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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송하다는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사냥제에서는 화살 깃이나 화살대에 색을 칠해 누구의 화살인지 구분하고 있었다.
“그것이, 금색이 아닌 녹색과 보라색을 칠한 화살입니다.”
“녹색과 보라색?”
나는 웅성거리는 귀족들 틈으로 말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건 파르미엔 백작가의 표식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물론 날 선 카미앙의 시선도 있었다. 꽤 부담스러운 상황이었기에 난 카미앙만을 의식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토끼가 도망쳐 버릴 것 같기에 제가 잡았습니다. 왜들 그렇게 보시죠? 점박이 토끼는 번식을 너무 많이 해 사냥제에서 개체를 조절해 주는 동물 아니었습니까?”
“녹시아 님, 지금 본인의 상식이라도 뽐내겠다는 겁니까?”
역시 베르만,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날 타박했다. 나라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물론 아직은 어장을 벗어난 물고기인지라 카미앙과 주변 인사들에겐 심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 사용하라고 있는 게 스킬이지.’
<1. 베르만 님께는 그렇게 들렸나 보네요. 유감이에요.>
<2. 다들 사냥하실 생각이 없던 건 아니고요?>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베르만 님께는 그렇게 들렸나 보네요. 유감이에요.”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뽐내고 싶으셨던 건가요? 저 토끼는 분명 왕세자님께서 먼저 잡으시겠다 의사를 내비치시지 않았습니까.”
<1. 바렌시드에는 왕세자 사냥감 따로 있고 백작 사냥감 따로 있나 보네요.>
<2. 전 분명히 제 순서를 기다렸는데요?>
이번에도 귀족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진 않았기에 차마 첫 번째는 선택하지 못했다. 난 저쪽 나무 아래 박혀있는 화살을 가리며 두 번째를 선택했다.
“전 분명히 제 순서를 기다렸는데요? 화살을 보시면 알 수 있어요.”
빠르게 뛰어가던 점박이 토끼였다. 대부분 점박이 토끼를 놓치는 이유는 그 빠른 속도 때문이었다. 빗나간 화살은 토끼보다 한발 늦었기에 사냥감이 뛰어오던 방향의 뒤쪽에 떨어지곤 했다.
“당연히 왕세자님께서 먼저 활을 쏘신 후에 제가 쏜 거랍니다. 겨냥한 방향을 보아하니 놓치실 것 같아서요. ”
실제로 카미앙의 화살은 토끼가 쓰러진 곳 보다 몇 발 뒤쪽에 있었다.
“그만하시오. 널린 게 사냥감인데 저 토끼 한 마리 가지고 대체 뭣들 하는 거요.”
카미앙이 점잖은 왕세자의 가면을 쓰고 나섰다. 마치 베르만과 내가 괜한 걸 가지고 싸운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난 카미앙의 살짝 달아오른 얼굴과 착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고 알 수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냥감을 뺏긴 게 창피해 죽겠지?’
나름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눈치 없는 행동이긴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사냥을 하는 것뿐이니 법에 어긋난다던가 대놓고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기, 파란눈 수리가 날아갑니다!”
파란눈 수리라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국경지대에서는 좀 더 자주 볼 수 있는 저 수리는 그 높낮이를 예측하기 어렵게 활공했다.
당연히 카미앙의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사냥감이었다.
카미앙이 연달아 활시위를 당겼지만 두 발 모두 수리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라 이거지.’
나는 하늘을 헤엄치기라도 하듯 유유히 날고 있는 수리를 겨냥해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수리에게 날아갔다.
“설마 이번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내게 쏠렸다. 그 사이 베르만이 쏜살같이 달려가 떨어진 수리를 확인했다.
함성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정확히 수리를 맞혔다는 것을. 일단 베르만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 자체가 그 증거였다.
“허, 거참. 실력 하나는 대단하군.”
그중 아직 순수함을 간직한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카미앙이 입술을 살짝 깨무는 것이 보였다.
나보다 못한 꼴을 보여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괜히 자존심 상할 필요 없이 그냥 인정하면 될 것을.’
검술이나 궁술은 녹시아가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데 왜 저리 분해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애당초 아나드 정벌에서도 카미앙의 활약은 세 치 혀를 놀린 것뿐이었다. 검으로 적을 벤 것도, 활로 적장을 꿰뚫은 것도 모두 녹시아였다.
날 의식한 탓인지 카미앙의 활 솜씨가 점점 형편없어졌다.
“이번엔 붉은 까마귀입니다!”
“큰 어금니 오소리가 나타났습니다”
“저건 흰 꼬리 독사가 아닙니까!”
이 세상이 주인공에게 대령이라도 하듯 다양한 동물들이 카미앙의 앞에 나타났다.
“왕세자님, 성공입니다!”
“아닙니다. 이건 파르미엔 백작가의 화살입니다.”
“이번에도 파르미엔 백작가입니다.”
하지만 카미앙은 번번이 사냥에 실패했고 그때마다 난 떨어지는 감 받아먹듯 카미앙이 놓친 짐승들을 맞췄다.
‘깨소금 맛이라는 게 이런 걸 말하는 거구나.’
활시위를 당기면 당길수록 혀끝에서 고소한 맛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내 살다 살다 활 쏘면서 입맛을 다시게 될 줄이야.’
당연히도 카미앙은 몹시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멧돼지를 놓치고 나서 마침내 폭발했다.
“다들 대체 왜 내 주위에서 맴도는 것이오. 어서 각자 흩어져 사냥하도록 하시오!”
애꿎은 사람들을 꾸짖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왕세자님. 망신스럽고 창피한 기분을 저런 식으로 표현했다.
