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렘 게임의 공략캐가 되었다-25화 (25/95)

25

대 신관의 설법이 한창이었기에 예배당 벽을 따라 빙 돌며 헤슬루 곁으로 갔다. 신관의 복장을 한 나를 카미앙은 당연히 알아보지 못했다.

“이단을 물리친 카미앙 왕세자의 공적을 신께서도 매우 기뻐하실 것이며….”

소음이나 마찬가지인 설법은 한 귀로 흘리며 난 헤슬루에게 집중했다. 그렇게 다섯 번 정도 스킬을 시전 했을 때였다.

“얼른 이쪽으로 와봐. 아니, 와보세요. 이제 대 신관님이 왕세자님을 부르실 차례랍니다.”

“모도루 영애, 목소리 좀 낮추시죠. 그러다가 백작님께서 꾸중이라도 하시면 어쩌려고요.”

“백작님께서 모도루 영애를 혼내신다고요? 차라리 대 신관님이 갑자기 왕세자님을 꾸중할 확률이 더 높을걸요.”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조잘대며 자리를 옮기는 헤슬루를 보니 이벤트가 시작할 타이밍이었다.

“나오신다.”

헤슬루의 말대로 뒤쪽에 앉아있던 카미앙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성물은 카미앙이 헤슬루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떨어지게 돼 있었다.

천장을 쳐다보았다. 아까만 해도 멀쩡했던 성물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애써 채웠던 단추를 다시 풀며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은 신관 복을 슬그머니 벗어 내렸다.

그러는 동안 카미앙이 점점 헤슬루에게 가까워졌다.

다섯 걸음. 네 걸음.

동시에 천장에서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지금이었다.

“조심해요!”

난 일부러 큰 소리를 냈다. 카미앙의 주의를 끌어 성물이 떨어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예상대로 카미앙이 뒤를 돌아봤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라는 것을 알아챈 카미앙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녹시아 따위가 이 영광스러운 순간을 망치려 드는 것에 화가 났겠지.

‘내가 본인의 이벤트를 뺏어가는 걸 안다면 더 화가 나실 텐데 말이지.’

곧 일어날 사고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 확실했다.

몸이 그 어느 때 보다 가뿐했다. 마치 주위의 시간이 멈추고 나만이 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직 카미앙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헤슬루도. 이제야 뒤늦게 천장을 바라본 카미앙도. 나를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도. 전부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헤슬루와 나 사이가 점점 멀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이상하다. 어째서 거리가 좁혀지질 않지?’

그때였다. 눈앞에 먹물이라도 들이부은 듯 사방이 캄캄해졌다. 알 수 없는 힘이 달려가던 발을 꽉 붙잡았다. 덕분에 시원스레 바닥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대리석은 딱딱해서 아프다니 뭐니 하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이러면 헤슬루를 구하지 못한다는 초조함이 밀려왔다.

‘망한 건가?’

땅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는데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시스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기회는 단 한 번! 떨어지는 성물을 피해 헤슬루 영애가 있는 곳까지 도착하세요,>

“뭐? 미니게임!?”

많은 플레이어를 좌절로 몰고 갔던 그 미니게임을 굳이 구현했다니.

“잠깐만, 그럼 그 미니게임을 나보고 직접 몸으로 뛰라는….”

대리석 조각이 나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말을 마치지도 못한 채 급히 몸을 옆으로 굴렸다.

쿵!

조각이 떨어지며 일으킨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깔, 깔릴 뻔했어.’

숨을 고르기도 전에 등허리가 허전한 것이 느껴졌다. 조심스레 팔을 뻗어 바닥을 더듬어 보았다.

‘바닥? 바닥이 없어?’

미니게임이 어려웠던 이유는 좁게 이어져 있는 절벽에서 낙하물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몸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곳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를 피해 헤슬루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야 했다.

게임에서야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해도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답이 무엇인지 굳이 알아보고 싶진 않았다.

“시스템! 대체 왜 이런 게 그대로 구현된 거야?!”

난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하지만 신중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잠시였다.

마치 날 노리고 떨어지는 듯한 조각들 덕에 앞구르기를 하며 강제로 나아가야 했다.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무너지는 발밑을 박차며 달려가면 조각이 미사일 마냥 내게로 떨어졌다.

‘저기 보이는 게 헤슬루겠지?’

낭떠러지와 길을 구분하기도 어려운 어둠 속이었다. 사람의 형체를 한 무언가가 헤슬루밖에 더 있겠나 싶어 그쪽을 향해 열심히 구르고 달렸다.

“됐다! 헤슬….”

이런! 카미앙!

어슴푸레한 빛을 받으며 내 시선을 끈 사람은 헤슬루가 아니라 카미앙이었다. 카미앙은 나와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던 그 모습 그대로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니가 왜 여기 있니.”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다시 폭격이 이어졌기에 그럴 틈이 없었다.

“에잇!”

몸을 피하다 보니 카미앙을 넘어트리고 말았다. 평소대로였다면 감히 자신을 넘어트렸다면서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얌전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카미앙을 돌볼 여력 따윈 없었기에 왔던 길을 돌아가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뛰어갔다.

“있다! 있어!”

이번엔 진짜 헤슬루였다. 드디어 이 잔인한 미니게임의 끝이 보였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정신을 집중했다.

