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크로버, 괜찮아?”
“이런, 피 보는 건 정말 제 적성이 아닌데 말이죠. 그보다 일이 끝났으면 어서 제 가면을….”
얼굴을 가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듯 크로버는 내가 건넨 가면을 다시 양쪽 귀에 걸쳤다. 나는 재킷을 벗어 피가 흐르는 크로버의 어깨를 감쌌다.
마침 연막탄의 안개도 서서히 사라져가는 중이었다.
“경호원, 여기예요. 이 자들을 잡아가요.”
한 명은 정신을 잃었고 두 명은 누워서 끙끙대고 있었다. 경호원들이 납치범을 포박하며 마스크를 벗겼다.
저 멀리서 다리스 대장이 뛰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가면 극장까진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카미앙을 경호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는 사람인가요?”
“네…. 팬이라면서 자주 얼굴을 보이셨던 분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라라벨의 표정이 씁쓸했다. 바렌시드 최고의 프리마돈나, 화려해 보이지만 결코 쉬운 직업이 아니었다.
사람을 구하면 귀족이든 평민이든 신분을 따지지 않고 명성이 50씩 오르는구나. 공평한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아직 메시지 하나가 더 남지 않았나?’
“아가씨를 여기서 만날 줄 상상도 못 했는데요.”
퀘스트 달성 메시지를 기다리다 라라벨의 말에 단어 그대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네? 절 아시나요?”
라라벨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가리켰다. 그제야 크로버의 가면을 돌려주며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히 라라벨에게만 정체가 들통난 게 아니었다.
“녹시아? 그대가 여기도?”
가장 안전한 무대 소품 뒤에 숨어 이 난리 통에서 몸을 보존하고 계셨던 카미앙이었다.
다리스가 오자 그제야 몸을 일으킨 카미앙이 날 알아보았다.
“그대가 대체 여기는 왜 온 거요?”
카미앙이 내 복장을 뜯어보는 게 느껴졌다. 예지의 신관이 말한 ‘따라 해야 할 사람’이 바로 녹시아였다는 게 놀라우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카미앙을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혹시 의사 있나요? 아니면 가까운 병원이라도.”
“저희에게 맡겨주시죠. 극장 전담 주치의가 있습니다.”
“저도 같이 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여길 수습해야 할 것 같아서….”
라라벨의 말대로 극장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범인의 뒤처리는 물론이고 아직 극장 안에 남아있는 관객들도 안정시켜야 했다.
“먼저 휴게실에 가 계세요.”
“크흠.”
라라벨의 뒤에서 카미앙이 헛기침했다. 그런 카미앙은 아랑곳하지 않고 라라벨은 고마움 반 걱정 반을 담은 눈동자로 내게 말을 이었다.
“의사가 곧 갈 거예요.”
기다리다 못한 카미앙이 드디어 라라벨을 불렀다.
“크흠, 라라벨 양?”
“아, 오늘의 우승자시군요.”
이제야 눈치챘다는 듯 드디어 라라벨이 카미앙을 상대해 주었다.
“보다시피 지금은 사정이 이래서. 다음에 다시 극장으로 오세요. 꼭 보상해드리죠.”
그걸로 끝이었다. 라라벨은 적당히 비지니스 미소를 지으며 카미앙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황금 가면이 왕세자인 건 꿈에도 모르고 있을 테니 라라벨 입장에선 당연한 행동일지 몰랐다.
아무리 우승자라 해도 아수라장이 된 극장을 정리하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카미앙은 자신이 이러한 대접을 받는 게 못내 서운한 모양이었다.
“언제 말이지?”
“네?”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라라벨이 동그란 눈으로 카미앙을 돌아보았다.
“언제 극장을 방문하면 되는지 정확한 날짜를 말씀하시오.”
“음…. 내일 모래라든지 뭐 편할 때 와주세요. 지배인에게 말해놓겠어요.”
“그건 약속이 아니지 않소. 난 한가한 몸이 아니요. 정확히 그대를 만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손님.”