귀족들도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카미앙의 실수를 곁에서 지켜보기 민망했던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나보다.
“큼, 우리는 저쪽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나. 산기슭에서 멧돼지가 자주 출몰한다는 소식이 있었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군. 어서 그리로 가보세.”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카미앙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내게로 향했다.
“녹시아 경. 설마 나 대신 사냥까지 해줄 생각은 아니겠지?”
카미앙의 인내심이 끊어질 듯 말 듯 한 것이 느껴졌다. 서슬 퍼런 눈빛 때문에 스킬을 사용해야 했다.
“전 그냥 카미앙 님을 도와드리고 싶었을 뿐인데요.”
카미앙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녹시아와는 말이 통하질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딜 봐서 이게 날 도와주는 거요.”
“사냥제에서는 농사에 방해가 되는 동물을 많이 잡아야 한다고 들었어요.”
나는 눈치 없고 순진한 녹시아를 계속 연기했다. 교과서와 세상사가 다른 것만큼의 차이가 있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알았소. 그럼 더는 날 도와줄 필요가 없으니 녹시아 경은 더는 날 따라오지 마시오.”
여기는 바렌시드 궁전이 아니었다. 따라가려고 마음먹으면 눈에 띄지 않는 수풀에 몸을 감추면서 따라갈 수 있었다.
‘일단은 후퇴해주지.’
난 말 머리를 돌려 카미앙과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물론 곁눈질로 카미앙의 동선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랴.”
날 따돌릴 속셈인지 카미앙이 갑자기 말을 몰아 달렸다.
‘좋아, 십오도 정도 떨어진 방향에서 나도 따라간다.’
그렇게 마음먹고 채찍을 휘두르려 했는데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손뿐만이 아니라 어깨나 팔도 마찬가지였다.
채찍을 휘두르는데 필요한 신체 부위가 움직이지 않았다.
‘갑자기 마비라도 온 것처럼 몸이 왜 이러지?’
말 고삐를 잡아당겨 방향이라도 틀어보려 했으나 이 역시 불가능했다.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확실했다.
‘이건 마치 그때….’
장미 정원에서 루티시나와 있는 카미앙과 만났을 때. 정원이나 손질하라고 했던 카미앙의 말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장미 가지를 다듬었었다.
‘설마, 방금 카미앙이 한 말 때문에?’
카미앙의 말을 곱씹어봤다.
‘녹시아 경은 더는 날 따라오지 마시오.’
누가 봐도 완벽한 명령어였다. 이번에는 시스템 창을 열어 내 상태를 확인했다.
「녹시아 폰 페르미안
당신의 칭호 : 어장에서 탈출한 물고기
칭호에 따라 다음과 같은 효과가 발동됩니다.
1 분하거나 서운한 일이 있어도 어장 주인에게 말할 수 없습니다.
2 어장 주인의 말은 다 들어주고 싶습니다.」
설마 아직 저 첫 번째 제약이 남아있어서 그런 건가? 이 감각은 딱 장미 가지를 자를 때의 그 느낌이었다.
‘이럼 안된다고! 이 중요한 순간에!’
이러는 동안에도 나는 카미앙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아니, 벌써 멀어졌다. 이미 카미앙은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일단 침착하자. 침착해. 난 이성적인 사람이잖아? 지난번에는 이 명령에서 어떻게 벗어났지?’
그때는 장미 가지를 자르는 도구인 검을 버렸었다. 그럼 이번에는 일단 이 말에서 내려야 하는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에서 내리자, 아니나 다를까 드디어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카미앙을 걸어서 무슨 수로 따라잡느냔 말이지.’
이렇게 하면 어떨까. 생각을 전환하는 것이다. 난 카미앙을 따라가려는 게 아니라 흑마 ‘바달’을 따라가는 거라고 말이다.
그러면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고 했던 카미앙을 말 자체를 어기지는 않는 셈 아닐까? 하지만 코앞에 닥친 문제는 그보다는 카미앙이 어디로 갔는지였다. 카미앙은 벌서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카미앙의 흔적을 찾아 주변을 뱅뱅 돌고 있는데 저쪽에서 열심히 사냥하는 다리스가 보였다. 상으로 받은 배지가 멀리서도 반짝이고 있었다.
‘잠깐, 다리스가 저 배지랑 같이 받은 건 카미앙이 준 손수건이었지.’
다른 누구도 아닌 카미앙이 준 손수건이었다. 난 말을 몰아 다리스에게 달려갔다.
“그렇게 불쑥 들이닥치면 사냥감이 도망을…. 아, 파르미엔 기사님이셨군요. 사냥감은 많이 잡으셨나요?”
다리스의 사냥을 방해해 버린 듯했지만 미안해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제가 중요한 걸 놓쳤어요.”
“무얼 놓치셨길래….”
“대장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다시 잡을 수 있어요. 정말 염치없지만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난 양손을 꼭 모으며 다리스를 바라봤다. 내게도 카미앙 같은 눈빛으로 사람 꼬시는 스킬이 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난 말을 덧붙였다.
“그럼 제가 반드시 다음에 대장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비장하십니까. 일단 어떤 일인지 말씀부터 해보십시오.”
“아까 카미앙 님께 받은 손수건. 오늘 하루 동안만 제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건 부상으로 받은….”
“압니다. 올해의 기사로 임명되면서 받으신 손수건이지요.”
다리스는 자꾸만 내 눈을 피하며 매우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사람 좋은 다리스라 해도 어지간한 변명으로 손수건을 빌리기는 힘들 듯했다.
“제발요. 그 손수건이 있으면 카미앙 님을 찾아갈 수 있거든요.”
“왕세자님을 찾으신다는 겁니까? 손수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