마지막에 떨어지는 돌덩어리는 이전 것 보다 다섯 배는 컸다. 어떻게 달려가도 헤슬루에게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공략법은 단 한 가지. 있는 힘껏 달려가다 멀리뛰기를 하듯 도약해 헤슬루를 감싸 안으며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었다.

“헤슬루!”

헤슬루에게 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름을 부르며 몸을 날렸다.

손끝에 동그란 어깨가 닿았다. 나는 그 작은 몸을 그대로 내 품 안에 집어넣듯이 껴안았다.

충격을 받지 않도록 다른 손으로는 헤슬루의 머리를 폭 감싸 안았다.

나는 그대로인데 세상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기분이었다. 뒤따라 크고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울림이 바닥을 통해 전해져 왔다.

“꺄, 이게 무슨 일이야.”

“왕세자님, 카미앙 왕자님은 무탈하신가?”

“이쪽에 영애가 쓰러졌습니다.”

비명과 고함이 뒤섞여 들려왔다. 멈춰있던 시간이 이제야 움직였다.

파편이 튀고 먼지가 이는 바람에 잠깐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내 품 안에서 헤슬루가 아기 새처럼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모도루 영애, 괜찮아요?”

“으으으.”

짧은 신음과 함께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정신을 잃은 건 아닌 듯했다.

기절은 곤란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확실히 알아야 했다. 어설프게 넘어갔다가는 주인공인 카미앙에게로 공로가 돌아갈지 몰랐다.

난 몸을 일으킨 후 헤슬루를 바로 눕혔다.

“혹 다치신 곳이 있나 살펴볼게요. 다리는 움직이실 수 있습니까? 팔은 어때요?”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다.

“제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래도 의사 선생님을 뵙는 게 좋겠죠? 일어날 수 있겠어요?”

난 헤슬루의 어깨와 허리를 받쳐 그녀가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마치 영혼이 쏙 빠져나간 인형처럼 멍하니 있던 헤슬루의 입에서 이제야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헤슬루, 헤슬루는 너무 놀라서….”

그마저 길게 가진 못했다. 헤슬루는 어깨를 들썩이며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많이 놀랐죠? 괜찮아요. 괜찮아.”

“그냥, 흑, 갑자기, 흑, 막 구르고 무서운 소리 나고….”

나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헤슬루! 괜찮아?”

“우리 헤슬루는 무사합니까?”

내가 그녀를 안심시키는 사이 친구들과 모도루 백작이 굴러다니는 파편을 밟으며 달려왔다. 모두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긴 했지만 다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들것을 가져온 신관들이 헤슬루를 그 위에 눕혔다.

“일단 치유의 성소로 아가씨를 모셔가겠습니다.”

“그래 주시오. 어서! 빨리!”

“제가 보기엔 그 아가씨가 아니라 이쪽이 더 다쳤을 것 같습니다만?”

모도루 백작 앞에 선 건 신관 복을 갖춰 입은 크로버였다.

“이 레이디께서 모도루 백작가의 영애분을 껴안고 구해내신 게 아닙니까. 본인이 쿠션이 되어 굴렀으니 당연히 이쪽 분의 상태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웬일로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는 크로버였다. 그제야 이 은인을 알아챘는지 모도루 백작이 내 손을 잡았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희 헤슬루를 구해주시다니, 뭐라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파르미엔 백작가의 녹시아라고 합니다.”

***

“정신이 드십니까?”

“왕세자님이 깨어나셨소.”

치유의 성소는 먼저 맞이한 손님으로 떠들썩했다.

‘카미앙이 여기 있을 이유가 있나?’

헤슬루를 구하러 뛰어들진 않았으니 카미앙이 다쳤을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자리보전하고 누워있다는 건.

‘혹시…. 나 때문에 진짜로 뒹굴었나?’

예감이 좋지 않았다.

미니게임에서 카미앙을 밀쳤던 게 떠올랐다. 설마 그때 현실의 카미앙이 떠밀려 진짜로 넘어지기라도 한 거라면….

‘설마 나 왕족 상해죄 이런 거로 잡혀가는 건 아니지?’

제대로 패 주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이 정도로 감옥행이라면 너무 억울했다.

“기사님!”

멀리서 날 알아본 다리스가 곧바로 뛰어왔다. 날 잡으러 오는 건가? 도망을 가야 하나? 무언가를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다리스가 너무 빨랐다.

“왕세자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화색이 만면한 얼굴로 말하는 모습이 내게 죄를 물으러 온 것 같진 않았다.

“그, 그것 참 다행이군요.”

카미앙이 아니라 내게 하는 말이었다.

“대체 그 찰나의 순간에 어찌도 그리 민첩하게 움직이셨습니까. 아니지, 그 전에 성물이 떨어질 거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채셨습니까?”

“어쩌다 보니….”

“이게 다 파르미엔 기사님 덕분입니다!”

“제 덕분이라뇨?”

“근위대를 이끄는 수장으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리스 대장님!”

아무래도 다리스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난 팔을 높이 뻗어 올려 그의 양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당연히 파르미엔 기사님께서 왕세자님을 구하신 일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물론 왕세자님을 지키는 자로서….”

내가 카미앙을 구해? 그 뒷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