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내 건 없다 이건가. 하긴, 신전에서 가져온 물약이면 비싸겠지.’
난 크로버가 권하는 대로 담요에 앉았다.
“주세요.”
“자꾸 뭘 달라고 하시네.”
“아니, 그게 아니라 연고 말이에요. 저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그냥 계세요. 어차피 허리 같은데는 혼자 하실 수도 없습니다.”
“허리요?”
“모르셨죠? 여기 긁혀서 피가 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왼쪽 허리가 뜨끔뜨끔했다. 한번 다친 적이 있는 곳이라 더 조심해야 할 부위였다.
문제는 의사도 아닌 크로버에게 굳이 내 속살을 보여야 하는가였다.
‘녹시아 기준으로도 이시아 기준으로도 영 안내키는 일이란 말이지.’
“상처는 빨리 치료할수록 좋다는 건 녹시아 님도 잘 아는 사실 아닙니까?”
너무나도 태연한 크로버의 말에 난 생각을 고쳤다. 크로버는 지금 정말 환자로서 날 대할 뿐이었다.
괜히 나 혼자 민망해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죠…. 고맙게 받을게요.”
“믿고 맡겨주세요. 지금 만큼은 치유의 신관이라 생각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기껏 왕세자님을 재운 보람이 없지….”
크로버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마침 천둥이 치는 바람에 제대로 듣질 못했다.
“천둥소리 때문에…. 뭐라고요?”
“왕세자님은 재운….”
다시 한번 천둥이 동굴을 뒤흔들었다.
“비가 정말 제대로 내리네요. 내일 아침에는 멈춰야 할 텐데…. 근데 뭐라고 했죠?”
“아닙니다. 치료 잘해드리겠다고요.”
“잘 부탁해요.”
막상 치료가 시작되니 통증 때문에 부끄럽다는 감정을 느낄 새도 없었다.
“옆구리 쪽에 상처가 있으시네요?”
“아나드 토벌전 때 크게 베인 적이 있거든요.”
그때 일을 생각하니 벽에 붙어서 곤히 자는 카미앙을 발끝부터 머리까지 자근자근 밟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난 지금 카미앙의 충직한 조력자에게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지금은 저렇게 춥고 불편하게 자고 있는 거로 만족해야 할 때였다.
“저런…. 그때 일을 좀 들려주실 수 있으세요?”
“글쎄요. 험한 말들만 나올 것 같아서.”
카미앙이 날 얼마나 이용했는지, 내가 얼마나 호구 같았는지에 대한 고해성사가 될 게 뻔했다.
“그것보다 당신은 왜 직접 여기까지 온 거예요? 나한테 메시지까지 전해줬으면서.”
“아무래도 안심이 안 돼서 말이죠. 괜찮아요? 지금 좀 시리실 것 같은데.”
“이 정도는 문제없어요.”
내게 카미앙을 부탁한 것만으로는 걱정이 돼서 직접 쫓아오셨단 소리였다. 본인의 부상도 아직 다 낫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정말 눈물겨운 충심이구만.’
게임을 할 땐 카미앙의 최측근은 베르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예지의 신관이었다. 이러다 카미앙이 왕위에 오르면 대 신관이라도 되는 게 아닐까.
“신관 복을 입고 오지 뭐하러 변장을 했어요?”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누군지를 밝혀야 카미앙이 공치사를 해 줄 게 아닌가.
“신관에게는 이런저런 제약이 있어서 말이죠.”
“이렇게 변장하고 왕세자를 도운 일은 보고서라도 올려 한 번에 포상을 받을 셈인가요?”
“오호, 그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나쁘지 않은 의견이군요. 어쨌거나 보십시오. 제가 오길 잘했잖습니까?”
크로버가 허리에 감은 붕대를 고정하며 말했다. 이런 일을 자주 해본 건가 싶을 정도로 크로버의 솜씨는 깔끔했다.
카미앙에 대한 넘치는 충심이 고깝긴 했지만, 그것과 치료는 별개였기에 감사를 전했다.
“맞아요, 이렇게 상처도 치료받고.”
