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헤슬루를 따라가기 전에 거처를 옮긴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난 근위대장의 집무실을 찾아갔다.
보고를 할 만한 위치이면서 마음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다리스 뿐이었다. 카미앙이나 베르만이라면 분명 이상한 꼬투리를 잡을 테니 말이다.
“파르미엔 기사님? 사냥제의 일로 오신 겁니까?”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리스가 무언가를 챙기기 시작했다.
“사냥제에서는 아무래도 활이 주로 쓰이니 말입니다. 근위대의 활과 화살을 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관리는 잘 되어있습니다.”
역시 친절한 다리스였다. 오늘이야말로 나에게 이런 호감을 보이는 이유가 뭔지 알아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대장님은 정말 친절하신 것 같아요.”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번일 뿐만이 아니라 카미앙 님과 저와의 관계도 믿어주셨잖아요.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요.”
“아 그건….”
다리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게 꼭 엄청난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꼭 녹시아를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긴….’
내 자랑 같지만, 녹시아처럼 강하면서 아름다운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녹시아를 좋아한다면 카미앙과 녹시아가 아무런 사이가 아니길 바라야 하는 거 아닌가?’
다리스는 민망할 정도로 카미앙과 내 사이를 응원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혹시 그런 건가. 좋아하는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겠습니다, 뭐 이런….’
망상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길어지는 침묵이 별별 생각을 다 하게 했다.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으니 그냥 스킬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다리스가 입을 열었다.
“파르미엔 백작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뜻밖에도 다리스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아버지였다.
“십오 년 전일까요. 제가 아직 수습기사이던 시절 파르미엔 백작님 밑에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기사님께서는 아직 어릴 때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공국과 전쟁이 끝날 때쯤이었죠.”
파르미엔 백작님, 전쟁, 수습기사. 단어만으로도 묵직함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예, 그러시군요.”
나는 내 얄팍한 망상을 꾸짖으며 숙연하게 다리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파르미엔가의 영애라면 그런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아무 관계도 아니시면 백작님께서도 굳이 영애를 홀로 이곳까지 보내시지 않으셨겠지요.”
“그렇게 믿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제가 이런 쪽으로 충고드릴 형편은 못되고, 그냥 지나가는 말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다리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왕족의 결혼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왕세자님의 마음이 파르미엔 영지에서와는 다르실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왕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당연하게도 허위 약혼 정도로는 다른 귀족들에게 비난을 받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를 차지하려 애를 쓸 뿐입니다.”
말하는 모습과는 달리 예상외로 제법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마치 나와 카미앙 사이의 일을 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늘 왕세자의 곁을 따라다니다 보니 신의 없고 치졸한 카미앙의 성정을 파악한 걸까?
다리스는 슬쩍 내 표정을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니 시야를 넓혀 보십시오.”
“시야를?”
“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의 왕세자님은 잊으시는 겁니다.”
갑자기? 나보고 카미앙을 잊으라고? 아니지, 충동적으로 이러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저런 생각까지 하는 것을 보면 진작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몰랐다. 난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잊고 뭘 어쩌라는 거죠?”
“새로 시작하시는 겁니다.”
종합해보면 카미앙을 잊고 시야를 넓혀 새로 시작하란 뜻이었다.
‘어디서 들었던 소리 같은데….’
전 남친을 잊지 못하고 있던 내게, 다가오던 사람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다리스의 남자다운 콧날과 턱선 그리고 태닝이라도 한 듯한 구릿빛 피부가 오늘따라 돋보였다. 무엇보다 날 마주 보는 눈빛이 유달리 반짝이고 있었다.
‘설마 이건….’
카미앙이 떠오르는 눈빛이었다.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며 내게 뭔가를 부탁할 때마다 이런 눈을 했었다.
‘그러니까 내게 매력 어필을 하는건가? 다리스가?’
전혀 그런 캐릭터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대장님, 이건 좀 갑작스러운데.”
“갑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다리스가 내게 한 발 더 앞으로 다가왔다.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칼을 뽑아 들었으니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저로서는 매우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인데요.”
다시 한번 날 지긋이 바라보던 다리스가 불현듯 한 손을 치켜 올렸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까지 왕세자님과의 관계는 전부 잊으시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시는 겁니다. 축일 신전에서의 일과 극장에서의 일이 있지 않습니까? 두 차례의 일로 왕세자님께서 기사님을 다시 보시는 것 같은 눈치입니다.”
“아…. 그러니까 이전의 관계는 잊고 왕세자님과 새롭게 관계를 만들어 나가봐라…. 이런 말씀인가요?”
“맞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그래, 이 연애 게임의 주인공은 카미앙이었다. 난 카미앙의 공략 캐릭터에 불과 하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이성과 눈만 마주쳐도 연애 플러그가 발생하는 일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왕세자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제가 하는 말이니 믿어보십시오.”
주변 사람들이 이럴 정도니 카미앙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을 듯했다. 내가 그 난리를 치며 자신을 두 번이나 구했다고 말이다.
“대장님은 사냥제에도 카미앙 님을 호위하시나요?”
