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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앞으로 귀족들의 마차가 연이어 도착했다. 중간중간 조각상이 세워져 있는 정원을 지나 신전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제법 많은데. 헤슬루를 잘 찾을 수 있을까.’
있었다. 헤슬루가 신전에 발을 들이자마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스프링처럼 말아 양쪽 옆으로 늘어뜨리고 커다란 리본으로 마무리한 분홍색 머리카락. 마치 크레이프처럼 겹겹이 쌓아 올린 풍성한 드레스. 멀리서도 존재감이 느껴지는 레이스와 프릴의 향연.
헤슬루 혼자만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비슷한 복장을 한 또래 영애 세 명이 헤슬루와 발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겠군.’
난 슬쩍 그들의 곁에 따라붙었다. 헤슬루와 무리는 그들만의 대화에 여념이 없었기에 내가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모도루 영애, 너무 빨리 걷는 거 아닌가요? 품위 있는 레이디는 어디서나 경거망동하지 않는 법이랍니다.”
“어머, 헤슬루는 다리가 길어서 걸음이 빠른 것뿐인걸요. 그리고 이렇게 빨리 걷는다고 해서 품위가 없어지는 건 아니랍니다.”
“그건 모도루 영애 말이 맞답니다. 그리고 빨리 가야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겠어요?”
귀족 영애라기보다는 꼭 여중생 같은 이들 무리는 이제 갓 사교계에 데뷔한 어린 영애들이었다.
누구보다 멋진 레이디가 되겠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그저 목표일 뿐. 누가 보기에도 귀족 영애의 표본이라고 할 만한 루티시나와는 사뭇 결이 달랐다.
헤슬루가 관심 있는 것은 패션이든 음식이든 가십거리이든 분야를 막론한 최신 트렌드였다. 덕분에 헤슬루는 늘 바렌시드 전역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오죽하면 ‘게임 내 맵을 전부 개방시키고 싶다면 헤슬루를 공략해라.’라는 말도 있었다.
“근데 말이지,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왕세자님을 볼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있지! 우리 다과회에 참석하는 영애 중에서 아직 왕세자님의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 잘 알지? 우리가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지 않겠어?”
“맞아, 개선식 때는 너무 멀리 계셔서 그 레몬 같은 머리카락 밖에는 못 봤단 말이야.”
최근 영애들 사이에서 사교계의 가장 큰 화두는 왕세자인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정벌에 성공하고 돌아온 왕세자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으니까.
카미앙이 전장에 간 사이 데뷔탕트를 치른 헤슬루와 그 또래의 영애들은 왕세자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안달이 난 상태였다.
“다들 뭐 하시는 거죠? 레이디의 말투를 잊으셨나요?”
“아니, 아니랍니다. 저희 언니 말에 따르면 왕세자님이 그렇게 잘생기셨다는군요.”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왕세자가 되셨겠지요.”
“모도루 영애, 왕세자는 가장 잘생긴 왕족을 뽑는 게 아니랍니다.”
“그건 헤슬루도 잘 알고 있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장차 국왕이 되실 분인데 작고 못생기고 초라하면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헤슬루의 좌우에 선 두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는 사람이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귀여운 대화였다.
‘근데 어째 뒤통수가 따가운걸.’
헤슬루를 쫓아 예배당까지 들어왔는데 어디선가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설마 침입자라도 있는 건가?’
축일에 적이 나타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모를 일이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크로버도 납치를 당했었으니 말이다.
절로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축일 행사가 있어 검을 놓고 왔다는 것을 깜박했다.
‘웬만한 자라면 맨손으로 거뜬히 상대할 수 있겠지.’
방어 자세를 취하며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런데 예상외로, 그곳에는 카미앙이 있었다.
‘… 어째 요즘 자주 마주치는걸.’
그렇다 해도 강변에서처럼 의외는 아니었다. 헤슬루와의 이벤트가 있는 날이니 카미앙을 만나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날 보고 있는 카미앙의 눈빛이었다.
‘꼭 눈빛으로 날 얼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
왕세자답게 근위병을 대동한 채로 끊임없이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상대해야 할 사람들도 많고 나와는 제법 거리도 있었다.
그런데도 내 존재가 심히 거슬린다는 듯 짜증과 싸늘함이 섞여 날 째려보고 있었다.
‘설마 내가 자신을 보기 위해 축일 행사까지 쫓아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와 자꾸만 눈이 마주치자 크게 한숨을 내쉬는 꼴이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곧 곁에 있는 다리스에게 날 가리키며 무언가를 지시했다.
어째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파르미엔 기사님. 지난번에는 제대로 감사 인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다리스는 아무런 죄가 없기에 일단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제가 용건이 있어서 오신 게 아닌가요?”
난 카미앙 쪽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이 송구스럽습니다만….”
“괜찮아요. 다리스 대장은 카미앙 님의 말을 전달하는 것뿐이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왕세자님께서 자신의 반경 오 미터 이내에 접근 금지라며 기사님께 예배당의 구석으로 이동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오 미터요?”
“네, 오 미터라십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구체적인 숫자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네네. 그래도 예배당에서 쫓아내지는 않으시네요.”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십시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
카미앙이 억지를 부리며 날 예배당 밖으로 내보낸다면 별수 없이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축일 행사의 주인공은 신의 뜻을 받으러 이교도를 물리치신 왕세자님이시니 말이다.