“그것보다 제가 안 왔으면 두 분이 밤을 지새울 뻔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고립된 동굴 안에서.”
내가 귀하신 왕세자님 잠자리를 제대로 봐 드리지 못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었나 보다.
기껏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는데 이런 말까지 들으니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처음부터 저한테 부탁하시고선 뭘 또 그런 걱정을 하셨을까요.”
“네? 당연히 걱정되지요. 남녀가….”
카미앙에 대한 갸륵한 마음씨를 다시 한번 느끼기 전에 내가 먼저 일어나서 담요를 집어 들었다.
“그럼 이 담요도 왕세자님께 드리지 그래요? 지금 그 귀한 왕세자님이 찬 바닥에서 떨고 있는 거 안보이나요?”
“… 진심입니까?”
“그럼요. 당신이 준비해 온 거잖아요?”
카미앙을 위해서 말이다.
“녹시아 님의 마음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진작 그러고 싶었지만, 이쪽도 환자인지라 뺏어가기 곤란했었나 보다.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크로버는 카미앙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래, 주인공이라 이거지. 담요마저 카미앙을 위해 존재하는구나. 서럽고 치사해서 원.’
무릎이며 다리가 괜히 더 아픈 것 같았다. 크로버의 응급 상자를 뒤적거릴 때였다. 갑자기 주위가 따듯해졌다. 어깨를 감싼 모포 덕분이었다.
“설마 조난한 사람이 둘인 걸 뻔히 아는데 제가 하나만 준비했겠습니까.”
털이 보송보송한 게 좀 전의 담요보다 더 따듯했다. 크로버가 내 옆에 바싹 붙어 앉더니 모포를 같이 둘렀다.
“이거 두 개뿐인가요?”
“그렇습니다.”
“두 명이 있을 걸 알았다면서요?”
“그러니까 두 개를 가져왔지요.”
크로버가 눈을 접으며 미소지었다. 이 단단하고 차가운 동굴마저도 녹일 수 있을 것 같은 달콤한 미소였다.
‘독이 든 성배.’
순간 향료 길드의 직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야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웃지 말지.’
하필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는 상황에서 그를 지나치게 의식하게 돼버렸다. 숨을 쉬는 게 어색할 정도로 불편했다. 그렇다고 모포를 포기하기엔 비 오는 밤, 동굴 속은 너무 추웠다.
‘진정하자. 이미 상의를 걷어 올리고 치료까지 받았잖아.’
크로버의 어깨가 내게 닿았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추우십니까?”
“조금.”
크로버가 내 어깨 뒤로 손을 넘겨 모포 끝을 잡았다. 난 크로버의 품에 안긴 것처럼 모포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 훨씬 따듯하죠. 그러고 보니 신성력도 바닥나셨네요.”
크로버가 남은 한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손까지 잡으라고?’
하지만 딱히 신성력 충전을 거부할 구실이 없었다. 괜히 나 혼자 그를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긴 싫었다.
덥석 잡은 크로버의 손은 크고 보드랍고 따듯했다. 크로버의 말대로 바짝 붙은 채로 모포를 뒤집어쓴 덕분인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 덕분인지. 추위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뭐지? 나 잠들었던 건가!’
“잘 잤어요?”
크로버의 인사가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 해주었다. 대체 어느 틈에 잠이 들었던 건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가까이에서 들리는걸?’
불안했다. 그러고 보니 등 뒤에서 느껴지는 촉감도 동굴 벽이라기엔 너무 따듯했다. 나는 살짝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크로버가 입고 있던 옷과 같은 색의 천이였다.
‘…가슴팍이다.’
다시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나란히 뻗은 나와 크로버의 다리가 보였다.
간밤에 어깨가 살짝 닿은 것으로 떨었던 게 무색할 만큼 자연스럽게 붙어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친 허리를 살짝 받치고 있는 크로버의 팔….’
달리 내릴 수 있는 결론이 없었다. 그렇다. 난 밤새 크로버에 안겨 잠을 잔 것이다.
‘여기서 고개를 잘 못 움직여 크로버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크로버가 고개를 숙여 내게 눈을 맞췄다.