라라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오늘 일은 정말 유감이지만 지금 이 현장 보이시죠? 사고가 났잖아요. 다치시거나 놀란 분들을 위해 좀 양보해 주실 순 없을까요?”
양보란 단어는 카미앙의 인생에서 가장 낯선 단어 중 하나였다. 왕세자로 살아온 몸이었다. 누구보다 우선시 되었고 무슨 일보다도 먼저였다.
“내가 누군지 알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거요.”
“글쎄요, 황금 가면 님이 그 가면만큼이나 엄청난 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국왕 폐하께서 오셨다고 해도 전 같은 말을 했을 것 같네요.”
카미앙은 평민인 라라벨이 우스울지도 몰랐다. 그러나 라라벨은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치근덕거리는 진상 귀족들을 상대해 오며 단련된 몸이었다.
‘근데 지금 카미앙이 자존심에 상당히 스크래치가 난 것 같단 말이지.’
아니나 다를까 카미앙은 자신을 제치고 지나가는 라라벨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보란 듯 망설임 없이 가면을 벗었다.
“촤악” 하는 효과음이라도 들릴 것 같은 퍼포먼스였다. 금빛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렸다.
“…뭐죠?”
카미앙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라라벨은 왕세자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날 모르는가?”
“모르겠는데요?”
자기 입으로 신분을 밝히는 게 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카미앙은 괜히 나를 끌어들였다.
“내가 누군지는 저기 녹시아 경에게 물어보시오.”
“별로 그러고 싶지 않네요. 이거 놓지 않으시면 경호원을 부르겠어요. 저희 경호원이 치한을 다루는 데는 전문이거든요.”
“치, 치한?”
카미앙은 치한이란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얼른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난, 바렌시드의 왕세자 카미앙 드 라우치요.”
“왕, 왕세자님?”
“정말인가?”
“맞아, 정말 왕세자님이셔. 내가 뵌 적이 있거든.”
카미앙의 정체에 난리가 난 쪽은 라라벨이 아니라 그곳에 와 있던 사람들과 극장 관계자들이었다.
“여러분, 정숙해 주세요. 여기 왕세자님께서 와 계십니다.”
카미앙이 입을 열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크로버에게 배운 수법이었다.
“이 소란을 일으킨 납치범들에게 법에 따른 처벌을 내려 주실 겁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혹 왕세자님께서 저희 바렌시드 극장에 대해 오해하고 계신 게 있으시진 않을까 말씀을 좀 올리고 싶은데….”
사람들이 카미앙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슬쩍 그 자리를 빠져나오자 아직 휴게실로 이동하지 못한 크로버가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방치되어 있던 거예요?”
“다들 바쁘신 것 같아서.”
“그래도 그렇지, 환자가 우선이죠. 걸을 수 있겠어요?”
팔을 잡고 일으키려 했지만 크로버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아, 발을 딛기가 좀 힘든데요.”
“저한테 기대요.”
나는 크로버의 팔을 내 어깨에 두르며 그를 일으켰다.
“휴게실에서 기다리면 의사가 온다고 했으니 거기까지만이라도 힘내서 가봐요.”
부축을 받으며 겨우겨우 걷는 크로버를 보니 이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꼴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게 뭘 그렇게 나서요. 카미앙이 우승까지 했는데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어요. 그 운명의 인연인지 뭔지.”
“그래도 제가 나선 덕분에 녹시아 님께서 라라벨 님을 구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랬다. 크로버의 성물이 없었더라면 앞이 보이지 않아 제대로 싸울 수조차 없었겠지.
“설마 이런 것까지 다 예지했기에 무대 위까지 올라갔다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글쎄요. 그건 영업 비밀이라…. 억.”
“미안해요. 병사들만 다루다 보니.”
침대에 눕히려는데 상처를 건든 건지 크로버가 다시 앓는 소리를 했다.
“조금만 살살 다뤄주시겠어요?”
“이정도면 괜찮아요?”