‘이 정도면 감지덕지하지.’
얼른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 위치를 확인하는 카미앙과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마치 ‘조금이라도 가까이 오기만 해 봐라’라고 으름장을 놓는 것 같았다.
‘덕분에 헤슬루와의 거리가 멀어졌군그래.’
이벤트가 발생할 지점과 명당자리를 찾아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돼버렸다. 하여튼 참 고마운 짓만 골라서 하는 카미앙이었다.
헤슬루와 나 사이의 거리를 몇 번이나 가늠해보았다. 아무리 녹시아라 해도 여기서 단숨에 헤슬루에게 달려가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 더더욱 불리해질 뿐이었다.
“성 바데로우의 축일을 맞아 신전에 찾아오신 모든 분께 신의 가호가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초조했다.
이대로는 헤슬루 이벤트를 카미앙에게 뺏기게 될 것이 뻔했다.
***
“신관님!”
난 예지의 성소로 뛰어 들어갔다. 달리던 끝에 문을 열어젖히는 바람에 문이 벽에 부딪히면서 쿵 소리를 냈다.
“녹시아 님? 갑자기 무슨 일이시죠?”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크로버는 당황한 듯했지만, 차근차근 설명해 줄 시간이 없었다. 나는 크로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일단 그 옷!”
“옷?”
“좀 벗어보세요.”
“옷을 벗으란 말씀입니까?”
내 요청에 크로버가 반사적으로 앞섶을 가렸다.
“신관님이 말씀하셨죠. 왕세자를 지키라고.”
“그거랑 제 옷이랑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뒷걸음질 치던 크로버가 소파에 걸려 그대로 그 위에 주저앉아버렸다. 이제 더는 도망갈 곳은 없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일단 벗으면서 얘기하죠.”
마음이 급했다. 말로는 크로버의 동의를 구하는 척했지만 난 이미 그의 옷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일단 가장 벗기기 쉬운 후드를 뒤로 젖혀버렸다.
베일에 감춰져 있던 보물이 나타나듯 그 얼굴이 드러났다.
까만 눈동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부채처럼 펼쳐진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박이며 내게 설명을 요구했다.
‘절대 이상한 맘이 있어 옷을 벗기려던 게 아닌데, 저 얼굴을 보니 꼭 그런 놈이 된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입에서 변명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난 저기 퀘스트, 아니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져서 신관으로 위장을 해보려고.”
분명 횡설수설한 것 같았는데 크로버가 알아들었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도 너무 성급하셨습니다. 옷을 벗는 일이라면….”
동시에 그의 긴 손가락이 목을 채우고 있던 첫 번째 단추를 풀었다.
“저 혼자서도 할 수 있거든요.”
그가 눈가를 사르르 접으며 보란 듯 대답했다. 연이어 손가락이 두 번째 단추를 향해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굳이 피해주실 필요 없습니다. 갖춰 입을 건 다 입은 상태로 신관 복을 위에 걸쳤을 뿐이니까요.”
그 목소리에서 평소보다 더 진한 리듬감이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겠지.
“그래도.”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나는 그 소리를 지우기 위해 카미앙에게 접근 금지를 받은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결국, 내가 근위대에 들어가지 않은 게 맘에 안 든다는 거죠.”
“흐음, 정말 그 이유뿐이려나요. 자, 전 다 됐습니다.”
어깨 위로 흰 옷자락과 함께 크로버의 손이 내려앉았다.
“도와드릴까요?”
숨을 제대로 쉬기 위해선 크로버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반경 오 미터라는 거리는 카미앙이 아니라 크로버에게 지켜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상대의 얼굴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느낄 수 있었기에 난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고 뻣뻣이 앞으로 걸어갔다.
“혼자 입을 수 있습니다.”
걸음걸이만큼이나 경직된 대답이 튀어나왔다. 단추를 끼우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인 그것처럼 자꾸만 실수를 했다.
“벨트는 됐어요. 급하면 옷을 벗어 던져야 하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옷이 너무 끌리는데.”
자칫하면 넘어질 것 같았다. 마치 긴 드레스를 다루듯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야만 했다.
“제 치수에 맞췄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녹시아 님.”
크로버가 광대를 한껏 위로 올리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생각해보니 단순히 신관으로 변장할 요량이셨다면 그냥 제 옷장에 있는 신관 복을 가져가셨으면 될 일이었는데요.”
옳은 말이었다. 난 왜 신관 복이 크로버가 입고 있는 저것 한 벌 뿐이라고 생각했을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이제 보니 난 당황하면 목소리가 커지는 타입이었다.
“아, 전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혹 녹시아 님께서는 제 얼굴을 보고 싶으신 게 아닌가. 그러다보니 얼굴을 덮는 이 신관 복이 원망스러우신 건….”
크로버의 말을 계속 듣다가는 이벤트고 뭐고 여기서 수치사 해 버릴 것 같았다.
“이러다가 중요한 순간을 놓칠 수도 있겠군요. 신관님은 옷장에 있는 옷을 꺼내입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내 할 말 만을 던져놓고서는 얼른 예지의 성소를 빠져나왔다.