아인 내게 쌓인 건 무사로서의 경험밖엔 없군. 어쩌면….’
카미앙이 이런 걸 노리고 날 부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작가의 여식이라고 해도 변방에서 살았던 녹시아였다. 아무래도 다른 귀족들보다는 사교계의 화술이나 트렌드에 뒤처질 게 뻔했다.
‘모두의 앞에서 날 창피 주겠다는 속셈인 거야. 설마 녹시아 루트로 진입했을 리는 없잖아?’
녹시아가 왕실 파티에 초대되는 건 카미앙이 녹시아 공략 루트로 진행했을 때뿐이었다. 하지만 그 루트로 진입하기 전에 봐야 하는 이벤트들이 있었다.
시가지 데이트나 정원에서의 밀회 등. 물론 내가 녹시아인 지금, 단 한 개의 이벤트도 발생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헤슬루와 라라벨, 그리고 마룬시에와의 이벤트를 방해하긴 했는데….’
하긴 단순히 방해한 게 아니었다. 카미앙의 어장이 망가졌다는 시스템 메시지까지 떴으니 이 세계에서 카미앙이 하렘물의 주인공이 될 일은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가 내 루트로 이어지는 거라고?’
다른 세 명의 공략 캐릭터가 없다 해도 카미앙이 선택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루티시나였다. 그건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이었다.
아니지, 잘 생각해 보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카미앙을 녹시아 루트로 끌어들이는 게 맞았다.
‘난 게임 속의 녹시아가 아니잖아? 나와 카미앙의 엔딩이 게임에서처럼 사랑의 완성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카미앙이 내 루트를 탄다면 그 엔딩은 후회 남주가 되어 홀로 남는 것이 될 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카미앙을 밀어내기만 했던 지금과는 달리 적절히 당겨주기도 해야 할 것 같았다.
***
“파르미엔 기사님.”
평소에도 발랄한 헤슬루였지만 오늘은 콧노래마저 부르고 있었다.
“얼른요.”
게다가 먼저 가서 나를 기다릴 정도로 걸음이 빨랐다.
“네네, 갑니다.”
헤슬루가 먼저 문을 열고 기다리는 곳은 시가지에 있는 드레스샵이었다. 헤슬루의 설명에 의하면 가장 좋은 드레스샵은 아니지만, 일정을 맞춰줄 만한 곳이 여기밖에 없다고 했다.
“모도루 아가씨 아니신가요. 어서 오세요.”
샵 주인이 헤슬루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늘은 제가 아니고 여기 이분 옷을 맞추러 왔답니다.”
“어머나!”
주인의 호들갑스러운 감탄사에 난 뭐가 잘못되기라도 한 줄 알았다.
“이렇게 스타일이 좋은 아가씨는 정말이지 처음 뵙는 것 같아요. 자칫하다가는 드레스가 되려 아가씨 덕을 보겠는걸요?”
“그러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더더욱 멋진 옷을 만들어 주셔야 한답니다.”
이런 사탕발림이 익숙한 건지 헤슬루는 발걸음을 옮기며 태연히 응수했다. 마냥 어린애 같고 실제로도 한참 동생인 헤슬루가 지금 만큼은 든든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모도루 아가씨의 지인이신데 당연히 신경 써야죠.”
원이 마치 백과사전이라도 되는 듯한 두툼한 책을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곧 차와 다과를 내오겠습니다. 원하시는 디자인부터 살펴보세요.”
“아, 음. 저기 걸려있는 옷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게 아닌가요?”
나는 진열대에 걸려있는 드레스들을 가리키며 헤슬루에게 물었다.
“어머? 당연히 안되지요. 저건 이미 만들어 놓은 옷이잖아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사님께 가장 잘 어울릴 디자인을 골라야 한답니다. 물론 파티에서 가장 돋보이게 해줄 수도 있어야 하겠지요.”
헤슬루는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했다.
“가장 돋보일 필요까지는 없고 그냥 적당히….”
“적당이라뇨! 레이디가 파티에 참석하는데 적당히란 없답니다. 게다가 사교계가 지금 기사님을 주목하고 있으니 이때 멋지고 완벽한 모습으로 짠하고 나타나야 하지 않겠어요?”
또래 영애 모임에서 무슨 이야기라도 들은 건지 마지막엔 주먹까지 말아쥐며 단호히 말했다.
