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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귀여운 행동은 오해구요. 아무튼, 바렌시드에 왔다고 왕세자님의 마음이 이렇게 변하실 줄 몰랐어요.”
“잠깐,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갑자기 왜 날 왕세자라고 부르는 거지?”
「내가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한 후부터는 계속 카미앙이라 불렀던 것 같은데.」
내 마음대로 카미앙을 부를 수 있게 된 후부터는 굳이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의 거리만큼 만큼 호칭도 거리를 두고 싶었다.
“저보고 약혼녀가 아니라 하시니 저도 그냥 왕세자님으로 대하는 수밖에 없죠.”
“설마…. 녹시아, 이제 내게서 완전히 마음을 접은 거요?”
「그럴 리가 없지. 지금 나와 밀당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좋으신가요? 원하는 대로 돼서?”
“아니, 내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고…. 잠시 시간이 필요했던 거요.”
「오늘따라 앙칼지군. 처음 보는 모습이야.」
“그 시간이 절 얼마나 비참하고 힘들게 만들었는지 알고 계시나요?”
비는 오는데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여기서 카미앙이 후회를 한다면 게임 끝이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목표를 달성하고 편안히 백작 영애 라이프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녹시아가 저렇게까지 말 한 적은 없는데. 설마 정말 날 포기하려고 하는 건가? 요즘 좀 변한 것 같기도 했고…. 안되지. 얼마나 쓸모있는 여자인데.」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 편했지만 카미앙의 생각이 저따위니 혈압에는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화를 억누르며 대답을 종용했다.
“그럼 여기서 무사히 왕궁으로 돌아가면 절 약혼녀로 공포하실 건가요?”
“그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오. 왕세자의 약혼은 곧 국혼. 그대의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란 말이오.”
「그래, 일단 이렇게 둘러대자. 내가 아니라 내 자리가 약혼을 못 하게 하는 거라고 말이야.」
“그럼 파르미엔 백작저에서는 왜 제게 청혼을 하셨죠? 그 일을 후회하시나요? 아니, 제게 한 모든 행동을 후회하시나요?”
난 일부러 후회라는 단어까지 꺼내 들었다.
‘답은 여기 있어. 카미앙, 넌 대답만 하면 돼.’
“아니, 절대 그렇지 않소.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
「덕분에 아나드를 토벌하고 왕세자의 자리가 굳건해졌는데 후회는 무슨.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녹시아를 잡아야지.」
…그럼 그렇지.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카미앙이 이렇게 쉽게 후회할 리가 없지. 괜히 떠들어 댔네.’
나는 다시금 카미앙에게서 등을 돌렸다. 마침 스킬 유지 시간도 종료되었다.
”그때는…. 내 감정만을 생각했던 거지…. 하지만 녹시아, 왕세자의 곁에는 꼭 왕비만이 여자로 있을 수 있는 건 아니오. 알고 있소?”
그때 카미앙이 새로운 멍멍이 소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대대로 왕께 진정한 사랑을 받은 여인은 사실 왕비가 아니라 귀비였지.”
‘그러니까 지금 나를 자기 귀비로 삼겠다는 거야?’
내가 가만히 있자 자신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건 줄 알았는지 카미앙은 내 등에 가만히 이마를 기대기까지 했다.
‘카미앙, 네가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자유인이 된 나는 지금 네 목을 비틀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물론 나는 착하고 심약한 사람이니 진짜로 비틀진 못해도 그 잘난 얼굴에 주먹을 날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녹시아.”
얼씨구? 카미앙이 마치 나를 안기라도 하겠다는 듯 내 앞으로 둘렸다.
‘내가 바렌시드에서 편안하게 살아갈 미래를 위해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안 되겠다. 넌 오늘 나한테….’
내가 주먹을 날리기 위해 허리를 비트는 순간이었다.
“누구십니까?”
동굴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내 주먹이 카미앙을 향해 날아갔지만 불발이었다. 마침 카미앙이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헛스윙하고 기우뚱한 몸을 바로잡는데 다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약초꾼입니다. 근데 댁들은 누구십니까?”
약초꾼? 때마침 여기 약초꾼이 나타났다는 게 꼭 짜인 대본처럼 의심스러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숲속에 약초꾼이 있는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오, 약초꾼. 마침 잘 만났소. 어서 이쪽으로 와 불을 밝히시오. 우리는 지금 몹시 추운 상태요.”
적이 아닌 그저 약초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심한 카미앙은 상대를 바로 신하 취급했다.
“예 예, 그래 보이십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비가 와서 불을 지피기가 쉽지 않습니다.”
약초꾼은 공손히 카미앙의 말을 따랐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 우리에게 마른 천 조각을 내주었다. 카미앙과 내가 젖은 몸을 닦아내는 동안 그는 램프에서 불씨를 옮겨 불을 피웠다.
“고맙소. 내 그대에게 큰 상을 내리겠소.”
“말씀하시는 것 보니 엄청 높으신 분인 것 같습니다.”
카미앙이 나더러 대답하라는 듯 헛기침을 했다. 대체 왜 자기 신분을 직접 밝히지 않고 꼭 옆 사람을 시키는지 모를 일이었다.
“꽤 높은 분이시죠. 신분을 함부로 밝힐 수 없는 걸 이해 해주세요.”
약초꾼도 적당히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모닥불이 제법 커지자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불빛이 환해졌다. 약초꾼은 산속에 사는 사람인지 얼굴이 온통 수염투성이였다.
‘동굴에서 뭘 하다 나온 것인지 여기저기 검댕이 묻어있고.’
상대 역시 우리의 모습을 확인한 것인지 크게 놀랐다.