“어디 안 좋은 건 아니죠?”
이마 근처가 간질간질했다. 이건 부끄럽다거나 마음이 동할 때의 그 간질거림과는 달랐다. 좀 더 확실한 간질거림이었다.
“뭐, 뭐야? 이 털들은.”
신이 정성스레 깎아내고 빚어낸 크로버의 턱 주변을 털이 뒤덮고 있었다.
“어제 보시고선 뭘 그리 놀라십니까?”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로버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 두건을 뒤집어쓰고 수염을 붙여 약초꾼 크로버로 변신이 끝난 상태였다.
“어느 틈에….”
“녹시아 님이 깨실까 봐 얼마나 조심스럽게 작업을 했는지 아십니까.”
“대체 이렇게까지 정체를 숨기는 이유가….”
대답을 듣기는커녕 질문을 끝내지도 못했다. 카미앙이 깨어난 것이다.
“그만 잠이 들고 말았군. 아, 비가 그친 것이냐?”
“벌써 아침이랍니다.”
카미앙은 나와 약초꾼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녹시아, 그대도 자고 일어난 거요?”
“네, 저도 이분이 담요를 주셨어요.”
난 카미앙 아래 있는 담요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너무 갑자기 잠드는 바람에….”
카미앙이 다시 크로버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 어서 나를 부축하시오. 빨리 왕궁으로 돌아가야 할 게 아니오.”
“그보다는 제가 사람을 불러오는 게.”
“아니, 난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소. 동굴은 사람이 있을 곳이 못 되는군.”
크로버와 난 카미앙의 어깨를 한 쪽씩 받친 채 길을 나섰다. 크로버가 길을 알고 있었기에 돌아가는 길은 비교적 수월했다.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싶었는데 말을 탄 무리가 우리에게 달려왔다. 다리스와 근위대원들이었다.
“왕세자님! 무사하셨군요! 다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게 다 저의 불찰입니다.”
다리스의 사죄를 보는 것도 벌써 세 번째였다. 이러다가 내가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군복을 벗게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대장님, 대장님께서 주신 손수건 덕분에 제가 왕세자님의 곁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아, 뭐. 녹시아 덕분에 크게 다치진 않았소.”
다행히 카미앙은 나 때문에 발을 헛디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평소 성품대로였다면 분명 날 원망하고 있을 텐데.’
비탈길에서 구른 덕에 그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번에도 파르미엔 기사님께서 왕세자님을 구하신 게 아닌가.”
사람들의 감탄에 혹시 다시 한번 명성이 오르는 것은 아닐까 살짝 기대했다.
그런 보너스는 없었지만 어제 카미앙을 구하며 명성이 올라간 덕분인지, 날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 게 느껴졌다.
크로버의 활약도 컸지만,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약초꾼으로만 알 뿐이었기에 그에겐 금화를 내리는 것으로 보상을 했다.
카미앙을 구한 것으로 이름이 높아진 건 오직 나, 녹시아뿐이었다.
***
카미앙은 침대에 누운 채로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온몸 여기저기엔 아직 멍 자국이 있었지만 이젠 몸이 쑤시거나 열이 나진 않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왕실 무도회가…. 열흘 후로군.’
왕실 파티의 초대장은 이미 한 달 전에 전달했다. 카미앙이 전쟁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녹시아에겐 초대장을 주지 않았지.’
그랬다. 그때의 카미앙은 녹시아를 왕실 파티의 초대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왕실 파티에 초대받는다는 걸 녹시아가 어떤 의미로 여길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약혼녀로 인정받았다고 좋아했겠지.’
물론 카미앙에게 초대장을 받는다고 약혼녀가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교계와는 거리가 먼 녹시아가 파티에 등장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궁금해할 터였다. 녹시아와 카미앙의 어떤 관계인지 말이다.
가뜩이나 말 많고 소문 많은 사교계였다. 카미앙이 파르미엔에서 약혼녀를 데려왔다는 소문은 바렌시드 전체에 삽시간에 퍼질 게 뻔했다.
‘그러니까…. 그땐 그게 왜 그렇게 싫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