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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카카론드 새였다.
카카론드 새는 깊은 숲속에 숨어 사는 새로 어지간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냥제와 같이 큰 소동 정도가 있어야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혹 카카론드 새를 잡게 되면 모도루 영애께 드리죠.”
그 깃털이 매우 아름답기에 귀족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사냥제 우승의 증표로 여겨지기도 했고 말이다.
“어머나, 정말요? 그렇다면 헤슬루 인생에서 가장 멋진 사냥제가 될 거예요!”
헤슬루에게 카카론드 새를 선물 해 주고 싶은 마음도 당연히 있었지만, 헤슬루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손에 넣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사냥제는 마룬시에와의 이벤트가 있었다. 다른 캐릭터의 이벤트와는 달리 마룬시에를 사냥제에서 직접 만나는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바로 저 카카론드 새의 깃털이었다. 이후에 왕실 무도회에서 만난 마룬시에에게 저 깃털을 선물로 주면 몹시 기뻐하며 호감도가 올라간다.
어지간한 선물로는 호감을 얻기 힘들고 호감도가 일정 이상이 아니면 만나기 어려운 마룬시에였기에 카카론드를 손에 넣는 것이 중요했다.
‘과연 내가 카카론드 새를 제일 먼저 발견할 수 있을까?’
카미앙이 주인공인 세계였다. 내가 가장 먼저 손에 넣지 못한다면 당연하게 카미앙에게 돌아갈 터였다.
이번에는 이벤트의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질 않았다. 내가 가진 스킬들로는 사냥을 유리하게 만들기 어려웠다.
게임에서 사냥제 부분을 플레이했다 해도 불쑥 나타난 카카론드 새를 잡기만 했을 뿐이었다. 어떻게 유인했는지, 어디서 나타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결국, 열쇠는 카미앙인가.’
아무래도 이번 이벤트는 카미앙을 바싹 쫓아다니는 수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
푸른 하늘 아래 각양각색의 깃발이 휘날렸다.
구경 온 사람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테이블과 벤치 중앙에는 작은 단이 세워졌다. 국왕의 기조연설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올해도 바렌시드의 오래된 전통인 사냥제에 참석하신….”
만국기 대신 깃발, 교장 선생님 대신 국왕.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을 운동회가 생각났다.
상상했던 분위기와 매우 달랐다. 사냥이라면 의례 함께 하기 마련인 사냥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게임에서야 그러려니 했지만, 실제로도 없네.’
사냥 그 자체가 목표였던 몇십 년 전까지만 개를 데려왔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저 각 가문을 대표해서 나온 인사들은 말을 타고 참가 선수처럼 일렬로 서 있을 뿐이었다.
아침 햇살에 아래서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카미앙의 흑마는 단연 돋보였다. 아나드 토벌전에도 함께했던 녀석으로 바람과 같이 달린다는 의미에서 ‘바달’이라고 불렸다.
그 옆에 있는 베르만도 뒤지지 않는 녀석을 몰고 나왔다. 잘 다듬어진 갈색 갈기에 눈이 영리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겉보기엔 좀 뒤질지 모르겠지만 우리 볼리는 남다른 특기가 있다고.’
난 다른 때보다 깔끔하게 손질한 볼리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파르미엔 영지의 품종인 이 흰색 말은 다른 말들에 비해 후각이 매우 뛰어났다. 종종 수렵견을 대신해 사용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크로버가 없나?’
여기서 찾아봤자 보이지 않을 게 뻔하지만 그래도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왕과 왕비 곁에 신관 몇몇이 있는 게 보였지만 크로버 같지는 않았다.
‘하긴 오늘 같은 날 굳이 예지의 신관이 필요하진 않겠지.’
게다가 엊그제 상처를 입은 몸으로 사냥제 행사에 참여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기사님. 기사님.”
“제델?”
뜻밖의 인물이었다. 말 위에서 본 제델은 유난히 작아 보였기에 난 고삐를 당기며 말이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아니 그보다 여긴 위험해.”
제델은 볼리를 쳐다보며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팔을 내 쪽으로 뻗어 올렸다.
“예지의 신관님께서 이걸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이걸? 왕세자님이 아니라 내게?”
고개를 끄덕이는 제델의 손안에는 곱게 접힌 쪽지가 들어있었다.
‘직접 오지 못하니까 제델을 보낸 모양인데.’
그런데도 카미앙이 아닌 내게 쪽지를 보낸 건 이상한 일이었다. 이전의 납치사건을 떠올리며 종이를 펼쳤다. 그때와는 달리 아주 짤막한 글귀만이 적혀있었다.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작은 동굴이 있습니다.]
‘이게 뭐지?’
이번에도 뒤쪽에 뭔가 적힌 게 아닐까 싶어 종이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제델, 혹시 신관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니?”
“네, 이게 전부예요.”
“혹시 왕세자님께도 다른 서신을 보냈는지 알 수 있을까?”
“메시지는 기사님께 전하는 것 하나뿐이에요.”
“그럼 왕세자님을 만난 적은?”
“신관님께선 앓아누우셔서 성소를 잠시 닫았어요.”
“그렇구나. 아무튼, 고마워.”
제델을 돌려보낸 후 개막식이 진행되는 내내 쪽지의 내용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앞뒤로 무슨 설명이 있어야지 다짜고짜 남서쪽에 동굴이 있다니 대체 뭐야?’
‘혹시 크로버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신탁을 그대로 내게 전한 건 아닐까?’
