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나는 어둠 속에서 일어났던 일을 되짚어 보았다.
‘급히 피하느라 카미앙을 넘어트렸지. 아슬아슬하게 발을 피하자마자 조각이 떨어졌으니까 만약 카미앙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대리석 조각을 맞았겠지. 근데 미니게임에서만 이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고?”
“네, 바로 그렇습니다.”
빙고라고 외치는 듯한 표정으로 다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쪽이 생각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건 다를 텐데.
실수로 카미앙을 넘어트린 것이 되려 그를 구하게 된 꼴이었다. 이건 완벽한 오해였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녹시아 경.”
다리스에게 해명을 하려는 찰나 카미앙이 날 불렀다. 우리 왕세자님께서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굳이 나를 부르셨다.
설마 카미앙도 내가 본인을 구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난 ‘사람을 분석하는 마케터의 혜안’ 스킬을 시전했다.
카미앙이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녹시아 경.”
「녹시아가 날 향해 조심하라고 외쳤었지. 역시 내가 걱정돼서 쫓아온 거였군. 이런 쪽으로는 귀신같이 촉이 발달한 여자라니까.」
아니야, 카미앙. 너한테 조심하라고 한 게 아니라고. 이럴 줄 알았다면 주어를 확실하게 붙일 걸 그랬다. ‘헤슬루 조심해’라든가 ‘모도루 영애, 조심해’라든가.
“네, 말씀하시죠.”
나를 불러놓고 카미앙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제법 부담스러웠다.
“접근 금지는 없던 일로 하겠소.”
「어쨌거나 이 몸을 구했으니 공치사를 해야겠지. 이정도면 녹시아에게 가장 훌륭한 보상이겠군.」
오해라고 해명하고 싶은데 카미앙이 딱 저렇게만 말하니 이쪽에선 할 말이 없었다.
“접근 금지? 저게 무슨 말이오?”
“그거 아니겠소. 무슨 저주에 걸려서 헛소리도 하고 폭주도 하고. 오늘 보니 상태가 좀 호전됐나 보오.”
“하긴 그러니까 왕세자님을 보호했겠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는 못 들은 척 참아왔지만 이젠 무리였다. 이왕 주목받은 김에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들을 깡그리 바로 잡아야지.
모두에게 진실을 밝히려는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보상이 도착했다.
분명 헤슬루를 구한 일로 명성이 올랐는데 카미앙의 몫도 있었다.
‘카미앙을 구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하고 있으니 명성은 오른다 이건가?’
하루빨리 사람이 되기 위해 명성이 필요한 몸이었다.
‘그래, 뭐 굳이 모든 걸 해명할 필요는 없지. 살다 보면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고.’
손안에 굴러들어온 명성을 굳이 내버리고 싶진 않았다. 손바닥 뒤집듯 마음이 바뀌었다.
“본인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다리스 대장은 한 달간 근신을 명하도록 하겠소.”
다리스에게 불꽃이 튄 것 같아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게임에서도 왕세자님께서 굳이! 친히! 위험한 일을 하게 만든 근위대장을 벌하는 장면이 있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리스에게로 향한 틈을 타 얼른 헤슬루의 침상으로 이동했다.
치유의 신관은 마음의 병을 다스린다더니 거짓은 아니었다. 헤슬루의 안정에는 제법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날 알아볼 여유도 생긴 모양이었다.
“기사님께서 절 구해주신 거죠?”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한 파란 눈동자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깜박거렸다.
눈꺼풀이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눈동자가 점점 생기를 되찾았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별이라도 삼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그러니까 마치 ‘백마 탄 기사님’처럼 달려와 헤슬루를 구해주신 거네요!”
“백마 탄 기사요?”
“네! 백마 탄 기사님이요!”
눈이 별을 삼켰다면 목소리는 팡팡 터지는 불꽃을 삼킨 게 분명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백마 탄 기사가 아니라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자신을 구해 준 카미앙에게 처음 한 말이 ‘드디어 백마 탄 왕자님이 절 찾아오셨네요.’였다.
‘설마 내가 구해줘서 대사가 바뀐 건가?’
헤슬루가 두 손을 꼭 모으며 상기된 얼굴로 다시 한번 반짝거렸다.
“헤슬루는 알고 있었어요. 언젠가 백마 탄 기사님이 저를 찾아오실 거라는 걸요.”
어디선가 바람이 이는 듯하더니 분홍색 꽃잎이 날개라도 달린 듯 헤슬루 주변을 떠돌았다.
감격에 젖은 건 알겠는데 이건 웬 꽃잎? 게다가 반짝이기까지 해?
난 눈을 비비며 다시 한번 헤슬루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배경이었기에 뒤늦게 시스템 효과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진짜 녹시아가 카미앙을 생각할 때도 이런 꽃잎이 휘날리곤 했었지.
그것도 다 옛날 일이구나 싶었는데 순간 위화감이 느껴졌다. 왜 지금, 이 순간 같은 꽃잎이 휘날리는 거지?
난 별이 박혀있는 헤슬루의 눈동자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일이 잘되긴 했는데 이거 지나치게 잘 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하하, 전 백마를 타고 오진 않았답니다.”
헤슬루의 텐션을 좀 낮출 필요가 있다고 여겨 꺼내 본 말이었다. 하지만 등장인물 중 자신에 감정에 가장 솔직한 모도루 영애셨다. 이걸로는 헤슬루를 상대하기 턱없이 부족했다.
“목숨을 걸고 헤슬루를 구해주신 거죠?”
“목숨까지 걸었다는 표현은 좀 과장된 것 같고요.”
