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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아직 없었기에 내심 초조한 상황이었다.
‘카미앙과 그다지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그걸로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첫 만남에서 남주와 여주가 서로를 싫어하며 싸우는 건 흔한 일 아니던가.
게다가 원래 러브 라인으로 이어지는 두 사람이었다. 라라벨과 카미앙이 ‘첫인상은 좋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점점 끌리는’ 로맨스 루트를 타게 될지 몰랐다.
“주변에서 걱정이 많긴 하겠어요.”
“뭐 그렇죠.”
말의 의도를 아직 알지 못했기에 적당히 맞장구만 쳤다.
“저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계신 분이라 그런지, 제 짧은 생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시더라고요.”
라라벨의 얼굴에 ‘경멸’이라는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원래 라라벨은 극장 배우들을 광대 취급하는 귀족, 특히 남자 귀족들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게임에서는 카미앙의 정체가 후반부에 드러나기 때문에 연애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첫 등장부터 내가 왕세자요 하고 밝힌 지금 라라벨은 마음에 높은 벽을 세운 것 같았다.
“녹시아 님과 아는 사이인데 어쩜 자기 혼자 그렇게 숨어 있을 수가 있는지…. 혹시 그 토벌전인지 뭔지에서도 그러고 계시던 건 아닌가 궁금하네요.”
그뿐만 아니라 라라벨은 아무래도 카미앙의 본성을 꿰뚫어 본 것 같았다.
‘제 한 몸만 챙기는 카미앙에 대해서라면 삼박사일 떠들어도 모자라지.’
하지만 대놓고 왕세자를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난 괜히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원래 왕족은 전체적인 지휘를 하시지 직접 전투에 나서지는 않아요. 귀하신 몸이잖아요?”
“뭐, 그렇죠. 미천한 일반인들과는 다르시겠지요.”
“혹시 알아요? 앞으로 좋은 고객이 되실지도….”
“적당히 돈 많은 귀족 나리면 몰라도 그렇게 높은 분은 오히려 부담스러워요. 만일 다음에 찾아오신다면 지배인에게 부탁해 적당히 보상해드리고 돌려보낼 생각이에요.”
새침하게 말하는 라라벨의 머리 위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좋아, 이걸로 라라벨과의 이벤트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갑자기 내 얼굴에 화색이라도 돌았는지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라라벨에게 열이 나는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
‘좋아,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어.’
<현재 진행률 : 2/3>
<헤슬루 드 모도루가 어장을 빠져나갔습니다.>
<라라벨이 어장을 지나쳤습니다.>
<???>
난 시스템 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저 마지막 물음표는 바이난 공국의 공녀 마룬시에겠지.
‘사흘 후에 있는 사….’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날 찾아오는 건 드문 일이었기에 의아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아…. 베르만.”
“뭡니까.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예의가 아니지요.”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나 보다. 잔소리를 듣기 싫었기에 이번엔 환한 미소를 짓고 입을 열었다.
“어머나, 베르만 님. 오랜만이네요.”
“그렇습니까? 전 얼마 전에도 뵌 것 같은데요.”
베르만은 어떨지 몰라도 난 제법 오랜만이었다. 오징어 머리가 아닌 제대로 된 베르만의 얼굴을 본 건 말이다.
루티시나와 같은 붉은 머리에 쌍꺼풀 진한 눈이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살짝 처진 입술과 창백한 뺨이 전반적으로 우울해 보이는 건 내 편견일지도 몰랐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설마 제가 보고 싶어서 오신 건 아닐 테고….”
“사냥제 참석 여부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그걸 보좌관님께서 직접 조사하고 다니신다고요?”
“폐하의 명령이니 별수 있겠습니까.”
폐하라 하면…. 건강이 좋지 않아 마르고 안색이 어둡다는 설정을 가진 중년 남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폐하께서는 토벌전의 공을 높이 사 파르미엔 가문의 사냥제 참석을 허가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냥제에 참석하려면 허가가 필요한가요?”
“모르셨습니까? 왕실의 허가를 받은 가문만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늘 카미앙으로 플레이를 하다 보니 이런 규칙이 있는지는 몰랐다.
‘하마터면 이벤트 장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끝날 뻔했잖아.’
이 게임에서는 왕의 역할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엑스트라 취급하며 지나쳤던 국왕이었다.
‘내가 그 아저씨 덕을 보게 될 줄이야.’
그래도 아들보단 아버지가 낫구나 싶었다.
“그 예의에 어긋나는 미소는 뭡니까?”
베르만이 혀를 차며 타박했다.
“전 원래 이렇게 웃는걸요.
베르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금보니 상대를 얕잡아 보듯 내려다보는 눈빛마저 루티시나와 닮았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덕분에 지난날 장미 정원에서 루티시나에게 당했던 수모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날은 바보처럼 아무 말 못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1. 레이디를 이렇게 대놓고 바라보시다니. 예의에 어긋나는 일 아닌가요?>
<2. 루티시나 양과 정말 닮으셨네요. 행동까지도요.>
“베르만 님, 동생인 루티시나 양과 정말 닮으셨네요. 행동까지도요.”
“지금 그건 무슨 뜻입니까?”
“사교계의 꽃, 모든 레이디의 표본인 루티시나 양과 닮았다는 말이니 당연히 칭찬이지요. 바르하르트 후작께서는 두 분을 바라보시면 아주 흐뭇하시겠어요.”
베르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칭찬 같지만, 칭찬이 아니라는 걸 본인도 느끼고 있겠지.