“대체 어쩌다 그 꼴…. 아니, 그렇게 다치신 겁니까?”
“오늘이 사냥제라는 건 알고 계시나요?”
그는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붕붕 저었다. 진짜 산사람이 여기 있었구나 싶었다.
“아무튼, 사냥하다 산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저런 저런.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약초꾼을 혀를 끌끌 차며 자신의 망태기를 뒤적거렸다.
“제게 마침 좋은 약초가 있습니다.”
“그렇지, 그대는 약초꾼이라 했으니 이런 상처나 통증에 좋은 약초를 가지고 있겠군.”
이 생각을 왜 더 일찍 하지 못했나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맞습니다. 이건 제가 비상시에 쓰는 물약인데 통증을 줄이고 열을 내려 줍니다.”
“물약? 그럼 먹어야 한다는 말 아닌가.”
몸에 정체 모를 액체를 집어넣기는 싫은 모양인지 카미앙이 얼굴을 찡그렸다.
약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약초꾼이 병을 카미앙의 코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그가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여기 병에 있는 이 표식을 보십시오. 신전에서 인증해준 치료제입니다. 내용물을 바꾸거나 하면 이 인증이 사라진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나는 처음 듣는 소리였지만 그런 게 진짜로 있긴 했는지 카미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고약하긴 합니다만 효과는 좋습니다.”
“그래, 이리 줘 보게.”
카미앙이 약 한 병을 몽땅 들이켰다.
“어떠십니까?”
“어째 익숙한 맛인데?”
“신전에서 인증한 약이 다 그런 모양입니다.”
“어디 효과를 한번 보지.”
머리가 더 뜨거워진 것 같다는 둥 배 속이 부글거리는 것 같다는 둥 떠들어 대던 카미앙이 말소리가 점점 느려지더니만 곧 조용해졌다.
“뭐야, 잠든 거야? 그새?”
“원래 먹으면 바로 잠드는 약입니다. 한 열 시간 정도는 푹 주무실걸요?”
그렇게 자는 약인 걸 알면서 카미앙을 먹인 건가. 게다가 카미앙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기라도 하는 듯한 저 반응은 뭐지.
어쩐지 수상했다. 스킬을 쓰면 녀석의 속셈을 알아차리기 수월하겠지만 신성력은 바닥이 난 상태였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바렌시드의 왕세자님이시지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냥제가 열린 것조차 모른다고 했던 사내였다.
“일부러 접근한 거군. 내가 누군지도 당연히 알겠군그래.”
“파르미엔가의 녹시아 기사님이시죠.”
속았다. 평범한 약초꾼이 아니었다.
‘날 방심시키려고 너스레를 떨었구나.’
손이 자연스럽게 칼집으로 향했다. 제 실력을 발휘하기엔 너무 지쳐버렸지만 웬만한 실력이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설마 절 공격하시려고요?”
“정체를 밝혀라. 목적이 뭐지?”
“아직도 눈치를 못 채셨습니까?”
약간 쉰 듯했던 좀 전과는 다른 목소리가 내게 물었다.
‘이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렇게까지 몰라주시면 서운합니다.”
“설마…. 크로버?”
“너무 늦게 알아채신 거 아닙니까?”
“아니, 진짜 크로버에요?”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로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머리에 두르고 있는 두건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밤하늘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아야, 그렇게 잡아당기시면 꽤 아프다고요.”
제 것인 양 턱에 붙어있던 덥수룩한 수염이 내 손이 가는 데로 쭈욱 뜯어졌다. 정말이지 크로버는 작정하고 변장을 한 것이었다.
“이렇게 수염을 덕지덕지 붙이고! 얼굴엔 뭘 묻히고! 게다가 두건까지 뒤집어썼으니 몰라보는 게 당연하죠!”
“그래도 제 빛나는 미모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쓸데없는 소리 말구요. 대체 왜 여기 이러고 있는지 설명해 봐요.”
크로버는 벌게진 턱을 손으로 비비며 웅얼거렸다.
“여기까지 오신 거 보니 제가 드린 쪽지는 잘 보신 것 같고. 뭐 그 정도면 설명 끝난 거 아닌가요?”
일찌감치 알아채지 못한 날 원망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애써 한 분장을 다 떼어내 버려서 일지도 몰랐다.
“그럼, 저와 카미앙이 여기로 올 줄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가요? 다칠 것도 미리 알아서 약을 준비하고?”
크로버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전 예지의 신관이니까요.”
지금까지 이렇게 완벽히 예지한 적은 없었다. 헤슬루와 라라벨 때는 내가 개입할 거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크로버는 그저 정해진 게임 공략 루트를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내 행동 때문에 카미앙이 떨어졌고 내가 그를 구했고 이곳으로 왔다. 즉 내가 개입되어 바뀔 미래를 예언한 것이었다.
‘예지 능력이 좋아진 건가, 아님 우연?’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얼른 여기 누워보세요.”
“네? 갑자기 눕긴 왜 누워요. 저마저 재우려는 거예요?”
“제가 녹시아 님을 왜 재우겠습니까? 기껏 왕세자님을 재웠는데…. 주무시라는 게 아니고.”
크로버가 다시 한번 담요를 팡팡 두드렸다.
“치료를 해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회복의 성소에서 연고도 가져왔습니다.”
“그럼 아까 물약도.”
“그렇죠. 신전에서 가져온 겁니다. 바렌시드에서 가장 믿을 만하고 효력이 좋은 물약이지요.”
약초꾼이라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약 만큼은 진짜였다.
“여기저기 상처가 많이 나셨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인대나 근육이 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냥 마셔서 치료할 수는 없나요?”
“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간결한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