“아버지, 아버지도 보셨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순간이었는지 말이에요.”
“그래, 그래. 이 아비도 똑똑히 보았지. 파르미엔 기사님이 계셨으니 망정이지. 이 아비는 더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구나.”
‘모도루 백작님, 그렇게 부채질하지 마시라니까요.’
안타깝게도 모도루 백작은 딸 바보였다. 헤슬루가 죽었다 살아난 것처럼 느껴질 텐데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헤슬루는 다시 날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헤슬루는 정말이지 감동했답니다.”
“어, 음….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랍니다.”
아무래도 헤슬루는 기사님께 구해진 귀족 영애 포지션에 심취해 버린 것 같았다.
최근에 읽었던 로맨스 소설 중에 공주님을 구하는 기사 이야기라도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다.
“아, 기사님. 여기 상처가.”
어느 틈에 헤슬루는 내 손등에서 생채기를 발견했다. 정작 난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작은 상처였는데 어쨌든 피가 배어 나오긴 했다.
“괜찮습니다. 이런 건….”
“안 돼요.”
소매에 쓱 닦아내면 그만이지 싶었는데 헤슬루가 날 막았다. 동시에 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냈다.
겹겹이 이어진 스커트 자락 어딘가에서 나온 손수건은 그 난리 통에도 정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헤슬루는 그것을 길게 접더니 상처 부위를 동여맸다.
그 폼이 하도 어설퍼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헤슬루는 매우 진지했기에 나는 얌전히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기사님께서는 치료를 받지 않으십니까?”
“네, 치료보다는 좀 쉬어야 나을 것 같네요.”
“그럼 저희가 마차로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모도루 백작의 목소리가 낭랑했다. 마치 드디어 내게 무언가 해줄 만한 일을 찾아서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저는 왕궁까지만 가면 돼서….”
“말보다는 마차가 편하지 않겠습니까. 자 어서 가시지요.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네, 기사님! 한 달 전에 바꾼 최신식 마차에요!”
모녀가 눈을 반짝이며 날 붙잡는 통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것 참…. 생각보다 이벤트가 너어무 잘 끝난 것 같은데.’
넓고 흔들림도 없는 마차 속에서 왠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지, 이걸로 헤슬루는 카미앙에게서 영영 멀어진 것 같으니 일단은 안심할 일이었다.
***
크로버를 만난 건 다음 날이었다. 헤슬루 이벤트와 이틀 간격으로 있는 라라벨 이벤트 때문에 따로 만날 틈이 없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났다.
“녹시아 님 아니십니까?”
“아아, 어제는 여러 가지로 실례가 많았어요.”
오늘은 그 얼굴에 감탄하기보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게 되었다.
나 때문에 자신이 예언한 ‘왕세자와 운명의 여인과 만남’이 불발된 걸 알고 있을까?
다짜고짜 신관 복을 뺏어가고, 그 옷을 또 바닥에 내던진 일로 화를 내는 건 아닐까?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어제 그렇게 가버리셔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괜한 부탁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위험한 일에 나설 필요는 없으셨을 텐데요.”
크로버는 손에 얼굴을 묻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날 원망하는 게 아니라 자책하고 있다는 거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별생각 없이 관대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괜찮아요. 크로버 씨의 부탁이 아니었어도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 뭐.”
“어째서요?”
“네?”
“떨어지는 성물을 피해 사람을 구하는 그 위험한 일이 왜 마땅히 녹시아 님의 일인지 물었습니다.”
말문이 막혔다. 헤슬루 이벤트를 위해 당연히 내가 할 일이었다. 하지만 남들에게 설명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발언이었다.
“그야…. 전 기사니까. 기사니까 사람을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저와의 약속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신 건 아니고요?”
이렇게 집요하게 물어볼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다 네 탓이오’를 시전할 걸 그랬나 보다.
“네네, 그러니까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그럼…. 위험에 처한 사람이 왕세자님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까?”
카미앙 때문에 내가 몸을 날렸다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나 보다. 크로버가 콧잔등을 비비며 말을 보탰다.
“사람들 말로는 왕세자님이어서 녹시아 님이 목숨을 거신 거라고….”
쓸데없는 소문이 신전의 신관에게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졸지에 왕세자의 약혼녀라고 주장하면서 목숨까지 거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아…. 이거 완전 불쌍한 집착녀처럼 보이는 거 아냐?’
난 최대한 단호한 목소리로 잘못된 소문을 정정했다.
“아닙니다. 딱히 왕세자님을 구하려던 게 아녜요. 봐봐요. 모도루 영애도 있었잖아요? 굳이 누구를 구하려 한 거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모도루 영애 쪽이에요.”
대체 이런 오해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공식적으로 발표된 일도 아니고 귀족들 사이의 가십거리일 뿐이어서 더 난감했다.
이벤트들 쫓아다니느라 가뜩이나 바쁜 데 이런 소문까지 신경 써야 하나.
“다음에 누가 저런 이야기를 하거든 아니라고 말 좀 해주세요. 아니지, 누가 묻기 전에 왕세자가 아닌 모도루 영애를 구하려던 거라고 널리 널리 퍼트려 주세요.”
“그런 거라면 어렵지 않죠. 아무튼, 이렇게 무탈하신 모습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시종일관 심각했던 크로버의 표정이 이제야 좀 펴졌다. 그제야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 온 듯했다. 예를 들면 금색 빛깔이라곤 전혀 남아있지 않은 신성력 측정 팔찌라든가 말이다.
“신성력이 바닥인 것 같은데 혹시 기도가 필요하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