“바렌시드에 오시더니 좀 바뀌신 것 같군요.”
“역시 사람은 도시로 와야 하나 봐요. 여러 가지를 보고 들으니 배우게 되는 게 많더라고요.”
베르만의 말 대로였다. 베르만 앞에서 쩔쩔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 나는 그 앞에서 제법 당당할 수 있었다.
‘그래도 어장 속에서 벗어난 물고기라 이건가?’
카미앙에겐 아직이었지만 그보다는 못한 베르만에는 변한 칭호의 효과가 잘 드러났다.
“녹시아 님을 생각해 충고 하나 드리지요.”
미성의 가느다란 목소리. 베르만의 목소리에는 찬물을 끼얹는 듯한 효과가 있었다.
“이번 일은 폐하 혼자만의 뜻이지 결코 왕세자님의 의견이 아닙니다. 그러니 괜히 들떠 경거망동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경거망동이라뇨?”
“요즘 왕세자님의 스케줄을 알아내 그 뒤를 쫓아다니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왕세자님께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인데 귀족 영애로서 품위 없는 행동입니다.”
이벤트 때문에 카미앙과 같은 장소에서 마주친 걸 말하는 것이었다.
“녹시아 님이 아니더라도 왕세자님을 호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니 괜히 나서지 마시길.”
카미앙을 미행했다는 오해만으로도 억울한데 지금 내가 카미앙을 구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봐요, 그건 오해….”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니 끝내기는커녕 시작하기도 전에 베르만은 방문을 닫고 나갔다.
‘매번 나보고 예의 없다고 하면서 진짜 예의 없는 게 누군데.’
생각해보니 이건 베르만에게 설명한다고 사라질 오해가 아니었다. 이벤트 현장에 없었던 베르만이 저렇게 말하는 건 누군가가 그때의 상황을 전해줬다는 뜻이었다.
크나큰 오해와 다분히 자의적인 해석을 담아서 말이다.
‘그 누군가가 카미앙일 확률이 매우 높지.’
헤슬루 일은 물론이고 가면 극장에서의 일도 내가 자신을 지키려고 나선 거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의 삐끗해 번호를 잘 못 눌렀을 뿐인데 자신에게 연락했다고 믿는 구남친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 맘대로 착각해라. 지금 네 어장을 다 부수는 중이니까.’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또 베르만?’
누구인지 고민하기도 전에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등장한 건 다름아닌 헤슬루였다.
“파르미엔 기사님!”
“모도루 영애? 어떻게 여길….”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감사 인사를 위해 정식으로 초대하겠다고요.”
백작 영애가 여기까지 직접 초대장을 들고 왔다는 말인가?
“일단 들어오세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거칠게 문을 열어젖힐 땐 언제고, 헤슬루는 우아한 귀족 영애처럼 스커트를 살짝 들어 올리며 나붓나붓하게 걸어들어왔다. 그러더니만 방 한가운데서 우뚝 멈춰 섰다.
“이쪽에 앉으시겠어요?”
마땅한 티 테이블이 없는지라 난 급하게 책상 의자를 끌어왔다. 하지만 헤슬루는 앉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여기가 헤슬루 생명의 은인이신 파르미엔 기사님의 방?”
“네, 당직 기사들이 묵는 곳이라 썩 좋지는 않습니다.”
“이건 썩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잖아요!”
양 갈래로 세팅한 머리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정도로 헤슬루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저 말라빠진 식빵 같은 침대는 뭐죠? 저런 곳에서 자면 소중한 기사님의 허리가 다 망가지고 말걸요? 누더기를 기워놓은 것 같은 이 이불은 또 뭐고요.”
헤슬루는 집게손가락으로 이불을 들어 올렸다가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 이 칙칙한 벽지, 낡아 빠진 커튼. 기사님의 정신을 좀먹어 버릴 것 같군요. 안 되겠어요. 하녀는 어디에 있죠?”
“모도루 영애. 흥분하지 마시고, 이 숙소에는 하녀가 없답니다.”
“네에-? 하녀가 없다고요? 그럼 누가 목욕물을 받아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옷을 입혀주죠?”
“제가 스스로 하고 있죠.”
헤슬루가 곧 쓰러질 것처럼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기에 난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빨래와 청소는 해주시는 분이 따로 있답니다.”
“세상에, 빨래? 청소? 그런 건 누가 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확실히 평범한 귀족 영애가 지낼만한 곳은 아니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지만 나 역시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 꽤 놀랐었지.
“안 되겠어요. 기사님은 이런 누추한 곳에 계실 분이 아니세요.”
“조만간 건의해 볼 생각이었습니다. 왕궁에 남는 방이 있다면 그곳으로….”
“아니요. 기사님을 단 하루, 아니 단 한 시간이라도 이런 곳에서 살게 한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어요.”
헤슬루가 내 손을 움켜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는지 박력마저 느껴졌다.
“저와 같이 가요.”
“네?”
“모도루 백작저로 가자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초대가 오늘이었습니까?”
헤슬루는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붕붕 저었다.
“초대가 아니고요, 이사를 하자고요.”
“설마…?”
“맞아요. 모도루 백작가에서 파르미엔 기사님께 정식으로 체류 요청을 드릴게요.”
그게 가능한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헤슬루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께서는 파르미엔 기사님께 필요한 거라면 뭐든 해주시기로 약속했어요. 헤슬루의 은인이시니까요.”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던 헤슬루가 빛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