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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스킬을 엄청나게 사용한 결과였다. 이 팔찌를 끼고 확실해진 건 내 신성력 회복 속도가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가능하면 신관 복을 입고 있을 때 기도를 받고 싶은데…. 저 얼굴은 영 부담스럽단 말이지.’
내일이면 또 라라벨 이벤트가 있기에 지금 신성력을 충전하는 게 편하긴 했다.
내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뜸을 들이고 있는데 크로버가 씩 웃었다.
“사복 차림인 게 신경 쓰이시나요? 역시 녹시아 님. 제가 신관인 걸 들킬까 봐 배려해주시는군요.”
약간의 착각이 섞인 것만 빼면 마치 내 마음이라도 읽은 듯한 대답이었다.
“걱정 마세요. 이렇게 하면 아무도 기도 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크로버의 오른손이 내 왼손을 잡았다.
“이렇게만 해도 기도…. 그러니까 신성력 충전이 가능하다고요?”
“그럼요. 중요한 건 자세가 아니라 마음이니까요.”
‘맞는 말이긴 한데.’
바렌시드의 신은 어떤 측면에선 참 관대하구나 싶었다.
“남들이 보면 연인끼리 손을 잡고 있는 것 정도로밖에 안 보일 겁니다.”
“아니, 뭐, 꼭 연인만 손을 잡는 건 아니니까….”
그래, 민망하고 부끄러운 것보다 내일 이벤트를 제대로 해내는 게 우선이었다.
‘이건 매력 만점인 미남의 손이 아니라 충전기일 뿐이다. 신성력 충전기….’
그렇게 속으로 되뇌어 봤지만 그럴수록 크로버와 맞잡은 손에 신경이 쏠릴 뿐이었다. 결국, 주의를 분산시키는 쪽으로 작전을 바꿨다.
난 주변에 진열된 물건에 시선을 돌렸다.
“이정도면 괜찮으려나.”
“그러고 보니 선물이라도 사러 오신 겁니까?”
“뭐, 그렇죠.”
크로버와 내가 만난 이곳은 잡화점이었다. 액세서리 가게에서는 볼 수 없는 조잡스러운 장신구나 모자 그리고 가면이 있었다.
바로 저 가면이 내가 잡화점을 찾은 이유였다.
“크로버 씨는 여기 무슨 일이시죠?”
“저도 뭐 이런저런 물건이 필요해서요.”
그렇게 대답하는 크로버의 시선은 가면 진열대에 머물러 있었다. 나야 사정이 있다지만 보통은 저런 가면이 필요할 리가….
‘잠깐, 설마 크로버도?’
내가 생각하고도 그건 아니지 싶었다. 아무리 크로버로 신분을 감추고 있다 해도 그곳은 신관이 갈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카미앙의 다음 이벤트를 예지했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가면을 고르고 있는 크로버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늘 얼굴을 가리고 계시면서…. 밖에서도 굳이 가면을 쓰시려고요?”
“그렇죠, 저도 별로 바람직한 복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녹시아 님처럼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 많을 테니까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저런 말을 잘도 내뱉는다.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니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가면을 쓰고 어디 가시나요?”
“다소 비밀스러운 장소라 녹시아 님이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정도면 크로버도 가면 극장에 가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크로버가 무슨 수로 거길 들어가지?
“아무래도 가면 극장에 가시나 보다.”
“네. 네? 그걸 어떻게?”
크로버가 동그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능글거리는 줄만 알았던 회색 눈동자가 저렇게 놀라는 일도 있었다.
“이런 가면을 쓰고 가야 하는 곳이 거기밖에 더 있겠어요? 당장 내일이기도 하고요.”
“추리력이 대단하십니다.”
“신관님이 그런데 취미가 있으신 줄은 또 몰랐네요.”
“하하, 아닙니다. 전 업무차 가는 것뿐이죠.”
업무차 가는 거라면 카미앙의 일을 말하는 걸까? 납치당했을 때 남겼던 편지를 생각하면 왕실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신관님이 가면 극장에 업무라니 특이하네요. 아니지, 이번에도 크로버로서의 업무려나요?”
“글쎄요. 그나저나 이렇게 잘 아시는 걸 보니 녹시아 님도 가면 극장에 가시는 건 아닌가 싶네요.”
이번엔 내게 부탁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묻지 않아도 술술 말하던 헤슬루 때와는 달랐다.
예언을 함부로 누설하지 않는다더니 정말이었다.
“크로버 님이 내일 극장에 오신다면 알게 되겠죠. 제가 왔는지 안 왔는지요.”
게임에선 크로버가 라라벨과의 이벤트에 따라오는 일 따위는 없었다.
아마 나로 인해 카미앙과 헤슬루의 만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번 일 만큼은 제대로 성사시키고자 나선 게 아닌가 싶었다.
‘크로버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지의 신관은 공략집이 아니었다. 플레이어들에게 작은 힌트만을 줄 뿐이었다. 하지만 라라벨과의 이벤트는 그런 작은 힌트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가면 극장의 주인공은 부디 녹시아 님이 바라는 사람이면 좋겠군요.”
가면 극장이 열리는 날 등장하는 배우는 단 한 명뿐이었다. 어떤 배우가 등장하는지는 예고되지 않았다.
물론 난 이번 가면 극장의 주인공이 라라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하는 모양새를 보니 크로버는 예지라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엑스트라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예지의 신관이란 직업 자체가 완전 사기잖아?’
가면 극장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5골드와 당일 등장하는 배우의 사인이 있어야만 했다. 이러다 보니 입장하기는 쉽지 않았다.