난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아닙니다. 저도 발롱 가문의 대표로 사냥제에 참가하기 때문에 호위는 다른 병사들이 맡을 겁니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북쪽과는 달리 바렌시드 주변에는 맹수라 할 만한 동물이 없습니다. 사냥제라고 해도 위험할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딱히 왕세자님을 위협하는 세력도 없으니 말입니다.”
이번에도 카미앙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내 화법에 문제가 있는 건지 다리스의 눈에 ‘왕세자를 어마무시하게 사랑하는 약혼녀 녹시아’라는 필터라도 씐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난 다시 한번 화제를 돌려 내가 여기 온 이유를 말했다.
“…그렇게 됐어요. 이미 짐은 다 옮겼고요.”
“그럼 앞으로 계속 모도루 백작가에서 지내신다는 말씀입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습니다. 안 그래도 백작 영애께서 지내기엔 영 마땅찮은 곳이라 마음이 불편했는데 모도루 백작가라면 기사님을 잘 모시리라 믿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스의 입에 또다시 카미앙이 올라왔다.
“왕세자님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아직, 바쁘신 것 같아서요. 나중에 대장님께서 말씀드려주세요.”
어차피 카미앙은 신경도 안 쓸 터였다.
“그렇군요…. 왕세자님께서는 서운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왕성 안에 있다 떨어지게 되는 거니. 아니, 그래도 훨씬 더 좋은 방을 찾으신 거니 기뻐하실 수도 있겠군요.”
이걸로 다리스의 포지션이 확실해졌다. 의리 있고 착실하고 우직하지만,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왕실의 근위대장. 등장인물 프로필이라도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쓰여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관계를 자신이 믿고 있는 대로 판단하며 녹시아와 카미앙의 관계를 응원한다.’
***
이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파르미엔 영지에서 들고 온 작은 여행용 가방을 챙기는 게 이사의 전부였으니까.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헤슬루의 손에 이끌려 마차를 타고 모도루 백작가로 간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 우리의 은인 파르미엔 기사님이 먹다 뱉은 오믈렛 같은 방에 살고 있었답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있는데 놀라지 마세요. 글쎄 하녀가 한 명도 없어요.”
헤슬루에게 맞장구를 쳐주느라 그런 것이겠지만 모도루 백작도 매우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제가 파르미엔 기사님을 우리 집으로 모셨답니다. 앞으로는 우리 집에서 지내셔도 되겠죠?”
“물론이지. 기사님의 전담 하녀도 두 명 준비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기사님께서는 우리 헤슬루의 은인 아닙니까.”
“맞아요. 제 목숨값인데. 아직 한참 부족하지요!”
난 이 층에 있는 손님방을 쓰기로 했다.
비어있는 방이라고는 했지만 매일 관리를 한 건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고 은은한 향마저 감돌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폭신거릴 것 같은 새하얀 이불, 햇빛을 반쯤 가려주는 하늘하늘 한 연둣빛 커튼, 파르미엔 영지가 생각나는 짙은 녹색의 카펫.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이제 그 형편 없는 숙소와는 완전히 인연이 끊어지셨나요?”
그 방이 어지간히 싫었나 보다. 헤슬루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모도루 영애 덕분에 완전히 정리하고 나왔지요.”
다시는 돌아갈 일이 없다는 말 때문인지 자신 덕분이라는 말 때문인지 헤슬루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이 활은 뭔가요?”
내 짐과 함께 놓여있던 활을 발견한 헤슬루가 물었다.
“사냥제에서 사용할 물건입니다.”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헤슬루가 손뼉을 쳤다.
“사냥제! 기사님께서도 사냥제에 참석하시는군요!”
“네, 파르미엔 백작가에도 참석 허가가….”
“멋져라! 헤슬루도 꼭 구경 가겠어요. 분명 기사님께서 가장 많은 짐승을 잡으실 거예요.”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모도루 가문의 자제분들이 떠올랐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모도루 가에서도 장남이신….”
헤슬루는 백작가의 막내딸이었다. 위로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오빠 둘이 있었다.
“말씀 마세요. 그 사람들이 활 쏘는 건 전혀 기대되지 않으니까.”
분명 둘 다 검술이니 궁술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었지. 게임에서 등장하진 않았지만, 헤슬루가 그렇게 투덜거렸던 게 기억났다.
“그 사람들은 사냥제에서 제대로 활약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걸요. 아마 사냥제보다는 건국제나 기다리고 있겠죠.”
바렌시드의 가장 큰 행사는 사냥제와 건국제였다. 사냥제의 시작은 바렌시드 주변의 맹수를 무찌르고 도시를 안정시킬 목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바렌시드 주변에 마을이나 도시가 들어선 지금 처음과 같은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농사에 방해가 되는 들짐승이나 새 정도를 사냥하며 축제를 즐기는 날이 되었다.
‘분명 그런 설정이었지.’
그러기에 다른 소설에 등장하는 사냥제처럼 참가자들의 사냥감을 놓고 일위를 가리는 행사는 없었다. 당연히 영애들이 마음에 드는 기사에게 가문의 문장을 수놓은 손수건을 준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사냥제에서 사람들이 노리는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