어린 영애들이라 해도 들은 이야기가 있을 터였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헤슬루도 나와 카미앙의 소문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귀족들 사이에서 이미 나에 관한 소문이 퍼졌으니.’
헤슬루의 말대로였다. 이전의 일들로 평판이 좀 좋아졌다고 해도 파티에 등장하면 모두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다가올 게 뻔했다.
“그래요. 이건 파티라기보단 전쟁이랍니다. 모두를 누르고 승자가 되셔야 해요!”
좀 과하다 싶긴 했지만, 전쟁터란 단어까지 등장한 마당에 내가 물러날 수는 없었다. 순순히 헤슬루가 넘기는 카탈로그에 집중했다.
“이쪽부터 보세요. 여기가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이랍니다.”
그러니까….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은 헤슬루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똑같았다. 살짝 파진 네크라인 주변엔 화려한 레이스를 달고, 몇 겹인지 모를 스커트는 방방하게 띄운 스타일. 그리고 리본이나 진주 등으로 화사하고 귀엽게 장식을 했다.
“기사님은 키가 크시니까 스커트를 좀 더 크게 부풀려도 좋을 것 같아요. 이렇게 말이죠.”
양손을 최대로 뻗어 큰 원을 그리는 헤슬루를 보며 내 나름대로 그림을 그려보았다.
‘꼭 커다란 종을 타고 걸어 다니는 것 같지 않을까.’
“그럼 레이스를 더 여러 겹으로 달 수도 있답니다. 아, 허리는 이런 리본으로 강조해도 좋겠어요. 그럼 스커트가 더더욱 풍성해 보일 거랍니다.”
음, 헤슬루가 말을 보탤수록 화려한 장식을 단 크리스마스 종이 완성되어갔다. 머릿속에선 징글벨 노래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창 징글벨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을 때 샵으로 들어오는 라라벨이 보였다. 라라벨이 말한 단골 샵이 여기인 모양이었다.
“요즘 자주 보는 걸?”
근래에 라라벨과는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다.
“그러게요. 이러다가 나 실업자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지난번 소동으로 바렌시드 극장은 한 달 동안 휴관을 한 채 시설을 정비하고 있었다.
“바렌시드 최고의 마돈나가 잘리면 누가 무대에 서겠어?”
라라벨과 나를 빤히 바라보는 헤슬루의 시선이 느껴졌기에 난 얼른 서로를 소개했다.
“아, 이쪽은 바렌시드 극장의 배우 라라벨이에요. 라라벨, 이쪽은 모도루 백작가의 헤슬루 영애셔.”
“안녕하세요 아가씨, 우리 녹시아가 신세를 지고 있네요.”
라라벨이 나와 헤슬루가 있는 소파에 걸터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우리…. 녹시아?”
헤슬루가 이상한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해명을 원하는 눈초리였다. 헤슬루는 귀족과 평민 사이의 예의를 따질지도 모르기에 얼른 설명했다.
“라라벨이 저와 나이가 비슷해서요. 서로 편하게 말하기로 했어요. 이런저런 인연도 있고요.”
“그래요. 제가 녹시아에게 큰 신세를 졌거든요.”
라라벨이 내게 팔짱을 끼며 막역한 사이라는 것을 어필했다. 하지만 헤슬루의 표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신세를 진 일이라면 이 헤슬루도 뒤지지 않는답니다. 우리 기사님께서 헤슬루의 목숨까지 구해주셨는걸요.”
발끈하는 반응이 귀엽다는 듯 라라벨이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을 지었다. 물론 헤슬루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전 신세만 진 게 아니라 녹시아를 도와주기도 했는데.”
“헤, 헤슬루도….”
“여기 모도루 영애께서는 제 의식주를 책임져 주고 계세요. 아주 크나큰 신세를 지고 있죠.”
“그래요! 오늘 기사님, 아니, 우리 기사님의 드레스도 헤슬루가 선물해드릴 거랍니다.”
“어머, 그러시구나. 그럼 어떤 옷을 고르고 있는지 봐도 될까요?”
라라벨은 한쪽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우리가 펼쳐놓은 카탈로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녹시아가 드레스 입은 건 한 번도 못 봤네. 이번에 무슨 파티라도 있어요?”
“왕실 파티가 있어서요.”
“왕실 파티?”
라라벨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왕실 파티면…. 당연히 왕세자님도 계시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