5골드라는 금액도 적지 않았고, 배우의 사인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이미 연극에도 상당한 돈을 썼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 배우가 나오는 날이 언제인지도 모르니 운도 필요했다.
바렌시드 극장의 횡포라는 비난도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배우와 특별한 시간을 보내길 원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다.
운과 돈을 다 갖춘 자가 극장에 입장하면 사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퀴즈쇼와 같은 진행을 통해 배우에 관한 사소한 문제를 맞혀나가며 최후의 승자가 무대에서 배우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다른 배우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라라벨의 경우에는 우승자와 함께 이번에 흥행한 연극의 하이라이트를 재연한다. 물론 상대방이 버벅거려도 라라벨이 찰떡같이 연기해 주는 모양이었다.
“녹시아 님?”
“네?”
라라벨의 일을 생각하다 보니 크로버와 이야기 중이었다는 걸 깜박했다.
“아,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서 적당한 가면이 있나요?”
“저쪽에 적당한 게 있기는 한데…. 이 손은 어떻게 할까요? 물론 전 계속 잡고 있어도 상관 없….”
이런! 아직까지 손을 잡고 있었어!
난 얼른 손을 털어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충전은 한 참 전에 끝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오해는 마시고!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요.”
왜 신성력 충전이 끝났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안 뜬 거지? 내가 못 봤나? 이유야 뭐든 간에 땀이 날 정도로 크로버의 손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었다.
“어떤 오해를 말씀하시는 건지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요?”
내게 고정한 회색 눈동자와 한껏 올라간 입꼬리. 내 말을 꼬투리 잡아 말장난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난 미남에게는 전혀 면역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카미앙을 보면서 어느 정도 단련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바뀌면 전혀 효과가 없는 예방책이었다.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어요.”
난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갑자기요?”
“시간이 다 돼서요.”
“시간이요? 시계가 어디 있는지….”
“제 배 속에 있어요.”
“배요?”
“잘 사세요!”
급한 마음에 ‘가면’이란 주어를 생략해버렸다. 크로버에게 마치 최후의 작별 인사라도 되는 듯한 인사를 남기고 가게를 나왔다.
결국, 시가지를 두어 바퀴 돌고 나서야 다시 잡화점에 들어갈 수 있었다.
***
“네, 라라벨 씨의 사인 확인 했습니다.”
건넨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경비원이 마침내 입장을 허락했다. 보아하니 그동안 사인 위조가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았다.
이번에도 라라벨의 사인을 흉내 낸 건 아니었다. 연예인답게 라라벨의 사인은 화려하면서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같이 있었다.
그 사인을 손에 넣은 건 라라벨의 숙소에서 잤던 날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는데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진 몰랐다.
‘미리 받아두지 않았다면 이벤트의 난이도가 확 뛸 뻔했지.’
그때는 운 좋게 카페에서 라라벨을 만나기는 했지만, 극장의 프리마돈나가 한가한 날은 흔치 않았다.
“여기 5골드요.”
“네, 5골드 확인했습니다. 가면 극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좋아, 이걸로 이벤트 장소엔 입성이구나. 난 흐뭇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각양각색의 가면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 제법 볼만했다.
가면 극장은 그 이름대로 입장객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입장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건 귀족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걸 귀족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여겼다.
덕분에 생긴 게 바로 이 가면이었다. 가면무도회처럼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덕질은 부끄러운 게 아닌데 말이지.’
문제는 그날 등장하는 배우를 미리 알아내거나 우승자가 되기 위해 뒤로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카미앙이 극장에 온 일차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바렌시드에서 불법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유흥을 뿌리 뽑겠다.’
물론 그런 건 주인공인 카미앙이 할 일은 아니었다. 여기서 라라벨을 만나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저 일을 맡아 하는 사람은 베르만이었다.
‘그러고 보면 베르만도 나름대로 고생이 많긴 하지. 물론 내가 녹시아 입장이라 전혀 동정이 안 가긴 하지만…. 드디어 주인공 입장이신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카미앙이 입장했다. 플레이어 시절 써봤던 가면이니 알아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신분을 숨기겠다고 하관 부분이 드러나는 가면이 아닌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선택했지.’
그때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타인의 시선으로 보니 썩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황금을 연상케 하는 금발 머리에 살 색 한점 보이지 않고 번쩍이는 금빛 얼굴이라니.
‘뭐, 돈은 많아 보이는군.’
입술 사이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킥킥거리고 있는데 카미앙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관람석으로 들어가려는 건가 싶어 길을 비켜주었지만 번쩍거리는 얼굴이 다시 나를 향했다.
‘설마 나를 알아보는 건가?’
나 역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남성용 파티복에 신사모까지 쓰고 있어 내가 녹시아라는 걸 쉽게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쪽을 계속 쳐다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녹시아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 같기도 했다.
‘…저래 보여도 주인공이라 이건가. 설마 여기서 낼 내쫓지는 못할 테고.’
어쨌든 카미앙의 눈에 자꾸 띄어서 좋을 건 없었다. 출연진 대기실로 이어지는 통로로 슬쩍 몸을 피했다. 카미앙이 굳이 나를 따라오지 않는 이상 서로 마주칠 일이 없는 길이었다.
‘이쪽까지 쫓아오는 건 아니지? 이쪽으로 안 오지?’
계속해서 카미앙을 힐끔거리며 뒷걸음치다 무언가에 부딪쳤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반대쪽에서 오던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앞을 제대로 못 봐서.”
“녹시아 님?”
카미앙을 피했더니 크로버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