성과는 없었지만, 한가지는 알 수 있었다. 예지의 신관, 아니 바렌시드의 신도 이번 사냥제가 마룬시에와 관계있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알았다면 분명 어떻게 해서든 카미앙에게 연락을 했겠지. 카카론드 새가 어느 쪽에 있다든지 그걸 꼭 잡아야 한다든지와 같은 힌트를 줬을 것이다.
“올해의 기사는 발롱 백작가의 다리스입니다!”
갑자기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기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한 해 동안 국왕 폐하 일가를 안전하게 보필한 점을 높이 사 이 상을 수여하겠습니다. 신의 축복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단상에 올라선 사람이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다리스의 이름을 외친 사람은 다름 아닌 대 신관이었다.
‘그렇지, 이런 게 있었지.’
“국왕 폐하께서는 올해의 기사에게 황금 배지를, 왕세자님께서는 왕가의 문양이 새겨진 손수건을 하사하시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손수건을 하사하는 건 왕비였다. 하지만 현재 왕실에는 왕비가 없었기 때문에 카미앙이 대신 선물을 하사했다.
‘근데 왜 하필 다리스가….’
영광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상을 받는 다리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게 하등 좋을 것이 없는 징조였다.
카미앙으로 플레이할 때 올해의 기사로 선정할 수 있는 사람은 세 명 중 하나였다. 근위대장 다리스, 보좌관 베르만, 그리고 바로 나.
루티시나를 공략하려면 당연하게도 베르만에게 선물을 하사하는 게 좋았다. 만일 녹시아를 선정하면 자신을 기사로 생각했는가 싶어, 되려 호감도가 크게 떨어진다.
그러기에 루티시나 외의 캐릭터를 공략하는 과정에선 다리스가 올해의 기사로 뽑히곤 했다.
‘나는 당연히 제외하고…. 설마 다른 두 명의 이벤트가 사라진 덕에 마룬시에 플러그가 선건가?’
헤슬루와 라라벨 루트로 갈 가능성이 희박한 지금 다리스가 뽑혔다는 건 마룬시에 루트로 간다는 걸 의미했다.
안될 일이었다.
이미 만남이 진행되고 있는 루티시나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에는 카미앙에게 넘길 수 없었다.
원래도 중요한 이벤트였지만 덕분에 더더욱 중요한 사냥제가 되어버렸다.
“그럼 지금부터 바렌시드의 사냥제를 시작하겠습니다!”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지금은 카미앙에게 집중하자.’
나는 말을 몰아 카미앙 쪽으로 다가갔다.
‘뭐야, 근데 이쪽에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
나처럼 카미앙 곁에 있고 싶은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동서남북 어디로든 갈 수 있건만 대부분 귀족은 카미앙의 곁에서 맴돌았다.
‘설마 다들 카카론드 새를 노리고 있는 건가?’
다행히도 그건 내 지나친 걱정이었다. 그들은 나와 다른 목적이 있었다.
“앗, 저쪽에 멧돼지가 나타났습니다!”
마치 사냥개 대신이라도 되는 양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화려한 모자를 쓴 그는 활을 집어 드는 대신 카미앙을 바라보았다.
카미앙이 여유 있게 활을 꺼내 들어 그쪽을 조준했다.
“명중! 명중입니다!”
동시에 빠르게 말을 몰아 카미앙의 화살을 확인하며 손을 흔들어 대는 무리도 있었다.
‘아아, 그렇지. 카미앙에게 사냥제는 원래 이런 날이었지.’
대다수 귀족, 그러니까 제법 힘깨나 쓴다 하는 가문이라면 오늘 잡아야 할 것은 짐승이 아니라 카미앙의 마음이었다.
“역시 왕세자님이십니다. 활 솜씨 또한 뛰어나시군요.”
“아나드 정벌에서 이렇게 활약을 하신 거군요.”
그들이 카미앙의 곁에 붙어있는 이유는 바로 저렇게 한마디라도 보태며 아부를 떨기 위해서였다. 미소만 머금은 채 손뼉을 치는 베르만이 그나마 점잖은 것이었다.
“하하, 너무 추켜세우지 마시오. 고작 짐승 몇 마리 잡은 게 아니오.”
카미앙은 괜히 겸양을 떨었지만 제법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하긴 아무리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이라고 해도 칭찬을 싫어할 사람은 없겠지.
게다가 자신이 정말 잘났다고 생각하는 카미앙이라면 귀족들이 아부를 하는 게 아니라 당연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몰랐다.
‘게임에서는 별생각 없었는데 직접 보니 참…. 눈꼴시기 그지없구만.’
그렇게 두세 차례의 사냥감이 카미앙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또 다른 외침이 들렸다.
“저기 다른 토끼들과 비교해 속도가 빠르고 민첩해 잡기 힘들다는 바렌시드 점박이 토끼가!”
굳이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저 토끼를 잡는 왕세자님의 궁술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설명해주기 위함인가?
아무튼, 첫 번째 바렌시드 점박이 토끼는 그가 말하는 사이 풀숲으로 사라졌다.
“앗, 또다시 점박이 토끼가!”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카미앙이 활시위를 메겼다. 그리고 나도 한참 뒤쪽에서 그를 따라 화살을 시위에 물렸다.
휙.
쉭.
그리고는 카미앙보다 반발 늦게 활을 쏘았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기 어려운 간발의 차였다.
“명중! 이번에도 명중입니다!”
자랑스럽게 목표물로 달려간 사람들이 아까와는 달리 조용했다. 기대하던 함성이 들리지 않는 게 신경 쓰였는지 카미앙이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일 있는가?”
“아니, 그것이….”
“어서 말해 보시오.”
“명중이긴 명중인데…. 왕세자님의 화살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