“아아, 약간 오른쪽으로.”
나는 크로버의 지시를 성실히 따르며 그를 침대 위에 눕혔다. 의사가 올 때까지는 곁에 있어 줄 생각이었기에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나저나 우리도 어지간히 궁합이 안 좋은가 봐요.”
난 환자가 되어 누워있는 크로버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갑자기 그건 무슨 서운한 말씀이시죠?”
“봐봐요. 만날 때마다 사고가 생기잖아요. 처음 만난 곳은 지하 감옥이었고 두 번째는 신전에서 성물이 떨어졌고, 오늘은 웬 이상한 놈들이 나타나질 않나.”
“아니죠, 그게 아니라 우리가 만날 때마다 사고가 무사히 해결되는 거죠. 첫 번째는 제가 무사히 구출되었고, 두 번째는 성물이 떨어졌는데 아무도 다치질 않았고, 오늘 일도 무탈하게 잘 해결되었잖아요. 안 그런가요?”
“뭐….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렇네요.”
크로버가 무어라 말을 더하려던 차에 의사가 들어왔다.
“전 나가 볼게요. 편히 진료받아요.”
환자의 편의를 위해 자리를 피했지만 얼마나 다친 건지 걱정이었다. 문밖에서 의사의 말을 듣는데 어째 좀 이상했다.
“다행히 어깨뼈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다리는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멀쩡합니다.”
“걸으실 수 있나요?”
“네, 이상 없어요.”
“어디 봅시다…. 그렇군요. 베인 상처만 치료하도록 하죠.”
‘어깨만? 분명 아까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나는 살짝 열린 문틈으로 휴게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상체를 반쯤 내놓은 크로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도구로 의사가 어깨를 치료하고 있었다.
“정말 참을성이 많으신 분이로군요.”
“이정도야 뭐.”
‘침대에 눕는 것조차 아프다고 벌벌 떨었던 게 누군데?’
이제 조금 신뢰가 간다고 했더니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 계셨네요. 아까 그분은….”
그때, 뒤에서 라라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난 재빨리 휴게실의 문을 닫았다.
“괜찮아요. 어깨에 찰과상을 입은 것뿐이라네요. 지금 치료 중이에요.”
“녹시아 님은요?”
“전 크게 다친 데가 없어서 괜찮아요.”
“안에 계신 분이 녹시아 님도 다치셔서 같이 휴게실에 가야 한다고 하셨다더라고요.”
크로버가 그런 말을 했다고?
“직원이 부축해 이동하려는 것도 거절하면서 녹시아 님을 기다렸다고 들어서 어디가 안 좋으신가 했어요.”
그건 마치 일부러 내 부축을 받으려고 기다렸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역시 수상한 녀석이란 말이지.’
일단은 라라벨의 이벤트를 끝마치는데 급선무였다.
“오늘은 정말 녹시아 님께 신세가 많았어요.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잠시만요, 녹시아 님이라는 호칭 너무 불편한데요.”
“그럼 아가씨?”
“아뇨, 그냥 녹시아라고 불러주세요.”
“그래도….”
“본인이 괜찮다는데 뭐 어때요. 그리고 사실 제가 동생이거든요.”
그게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라라벨의 귓가에 속삭였다. 라라벨이 나지막한 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녹시아, 오늘 일은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오늘 일은! 지난번에 날 도와줬으니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요.”
“흐음, 어떻게 보답할진 제가 차차 생각해보죠.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혹시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온건… 아니죠?”
자신이 물어봤지만 그건 말도 안 된다는 듯 라라벨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녹시아가 굳이 가면 극장에 참가할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까지 촉이 좋은 사람은 아니고요. 사실 근위대에서 왕세자님을 따라가 달라고 부탁해서 말이죠.”
이번에도 근위대를 파는 수밖에 없었다.
“아, 왕세자님….”
난 라라벨의 표정을 살폈다. 헤슬루 이벤트와는 달리 이번 이벤트는 성공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